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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단편습작 (24)
절망클럽
벽장 안의 검객 풀벌레 소리로 소란스러운 녹음 가득한 산 길에 창이나 칼 따위를 제멋대로 짊어진 일련의 무리가 나타났다. 뭔가를 찾는 듯 했지만 설렁설렁 주위를 둘러보거나 바닥의 나뭇가지와 돌멩이를 툭툭 걷어차며 움직이는 모습은 기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이 산허리로 사라지자 길 옆 비탈에 쌓여 있던 낙엽더미 속에서 한 남자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가 말라붙어 얼굴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입고 있는 갑주를 보아 일개 졸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무리가 사라진 방향을 살펴보고는 조심스레 산 아래로 움직였다. 허벅지에 박혀있던 화살은 꺾어내 반 토막이 나 있었지만, 옆구리의 화살은 온전한 상태였고 어깨에도 창에 찔린 상처..
N에게 고함" xmlns:ap="http://www.remus.dti.ne.jp/~a-satomi/ap">N에게 고함씌어진 모든 것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N에게 고(告)함희우의 하이힐 소리가 늦은 오후, 아직 복도 등을 켜지 않아 어스름한 오피스텔 복도에 울려 퍼졌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어깨에 맨, 작은 서류 가방도 검은 색으로 맞춘 그녀의 걸음은 묘하게도 그녀 주위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울림이 아닌 지배였다. 그녀의 가는 허리와는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긴 하이힐에는 어울리는 단어. 뒷모습에서 보이는 고혹함과 정장 슈트의 어깨 부근에서 아..
왜 그는 소년병을 쏘는가? 그 날 아침은 다른 날과 달랐다. 매일 아침 시끄럽게 울어대서 그의 선잠을 깨우던 새들도 울지 않았으며, 바람도 불지 않았다. 아마도 일체의 소음이 사라진 아침의 태양이 그를 바꾸어 놨을 것이다. 아니면 나무 위에 둥지에서 마스크를 쓴 채 지속된 매일의 살인이 그를 서서히 미치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 날은 그렇게 시작했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버릇처럼 자신의 라이플에 탄을 장전했고, 또 버릇처럼 스코프를 통해 누군가를 겨누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미쳐있었고, 사고 곡선이 기묘하고 예측 불가능한 선을 그리고 있었으며 위험한 장난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막 소년티를 벗은 병사 하나가 막사에서 걸어 나와, 나무 위의 저격수가 그를 겨누고 있을..
악마 같은 친구 새벽부터 세차게 창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드는 오후, 그 끈적끈적하고 눅눅한 오후에 찾아오는 손님은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더구나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하얀 얼굴을 내미는 원고지와 입력을 재촉하듯 반짝이는 워드프로세서의 프롬프트를 오가며 언제 감았는지 모를 기름기 가득한 머리를 긁어대던 남자에게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 부담스러운 방문이 어쩌면 그 때까지 그의 목을 조르던 빈 공간의 압박으로부터 숨통을 트여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주영은 부담스러움에 찡그렸던 얼굴을 애써 펴고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갔다. (그에게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감정을 환기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억지웃음을 짓는 버릇이 있었다.) "누구세요?" 인터폰이 고장 난지 꽤 되었지만 주..
야수의 눈으로 돌아오다.(Vampiric Touch) 잠에서 깨긴 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그대로 눈을 감고 온 몸의 감각에 집중한다. 소음, 냄새, 온도 ……. 처리 되지 않은 정보들이 처리를 기다리듯 몰려든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어서는 그것들에 대한 올바른 인지(認知)가 불가능하다. (사실 올바른 인지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눈을 떠야지 하고 마음먹은 순간 오른쪽 갈비뼈 밑이 뻐근하게 저려온다. 과음한 다음날 느껴봤음직한 통증에 왼손을 오른쪽 갈비뼈 밑에 가져다 대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것은 마치 예열이 끝난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했다. 눈을 뜨고 처음엔 집인가? 하고 생각했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밝은 빛에 눈이 적응하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맞..
Ghost 잃은것을찾지못하고맞는아침은불만으로가득차있다.그런아침이반복되면이제불만은체념으로바뀌고그뒤에는천천히잊히게된다.그러나잃어버린것또는잃어버렸다는사실을잊지못한다면그것은또다른형태로변질된다.그때에는잃은것이무엇인가가중요한것이아니라잃어버렸다는사실이변질된정신을잠식하고잠식된정신은해소할수없는욕구의구덩이를채우기위해탈출구를찾는다. --------------------------------------------------------------- 기계처럼눈을뜨는것과동시에헬릭은자신이이상한곳에와있다는사실을알아챘다.실오라기하나걸치지않은채고문기구같은커다란금속바퀴에거꾸로매달려양쪽팔에칼로베어낸상처로는피를흘리고있었다.수면가스같은걸로잠에빠졌는지지끈거리는고통이그를괴롭히고있었고그때문인지자신이지금이곳에와있는지에대해기억해내기쉽지않았다.지금선명히떠..
야수의 눈으로 돌아오다.(Vampiric Touch) 잠에서 깨긴 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그대로 눈을 감고 온 몸의 감각에 집중한다. 소음, 냄새, 온도 ……. 처리 되지 않은 정보들이 처리를 기다리듯 몰려든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어서는 그것들에 대한 올바른 인지(認知)가 불가능하다. (사실 올바른 인지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눈을 떠야지 하고 마음먹은 순간 오른쪽 갈비뼈 밑이 뻐근하게 저려온다. 과음한 다음날 느껴봤음직한 통증에 왼손을 오른쪽 갈비뼈 밑에 가져다 대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것은 마치 예열이 끝난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했다. 눈을 뜨고 처음엔 집인가? 하고 생각했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밝은 빛에 눈이 적응하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맞..
술친구 네 잔째 소주를 마시고 나자 뱃속이 따뜻해지면서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좀 천천히 마셔.”윤석은 내 술잔에 소주를 8할 정도 채워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난 픽 웃고는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입 안에 집어넣고는 말했다.“예전에는 소주가 참 썼었는데 말이야. 요즘에는 소주 말고 다른 술은 마시기가 싫어.”“아무리 좋아해도 너무 자주 마시면 몸에 안 좋아.”윤석은 이렇게 말하고 자기 잔을 비웠고 그것을 보고 있던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잔에 술을 따랐다.“한 병 더 시킬까?”비어 버린 술병을 보고 그가 말하자 나는 더 마실 수 있을까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주인이 소주를 가져와 탁자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뭐 부족한 건 없으세요.”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은 친절하고 정감이 가는 ..
내가스피드에목을맨것은언제부터였을까.언제부턴가나는그속도감이란것에사로잡히고말았다.아마도컴퓨터를접한이후라고생각하고있는데지금생각해보면그러한욕망은컴퓨터를배우고나서부터강렬해지고분명해졌다.조금더빠른CPU,더빨리돌아가는하드디스크,더빠른네트워크속도......빠르지않으면뒤쳐지니까...빨라야했다.그것뿐이었다.그렇게빠른물건들로내가무슨생산적인일을하는것도아니었으나난누구보다빨라야했다.그런이유에서일까내가즐기던컴퓨터게임이란게전부레이싱게임들이었다.두뇌와신경의빠른반응을유도하는게임들볼륨을키우고흘러나오는메탈음악에푹빠져들어폴리곤과폴리곤으로구성된그가상의자동차사이를미끄러지듯빠져나갈때에느끼는쾌감이란뭐랄까.발끝이저리며숨이가빠지는...그러나정신은더욱맑아지는그런느낌이었다.조금더빨리코너링하기위해0.1초라도기록을갱신하기위해,드리프트턴을익히고안쪽차선을선점해달..
Hellic - 어떤 멸종 (Some kind of Extinction)헬릭은 진흙 참호 안에서 Blink430(저격소총)을 어깨에 걸쳐 놓고 눈을 감고 있었다. 편히 잠을 자지 못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이렇게나마 쉴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는 전투 교관으로 지원한 자신이 어째서 이 축축한 진흙 참호 바닥에 앉아 졸고 있는지 잠시 떠올렸다. 왕정국가인 프로낭의 대관식을 앞두고 벌어진 반 왕정파의 반란은 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뒤늦게 반 왕정파에 가담하면서 내전의 양상을 띠며 장기화 되고 있었다. 특히 왕궁의 북쪽에 위치한 넓은 평야에선 한 달내내 전선이 몇 킬로미터의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대치하는 지리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그 덕분에 우기를 맞은 넓은 평야는 지문처럼 긴 진흙 참호의 미로로 변해 버..
A:(버스정류장의어느남자) 거대한고래의무리가작은물고기틈을지나나에게다가온다.어쩌면영원히정복할수없을지모를저고래의무리에는셀수없는상처와전투를찬양하는무늬가녀석의오랜인생만큼이나퇴색되어나를노리고있다.푸른심해의바다에서나를부르는녀석의노랫소리끼이익끼익,얼마나멀리까지퍼질지모르나분명나만듣고있지는않으리라. 허나내주위아무도녀석이가까이다가옴을두려워하지않는다.흰바탕에오렌지무늬가선명한녀석이입이날향해입을연다.먹힐것인가.나는먹히고마는것인가. 싸울꺼다세상끝까지쫓아가싸울거다.먹혀버린다리를찾기위해싸우지는않으나녀석의오만한유영이날화나게한다.작살을녀석의머리에박아시끄러운노랫소리를다시는내지못하게해주마.……. B:(버스정류장의어느여자) 버스정류장한편의남자가아까부터지나가던버스를유심히도바라보고있다.어찌나살기가등등한지…….마치사냥감을앞에둔맹수처럼움직임은없으나..
무월광검 한 자루 만을 허리에 찬 채 산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이 산만 넘으면 목적지에 다다른다는 생각에 날이 저무는 것도 상관치 않고 길을 재촉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달이 뜨지 않는 날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날이 어둡기 전에 다다르리라 생각했던 길은 내 생각과 달리 험해서 날이 어두워지자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때 멈추고 노숙이라도 했어야 하는 건데 중간에 잘못 들어 결국엔 길이 아닌 곳을 헤매게 되고 말았다. 수풀과 나지막한 잡목의 가지들을 헤치느라 손에 이곳저곳 자그마한 상처가 많이 생겼는지 따갑고 쓰라렸지만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예전 기억대로라면 한참 전에 인가를 발견했어야 하는데 조그만 불빛하나 보이지 않는 것을 ..
시크릿 가든의 우주 공항은 다른 행성에 정착하려는 이민자들과 어딘가에서 벌어진 전쟁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거나 또 다른 전쟁터를 찾아 풀벌레처럼 떠도는 용병과 군인들로 항상 붐볐다. 사실 이런 혼잡한 틈을 타서 특정 행성에선 상당한 액수의 금액이 현상금으로 붙어있는 이른바 지역적 범죄자들이 시크릿 가든으로 숨어들어 은신하기도 했고, 지구 연합의 세력 확장에 반대하는 테러리스트들의 중간 거점으로 이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시크릿 가든 우주 공항의 경비요원들은 혹시 모를 사고나 숨어드는 범죄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셀돔행 셔틀 탑승구 옆에 서 있던 경비실장 역시 혹시라도 시크릿 가든의 범죄자 중 하나가 도망쳐 나가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지금 막 탑승구에 올라타기 시작한 승객들을 하나하..
에린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꽤 오랜 시간동안 그녀가 자각하고 있던 살아있다는 감각과는 다른, 육체적인 생존이 아닌 정신적 부활 그것은 마치 얼어붙어 있던 수도관이 조금씩 녹으면서 그 속으로 물이 흐르기 시작하며 막혀 있는 관을 넓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가 자신이 그 동안 -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시간이었다 ― 꿈조차도 꾸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한 것이 그녀의 뇌 속 길고 복잡하게 뻗은 모세 혈관사이로 체온을 가진 혈액이 흐르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한 생각 이었다. 왜 자신이 꿈조차 꾸지 않았는지 어째서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은 밤에 빠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기억은 ……. 그것 역시 희미하기만 했고 단지 굉장히 고통스러웠던 기..
팩키지쉽이라고불리는지구에서제작된수송선이제34정거장Secretgarden으로들어온것은새벽이다되어정거장내의기상환경장치가새벽안개를뿌릴즈음이었다.정거장외곽으로접근한팩키지쉽은연료보충을위해정거장안쪽으로들어가기시작했다. “항상하는일이지만이번일은조금꺼림직하단말야” 항해사제논이조종석에앉아이렇게이야기하자선장로즈는흠하고작음소리를냈다. 막대한돈에다질병이나기타위험에서사용할수있는FREEZE티켓까지가입시켜준다는말에선뜻응하기는했지만내용물에대해알고있지도못하고가장마음에걸리는것은우주연합의가장끝에있는Seldom으로간다는것이었다.지구인은한명도살지않고외계인들만살고있는그곳은항상시끄러운일만가득한곳이었기때문에지구에서보내는이물건이혹그곳의테러리스트들에게보내는무기는아닐까생각도들었다. “이봐선장...우리한번들여다볼까...안에뭐가들었는지?” 이제막서른을넘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