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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눈으로 돌아오다 - 上 본문

단편습작

야수의 눈으로 돌아오다 - 上

달부장 2005. 3. 12.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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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눈으로 돌아오다.(Vampiric Touch)

잠에서 깨긴 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그대로 눈을 감고 온 몸의 감각에 집중한다. 소음, 냄새, 온도 ……. 처리 되지 않은 정보들이 처리를 기다리듯 몰려든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어서는 그것들에 대한 올바른 인지(認知)가 불가능하다. (사실 올바른 인지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눈을 떠야지 하고 마음먹은 순간 오른쪽 갈비뼈 밑이 뻐근하게 저려온다. 과음한 다음날 느껴봤음직한 통증에 왼손을 오른쪽 갈비뼈 밑에 가져다 대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것은 마치 예열이 끝난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했다.

눈을 뜨고 처음엔 집인가? 하고 생각했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밝은 빛에 눈이 적응하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학생의 놀란 눈과 마주친 순간 덜컹하더니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제야 난 주위를 둘러보았고 지하철 안에 앉아 있다는 걸 깨닫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지금이 몇 시인지 그리고 어디 즈음 인지가 궁금해진다. 주변의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이렇게 당황스러워 하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을 테지만 주변의 어느 누구도 나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 전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맞은편의 여학생도 지금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검은색 쌕(Sack) 안에 손을 넣어 MP3 플레이어인지 핸드폰인지 모를 것을 꺼내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나도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9 4일 오후 5 43.

9 4일 이란 글자를 핸드폰의 LCD에서 확인한 순간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한 머리가 다시 어지러워진다. 내 기억 속의 나는 9 2일 오후 5시에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 뒤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지만 9 4일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48 시간이 사라진 것이다. 아니 시간이 사라졌다고 하기 보다는 눈을 감았다 뜬 사이 다른 차원으로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동안 내가 여기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난 오른쪽 갈비뼈에 손을 가져다 댄 채로 입구 쪽으로 걸어가 정차하기를 기다렸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이 흔들리지 않도록 왼손으로 끈을 잡고 사람들 틈에 끼어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는 오후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자취방까지 돌아오는 동안 가슴의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곳의 통증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어깨 뒤가 따가웠고 팔 다리의 근육들이 쑤셔왔다. 마음 같아서는 뜨거운 온돌방에 깔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푹 잤으면 싶었지만 자취방은 싸늘했다. 가방을 침대 옆에 내려놓고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낯익은 천장의 무늬가 나를 반긴다. 따끈한 온돌방만큼은 아니지만 가만히 누워 있으니 그래도 몸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틀간의 공백은 아직도 머리를 짓누른다. 술을 먹고 필름이 끊겨 버린 것도 아니고 지하철에 올라탄 이후 기억이 사라지다니……. 확실히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틀의 공백이 생겼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를 쥐어짜서 기억해 내는 일이 하기 싫었다.

“그래 잊어버린 걸로 그만두지 뭐!”

생각해 내려 하면 오히려 서리 낀 유리처럼 희미해지는 기억이 나를 포기하게 만들고 말았다. 사라진 이틀 동안이라는 시간의 가치가 나의 고민보다 무겁지 못했다. 보지 않을 TV를 버릇처럼 켜고 누워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취방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지수가 TV 앞을 가로 막은 채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선배 도대체 어디 있었어? 연락도 안 되고 거기다 스터디도 펑크 내고…….”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귀를 아프게 했다. 뭐라고 조잘대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을뿐더러 자신이 어째서 추궁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납득하기 힘들었다. 화를 내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시처럼 가슴을 훑어내고 고막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왜 내가 그녀에게 추궁 받아야 하는가? 이틀의 시간은 포기했지만 난 아직도 어떤 사건의 피해자였다. 게다가 그녀와 나와의 지금까지의 관계에서 내가 그녀에게 저런 힐책을 들을 정도의 빈틈을 보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녀의 힐책이 애정을 바탕에 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그런 이성적 판단을 가로막는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내 감정을 뒤흔들고 있었다.

“조용히 해!”

순간적으로 몸을 들어 그녀의 목을 쥘 듯 손을 뻗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내 행동에 그녀가 놀랐는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 보다 더 놀란 것은 나였다. 분명 내 목소리가 맞았지만 뭐랄까 어둡고 습한 그리고 상대를 집어 삼킬 듯 큰, 전에는 한 번도 내 본적 없는 그런 목소리였다. 야수가 내 품는 절규가 그런 소리였을까. 지수는 내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금세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발 좀 조용히 해!”

 

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하자 그제야 마음이 좀 진정됐는지 침대에 풀썩 주저앉아 말했다.

 

“방금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선배가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봤어요.”

 

그 녀의 목소리가 이렇게 기분 나쁜 것이었던가? 마치 한마디 한마디가 내 고막을 뚫고 들어와 내 뇌를 찔러 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숨을 깊게 들이 쉬고는 그녀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거나 내 방에서 나가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다르다. 뭔가 다르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녀의 목소리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나 스스로에게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나를 거울로 바라보는 것 같은 일이었다. 내가 아닌 나를 자신으로 확인하는 일, 표리(表裏)의 나를 등호로 연결 짓지 못하는 일.

“무슨 일 있어요?”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모르겠어. 아니 별로 알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

내 말에 그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내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더니 눈을 살짝 찡그리며 내 눈을 주시한 채 물었다.

“선배! 칼라렌즈 했어요?”

“뭐?”

그녀의 엉뚱한 질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안경도 쓰지 않는 내가 렌즈를……. 그런 일은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수는 여전히 내 눈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당신 같은 사람이 칼라렌즈 같은 것을 이라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선배 거울 좀 봐요. 눈동자 색이 뭐랄까? 밝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화장실 문 옆에 붙은 벽걸이 거울로 다가가서 내 눈동자를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내 그림자 때문에 눈동자의 색은 잘 보이지 않아 몸을 조금씩 틀어 겨우 확인해야 했다.

“정말이죠?”

내 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지수가 내 뒤에 대고 물었다. 하지만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내 눈동자를 건드렸다. 별다른 이물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젠장! 내 눈동자 색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평범한 검정에 가까운 고동색. 그래 분명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밝다. 짙은 노란색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눈동자 색 같은 것에 신경 써 본 일이 없어서 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긴 별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밝은 데서 보면 조금 무서울지도 모르겠는데요. 선배 안경도 안 쓰더니 눈이 갑자기 나빠진 거예요?”

“아니. 이거 렌즈 아니야.”

“그래요. 선배 눈동자 색이 원래 그랬어요?”

난 원래 이랬다고 말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라진 이틀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일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아니 그만두자. 애써 찾은 평정을 깨고 싶지 않아 난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지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침대에서 일어서서 말했다.

“선배 집에 있는 거 확인했으니까 갈게요. 피곤한 것 같으니까 얘기는 나중에 해요. ! 그리고 내일 스터디 있는 날이니까 준비해오세요.”

지수가 이렇게 말하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나가는 문소리를 듣고 나는 일어나 앉았다. TV에서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식상한 포맷의 코너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책가방을 집어 들어 가방 안에 있는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들어 전원을 켜고 누웠다. 내 눈을 카메라로 찍어 확인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플래시를 끄고 실내촬영 모드로 설정한 뒤 내 얼굴을 몇 컷 찍고는 재생모드로 놓고는 사진들을 확인했다.

눈동자 색이 변한 것이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확실히 노랗고 어찌 보면 괴기스럽기도 하다. 적목 현상(플래시를 사용한 사진에서 눈이 붉은 빛을 띠는 현상)이 일어난 사진과는 또 다르다. 그런데 방금 찍었던 사진들을 확인하느라고 이동 버튼을 누르다 이상한, 그리고 언제 찍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사진을 발견했다. 지하철 안의 모습을 찍은 사진인데 우습게도 좌우의 남녀 사이의 텅 빈 좌석에 포커스를 맞춰 찍은 사진이었다. 난 카메라의 설정을 건드려 사진 정보가 나타나도록 바꾸었다. 9 2 5 10분 그렇다면 내 기억에서 사라진 시간동안 찍은 사진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빈 좌석을 찍었을까? 양 쪽의 사람들을 찍으려다 잘못 찍은 것인가도 생각했지만 그것도 이상한 것이 마치 텅 빈 좌석을 찍으려 한 것처럼 가운데가 정확히 맞아 있었다. 난 다른 사진이 더 없나 확인했지만 9 2일에 찍은 것은 그 사진뿐이었다. 사진 때문에 잊어버리자고 했던 것을 잊고 기억해 내려고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역시 부질없는 짓이었다. 난 그 이상한 사진을 한참 더 쳐다보다 전원을 끄고 가방에 집어넣은 뒤 형광등을 껐다.

 

오른쪽 갈비뼈 밑의 뻐근함이 좀 가라앉는가 싶더니 이제는 명치와 등 뒤가 아파온다. 통증이 몸속을 돌아다니며 나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연예인의 웃음소리가 의식에서 조금씩 멀어지더니 의식이 잠시 멈춘다.

통증 때문인지 두 번인가 잠에서 깨어 뒤척였고 세 번째 잠에서 깼을 때는 방송시간이 끝난 TV에서 시끄러운 잡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TV를 끄기 위해 리모컨을 찾으려고 침대 위를 손을 더듬거리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잡음에 섞여 무언가의 움직임이 어스름한 TV 뒤편에서 느껴졌다. 몸을 돌려 뭔가 있나 살펴보려는데 뭔가 체온이 있는 것이 나를 덮친다. 팔꿈치 같은 것이 갈비뼈를 세게 누르는가 싶더니 뭔가 번쩍이고 날카로운 것이 목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피할 겨를도 없이 오른손으로 그것을 낚아챘다. 화끈한 느낌이 오른손을 타고 어깨를 지났고 뒤이어 진득한 액체가 손에서 느껴진다. 쓰라림과 얼얼함이 머릿속에서 점멸했다. 그 바람에 난 정신을 차렸고 힘을 다해 나를 덮친 자의 턱을 올려쳤다. 둔탁한 소리,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을 꼭 쥐고는 침대에서 뛰쳐나와 불을 켰다. 그리고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가득한 피나 내 오른손의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내게 달려들었던 상대가 상상 밖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수야!”

내가 겨우 입을 열어 아직도 칼을 손에 쥔 채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는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죽여야 할 것 같았어! 본 뒤로 너무 무서워서……. 머릿속이 이상한 생각들로 가득차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녀는 횡설수설 하더니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발견하고는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섰다.

“날 쳐다보지 말아줘. 아니! 날 해치지 않을 거지.”

그 녀가 두 손을 벌리고 내게 다가오는 바람에 난 뒤로 물러서다 벽에 막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말았다. 그녀의 모습은 괴기 영화에서나 본 섬뜩한 모습이었다. 공포와 체념이 섞인 인간의 표정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 그전에는 알지 못했다.

“지수야 정신 차려!”

겨우 용기를 내 그녀에게 다가가 뺨을 가볍게 때리자 그녀가 다시 주저앉았다. 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전화기를 들었지만 어디에 전화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

긴장이 풀린 건지 손바닥의 통증이 강하게 느껴진다. 출혈량도 많아서 내가 서 있던 바닥은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손의 상처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난 얼른 수건을 손에 감고는 지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정신 좀 차리고 선배 좀 봐!”

하지만 그녀는 내 눈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겁에 질려 떠는 그녀의 모습은 방금 전 칼을 들고 달려들던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경찰에 알려야 하나? 혹 그녀에게 정신 병력이 있었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간다.

‘일단 그녀를 집에 보내고 난 병원에 가자!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해서는 날이 밝은 뒤에 들어보고.’

복잡하게 꼬일지 몰라 나는 경찰에 연락하는 대신 그녀를 집에 데려갈 사람을 부르기로 했다. 내가 물러서 일까? 나에게 그녀는 나를 죽이려 했던 살인미수범이 아니라 후배였다. 내 손의 상처보다 그녀가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이 내게는 더 큰 고통이 될 것 같았다. 핸드폰을 꺼내 연락할 만한 사람의 번호를 찾는데 지수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선배 내가 왜 여기 와 있어요?”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난 하마터면 웃어버릴 뻔 했다.

“뭐? 정신이 들었냐?”

내 가 겨우 이렇게 묻자 그녀는 대답 대신 방 안의 혈흔들을 보고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나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행동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신이 나를 칼로 찌르려 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녀가 연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언뜻 스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녀가 나를 죽이려는 확실한 의도가 있었을 때에야 일어날 일이었다. 그러나 정신병이나 내 얄팍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심령현상 같은 게 아니라면 그녀가 나를 죽일 만한 이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손을 좀 베어서 바닥이 엉망이야.”

거짓말을 하고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내 말에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그녀 옆으로 다가가 그녀가 모르게 바닥에 떨어진 칼을 살짝 발끝으로 차 침대 밑으로 밀어 넣고는 말했다.

 

“꿈 꾼 것 아냐. 너 피곤하다면서 여기서 잤잖아.”

 

어 디서 이런 거짓말이 생각난 걸까. 사실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난 거짓말에 능한 편이었다. 표현하기는 애매하지만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말해서 30%정도의 사람을 속여 넘길 수 있는 정도랄까. (물론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말에 실제로 속아 넘어갈 사람은 없겠지만)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해답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경우라면 설명 가능한 답을 던져주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여기서 잤어요? 요즘 정신이 없나 봐요. 그런데 선배 많이 베었나 봐요. 얼른 병원에 가봐야겠어요.”

 

그녀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내 손을 바라보며 말한다.

 

“괜찮아 살짝 베인 건데 피가 좀 많이 나네. 넌 얼른 집에 들어가 늦었어.”

“네……”

 

그녀를 집에 돌려보내려고 난 서둘렀다. 피 묻은 시트를 걷어내고 바닥의 피를 대충 닦아내자 지수가 말했다.

 

“병원에 같이 가 줄까요?”

 

“아니 혼자 가도 돼! 괜찮아 . 얼른 집에 가봐!”

 

“네.”

 

그 녀가 내 손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방을 나가자 나는 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귀신에 홀린 것 같다는 것이 이런 것 일까? 잠깐 만이라도 그대로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서 빨리 병원에 가야할 것 같았다.

 

가방과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와서는 가까운 병원이 어딘지 한 참을 생각해야 했다.

 

‘택시 타고 기사에게 물어보는 편이 빠르겠군.’

 

결국 나는 손에 검붉은 피가 묻은 노란색 수건을 감은 채 길 한 쪽에 서서 택시를 잡아야 했다. 몇 대의 택시가 조롱하듯 나를 지나치고 나서야 겨우 택시 한 대를 잡아 올라타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기사에게 물었다.

 

“가장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가주세요.”

 

다급한 내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기사는 미터기의 버튼을 누르고는 아무 대답 없이 어디론가 출발했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나 아직 꺼지지 않은 신호등의 정지 신호 앞에 차를 세우고 나서야 룸미러로 내 쪽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요?”

 

건조한 그의 목소리는 전혀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아서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살짝 베였는데 피가 좀 많이 나서요.”

 

“젊은 양반이 조심하시지! 뭘 하다 이 밤중에 손을 베었소?”

 

난 그의 두 번째 물음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버렸다. 나름대로는 별로 대답할게 없다는 표현이었는데 그 정도로는 상대의 궁금증을 잠재울 수 없었던 모양인지 신호가 바뀌고 차를 움직이고 나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 많이 아프면 내가 진통제라도 하나 드릴까?”

 

“아닙니다.”

 

내 대답이 그의 말을 끊을 듯 튀어 나오자 기사도 그제야 포기했는지 아무 말 없이 운전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익숙한 침묵이 지나고 차가 부드러운 정지 모션과 함께 불 켜진 병원 응급실 앞에 서자 나는 도망치듯 퍼런 지폐를 내밀고는 차에서 내렸다. 병원에 들어서자 내 손에 감긴 노란 수건의 피를 발견한 간호사 하나가 말할 새도 주지 않고 팔을 끌고 한쪽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손에 감긴 수건을 벗기면서 말했다.

 

“접수는 조금 있다 하시구요. ! 잠깐만요. 김 선생님!”

 

그녀의 빠른 움직임이 왠지 나를 진정시켰다. 됐다. 뭐 골치 아픈 밤이긴 했지만 ……. 그래 알아서 해주겠지. 잠시 후 여의사 하나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아까 간호사가 벗기다만 수건을 마저 벗기고는 내 손바닥을 살펴보다 말했다.

 

“다치신 분이 이 분 맞아요?”

 

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다시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아한 얼굴과 그녀 가슴에 적힌 이름표김준희였던가? – 그리고 내 손이 마치 술에 취했을 때처럼 오버랩 된다.

 

“다치신 곳이 어디에요?”

 

그 녀의 목소리가 이젠 머릿속을 울린다. 그리고 내 눈은 분명 피를 흘리고 있어야 할 내 손바닥에 못 박혀 있었다. 여기 저기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있지만 상처가 보이질 않는다. 그러고 보니 통증도 없다. 의사는 나보다 더 당황한 듯 내 몸을 살피더니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내 눈에 의료용 손전등을 비추더니 말했다.

 

“술 드셨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칼에 손이 ……. 베어서 …….”

 

“흠”

 

그녀의 표정이 알 수 없다는 듯 변하다가 수건에 묻은 피를 지나 칠 수 없었던 건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방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잠시 기다려주실래요.”

 

뭘 어쩌려는 걸까. ! 그보다 내 손은 어떻게 된 일인가. 내 방안에 떨어졌던 피며 그 통증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분명 지금도 벌어진 살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통증이 내 신경을 괴롭히고 있어야 했다. 또 의사는 지혈을 하고 벌어진 상처를 꿰매고 붕대를 감고 있어야 한다. 간호사가 나를 끌고 왔을 때의 편안함은 상처가 사라진 내 손을 바라보는 순간 복잡한 모양으로 변질되었다. 난 아직도 손에 상처가 있는 것처럼 손을 꼭 쥔 채 고개를 내밀어 나를 진찰하던 의사의 모습을 찾았다. 그녀는 저쪽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어쩐지 마지막에 나를 바라보던 눈이 범죄자라도 보는 듯 떨리더니 아마 경찰서에라도 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수상한 것인가? 물론 내 손에 사라진 상처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일이긴 하지만 단지 손에 피 묻은 수건을 감고 들어와 멀쩡히 진찰을 받는 사람이 수상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단지 이상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이상한 사람을 대하는 그녀의 행동은 수상했다. 어쩌면 응급실에서 끔찍한 사건들을 많이 접해서 그녀에게는 나의 이상한 행동들이 상대적으로 위험해 보였는지 모르겠다. 난 그녀의 모습을 살피면서 천천히 밖으로 움직였다. 아직 접수도 하지 않았고 이대로 들어왔던 문으로 되돌아 나가면 끝……. 그 뿐 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저기요.”

 

그 의사의 목소리다. 나는 못 들은 척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에 섞여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잠시만!”

 

그 목소리를 신호로 해서 나는 입구로 뛰었다. 그리고는 어둠속으로, 나를 집어삼켜줄 어둠속으로 달려갔다.

얼 마나 달렸을까. 어느 낯선 골목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펴보면서 정말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피만 묻어 있을 뿐 멀쩡한 내 손을 확인한 순간 나는 문득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라진 기억,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지수,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손바닥. 인과도 불문명하고 엉뚱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꿈이라고 하면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된다. 난 여기 까지 생각하다가 참지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멍청한 자식! 꿈일 리가 없잖아. 차라리 네가 미쳤다거나 마약 같은걸 해서 환각을 보고 있다는 편이 좀 더 설득력 있을 거야.”

 

그 렇게 자신을 힐책하고 난 뒤 천천히 일어서서 간판 불빛과 가로등 빛으로 환한 거리로 걸어 나왔다. 피가 말라 붙어 흉해 보이는 오른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니 누구도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알아채거나 섣부른 짐작을 하지 못하도록 태연한 모양으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늦었지만 거리는 밝고 사람들의 움직임은 조금 느슨해 졌을 뿐 다름없다. 그 사이에 끼어들어야 하는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겨우 그들을 흉내 내며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걷다 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들었는데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잡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누구인가 확인했는데 하얀 가운을 입은 채로 아까의 그 여의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만……”

 

그 녀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아래쪽에서 뭔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더니 배가 따뜻해진다. 그리고는 이내 뜨거워지더니 통증으로 바뀐다. 하지만 손을 베었던 느낌과는 또 다른 통증이 척추를 탄다. 그녀를 길 쪽으로 밀쳐내고 난 배를 움켜쥐었다. 메스 손잡이가 내 배에서 반짝거리며 실실 웃고 있었다. 길에 넘어진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 다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메스를 뽑아낼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이를 악문 채 그것을 뽑아 바닥에 팽개치고는 내게 다가오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

 

이 를 악물고 한 말이라고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목을 그녀의 작고 차가운 손으로 움켜쥐었다. 길 한 복판에서 나를 죽이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몇 몇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그들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여자의 손을 떨쳐내야 했지만 몸에 힘이 빠진다. 아까 여자를 밀쳐냈을 때 남아있던 힘을 다 써 버린 것 같았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차가운 그녀의 손이 내 체온을 받아들인 듯 온기를 찾아가는 것 같더니 여자의 손이 내 목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소리치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왜 그러세요. 정신 차려요.”

 

하 지만 멈출 수 없는 기계에 시동을 건 것처럼 깊고 어두운 바다로 빠져들어 가는 나를 끌어 올릴 수는 없었다. 땅으로 스며드는 물처럼 나는 지하로 내 의식의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갔다. 기억나지 않는 유영(遊泳)이 끝나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옆에 그 여자가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차리셨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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