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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습작

N에게 고함

달부장 2006. 5. 3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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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에게 고함


씌어진 모든 것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

N에게 고(告)함

희우의 하이힐 소리가 늦은 오후, 아직 복도 등을 켜지 않아 어스름한 오피스텔 복도에 울려 퍼졌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어깨에 맨, 작은 서류 가방도 검은 색으로 맞춘 그녀의 걸음은 묘하게도 그녀 주위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울림이 아닌 지배였다. 그녀의 가는 허리와는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긴 하이힐에는 어울리는 단어. 뒷모습에서 보이는 고혹함과 정장 슈트의 어깨 부근에서 아래로 뚝 떨어지는 곡선은 그것과 어울려 그녀 귀에 누가 서 있더라도 선뜻 말을 걸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1701호 앞에 다다른 그녀는 가방 옆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뭔가 확인 하는 것 같더니 그것으로도 성이 안찼는지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데요. 1701 호가 맞죠?”
‘어 그래 맞을 거야. 잠깐! 1901 이었나? 지금 바빠서 그러는데 내가 확인하고 문자메시지로 보내줄게.’

맞은편의 남자는 쉴 새 없이 말을 내뱉더니 희우가 뭐라 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휴대전화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메모지를 다시 한 번 쳐다보고 나서 희우는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1701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을 누르고 나서 잠시 동안의 정적이 지나간 뒤 문 뒤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누구세요?”
“정희우라고 합니다. 양석주씨 소개로 왔어요.”
“아.”

아마도 문 너머의 남자는 이제야 약속을 기억해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철컥하는 소리들이 연달아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오늘 인터뷰하기로 했었죠!”

문 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자신의 상상과 달라 희우는 잠시 얼굴에 당황스러움을 내비쳤고 그것을 알아챘는지 남자가 씩하고 웃더니 오른쪽 옆머리를 슬쩍 손으로 넘기고 희우를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따라 들어가며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작은 배신감 같은 것에 스스로에게 꿀밤이라도 때리고 싶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나유진 이란 남자에 대한 상상이 하나도 들어맞지 않고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하기 전까지 희우는 나유진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보곤 했었는데 뭐랄까 꼭 집어 이야기 할 수 없지만 말끔하고 이성적인 냄새를 풍기는 남자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만난 남자는 그 것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렇다고 대중매체에서 간혹 등장하는 괴팍한 소설가의 모습 - 헝클어진 머리에 안경너머로 붉게 충혈 된 눈을 번뜩이는 - 과도 달랐다. 갸름한 얼굴에 짧게 깎은 머리, 그리고 민무늬 남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은 그냥 평범했다. 무늬가 없는 인상이랄까 언뜻 털털해 보이기도 하고 가끔 찡그리는 미간은 까탈스러워 보였으며 억지로 짓는 미소는 어설펐고 눈빛은 날카로웠기 때문에 외모만으로는 색깔을 쉽게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커피 좋아하시죠?”

유진이 현관 앞에 서 있는 희우에게 이렇게 물었다. 집안을 살펴보느라 그랬는지 갑작스런 질문을 알아채지 못하던 희우가 겨우 예하고 대답하자 유진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살짝 웃었다.
“앉으세요.”
“네”
유진이 커피를 가지러 가는지 부엌으로 들어간 사이 희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가방을 열었다. 거실 한쪽에 놓인 TV와 가정용 게임기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재떨이와 담뱃갑, 뭐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독신남의 냄새가 나는 집이라고 희우는 생각했다.

‘구석을 뒤지면 도색 잡지나 오래된 빨래 같은 게 튀어나올지도 모르지…….’

희우가 이런 공상을 하고 있는 동안 유진이 부엌에서 머그컵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와서 하나를 희우 앞에 내려놓았다. 뭐 머그컵을 들고 온 것에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지만 잔에 담긴 게 커피가 아니라 희우가 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커피보다 좋을 것 같아서요. 유자차도 괜찮으시죠?”
“네.”

희우는 괜찮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유진의 눈가에 웃음이 지나치는 것을 보고 잠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커피를 권하더니 가져온 유자차! 어쩌면 아까 유진이 물었던 커피 좋아하시죠라는 물음이 커피를 마시겠냐고 권한 것이 아닌 문자 그대로 커피를 좋아하는지 확인하는 거 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었다.

“석주선배 같은 사람이 인터뷰 부탁을 하기에 무슨 일인가 했어요.”
“아. 저희 오빠 친구 분이라서 잘 알아요. 저 랑도 친한 편인데 …….나 선생님이 후배라고 하기에 제가 좀 졸랐죠.”

희우가 유진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망설이다가 나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마침 차를 마시고 있던 유진이 사래가 들린 듯 캑 하는 소리를 내더니 웃었다.

“선생님이라뇨. 하하 저랑 나이 차이도 많이 안 나시는 것 같은데 그냥 편하게 이름 부르세요!”
“아…….네 그럼 바쁘실 텐데 얼른 인터뷰할까요.”
“아뇨 전 괜찮으니 편한 대로 하세요”

희우는 가방 안에서 녹음기와 수첩을 꺼내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가방을 들어 자기 옆에 가져다 놓고는 녹음기의 REC 버튼을 눌렀다.

자 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충동적인, 약간 기괴한 작가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 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아직 이 상태다. 주변의 아는 사람에게 줄거리를 간단하게 이야기 해 줬더니 “그래서? 뭐 반전이라던가 그런거 없어?” 라는 말을 했다. 안 그래도 소재에 너무 치우치고 등장인물들 (주인공을 뺀)이 너무 전형적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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