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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멸종

달부장 2005. 2. 1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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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ic - 어떤 멸종 (Some kind of Extinction)

헬릭은 진흙 참호 안에서 Blink430(저격소총)을 어깨에 걸쳐 놓고 눈을 감고 있었다. 편히 잠을 자지 못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이렇게나마 쉴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는 전투 교관으로 지원한 자신이 어째서 이 축축한 진흙 참호 바닥에 앉아 졸고 있는지 잠시 떠올렸다. 왕정국가인 프로낭의 대관식을 앞두고 벌어진 반 왕정파의 반란은 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뒤늦게 반 왕정파에 가담하면서 내전의 양상을 띠며 장기화 되고 있었다. 특히 왕궁의 북쪽에 위치한 넓은 평야에선 한 달내내 전선이 몇 킬로미터의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대치하는 지리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그 덕분에 우기를 맞은 넓은 평야는 지문처럼 긴 진흙 참호의 미로로 변해 버렸다. 그 진흙의 미로에 헬릭은 떨궈져 있었다. 단순히 재수가 없었던 것이지만 너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불평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잠이 금방이라도 그를 집어 삼킬 듯 했지만 그는 눈만 감고 있을 뿐 잠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지구와 너무 닮은 프로낭의 환경 때문에 그의 신경은 날카로워져 있었다. 지구를 떠난 지 오래된 탓에 그의 몸은 이제 지구의 환경에서는 괴로움을 느끼는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지구와 너무 비슷해서 힘들다니, 나중에 지구로 다시 돌아가 쉬겠다는 생각 같은 건 버려야겠군.”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몸을 앞으로 숙여 허리를 두들겼다. 이전에 있던 전장에 비해 프로낭의 중력이 높았기 때문에 허리가 가끔 뻐근해지곤 했고, 그 때마다 진통제를 먹을 수는 없어 대 부분은 이렇게 그냥 통증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허리뿐 아니라 심장에도 무리가 가는지 가끔 가슴에 뭐가 틀어 막힌 것 같은 통증이 올 때도 있었는데 몇 번인가 야전 병원에 들러보기도 했지만 처방이라고는 진통제가 고작이었다. 사실 프로낭 주위를 돌고 있는 환경 적응 셔틀에서 적어도 세 달 동안은 적응 훈련을 받았어야 했지만 반 왕정파의 치열한 공격 덕택에 불과 이 주간의 적응 훈련만을 마친 뒤 투입된 것이 문제였다. 헬릭이 적응 훈련도 마치기 전에 투입된 것은 프로낭과 비교적 환경이 비슷한 지구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덕분이었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너무 오래 지구를 떠나 있던 헬릭의 몸은 지구의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헬릭이 근무하기로 했던 부대의 지휘관이 반 왕정파로 돌아서고 육상 전투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전투 교관이 아닌 용병으로 전장에 보내진 덕분에 몸은 더욱 고달파져 버렸다.


허리의 통증이 좀 가시는 것 같아 다시 참호에 등을 기대려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헬릭이 반사적으로 라이플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봐! 헬릭 자는 거냐?”

“아니.”

낯익은 목소리에 헬릭이 짧은 대답을 던지자 허리를 숙인 채 참호를 따라 걸어온 남자가 헬릭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밀어버린 머리에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은 약간의 조소가 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진흙이 잔뜩 묻은 전투복의 팔을 걷어 올린 뒤  왼쪽 팔꿈치를 긁적이며 말했다.

“분명히 자고 있을 거라고 다른 녀석들과 내기를 했는데 안자고 있는 걸 보니 불면증이라도 걸린 모양이군. 왜 그래 겁이라도 먹은 건가? 눈빛이 처음 전장에 나온 타깃 같아. 환경 때문인가?” 

프로낭의 용병들은 처음 전장에 나온 자들을 루키(Rookie) 대신 타깃(Target) 이라고 불렀다. 실시간 탄도 역추적 장치가 참호 주변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반 왕정파의 저격수들을 막기에는 그 수가 부족했다. 그로 인해 실전을 처음 경험하는 군인들 중 참호 위로 머리를 잘못 내밀었다가 저격수의 표적이 된 자들이 많아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었다.

“힘들군.”

힘들다는 헬릭의 말에 남자는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더니 상의 오른쪽 주머니에서 작은 캡슐을 꺼내 헬릭의 손에 쥐어 주었다. 흙먼지가 묻은 채 푸르게 반짝이는 캡슐이었다.

“이거라도 써 보라고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각성효과가 있으니 잠은 못 자겠지만 통증이나 공포감은 좀 사라질 거야.”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일어나 참호를 따라 걸어갔다. 남자가 사라지고 나자 헬릭은 손을 펴 캡슐을 확인 하고는 왼쪽 탄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케일, 이걸 너의 호의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헬릭은 남자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남자가 주고 간 것은 지구에서는 향정신성 의약물로 분류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 프로낭에서 그것은 향정신성 의약물이 아닌 그들만의 종교적 행사를 위한 일종의 기호품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복용 후 일어나는 환각에서 무한한 자유와 해방감 그리고 쾌감을 느끼는 것이 프로낭에서는 진정한 자신을 찾는 방법이라고 여겨졌다. 말하자면 케일이 건네 준 것은 민간에서는 합법적으로 판매되는 물건을 작은 캡슐에 나누어 담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환각 상태에서 무력감이나 공포감을 느끼거나 파괴적 행동들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군대 내에서의 사용은 금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자들은 돈을 위해 부대 내에 몰래 들여와 꽤 비싼 값에 병사들에게 판매하기도 했고 농도를 조절하거나 다른 약품을 첨가하는 등의 장난을 치기도 했다. 헬릭은 케일이 자신이 쓰려고 산 것을 준 것인지 아니면 그가 몰래 판매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의 의도를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장에 나와 있는 지구인에게 어쩌면 치명적일지도 모르는 약을 건네는 상대의 의도를 판단하는 것은 헬릭에게는 꽤 어렵고 난감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거나 하는 문제는 스스로의 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헬릭은 캡슐을 넣은 탄창 주머니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잤는지 태양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잠을 잤지만 전장의 피곤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너무 오래 지속된 긴장과 피곤은 이제 너무 익숙해져 그의 기분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헬릭은 Blink430을 들어 앞에 놓고 손잡이 밑에서 소제 킷(kit)을 꺼내 방아쇠와 장전 손잡이 쪽의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총구를 청소하려다 분해하는 게 귀찮아져 그만두고 소제 킷을 다시 손잡이 밑에 집어넣다가 PDA에서 녹색 불이 세 번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는 신호였다.

헬릭은 소제킷을 마저 집어넣은 뒤 라이플을 참호 벽에 기대 놓고 자신의 PDA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개별 임무 전달을 위한 브리핑 1-430-174”

‘1번 코드가 붙은 개별임무?’

메시지를 확인한 헬릭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프로낭의 외인부대에서는 숫자조합의 코드를 사용했는데 처음의 1은 부대장으로부터란 뜻이었고 가운데는 임무에 대한 열람코드 마지막 숫자는 임무참여자에 대한 코드였다.

PDA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원래는 검은색으로 도장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든 멀티 센서 기어를 이마에서 내려 눈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전투용 장갑에 있는 명령 전달 단자를 누르자 임무 내용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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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임무 1-430-174

정찰

해당 임무 수행예정자는 장비 및 임무 전달을 위해 메시지 수신 즉시 P-430(하이퍼링크)으로 연락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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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된 임무 내용을 확인한 헬릭은 멀티 센서 기어를 이마 위로 올리고 장갑의 단자를 껐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당황 했던 것일까? P-430으로 연락하라는 내용을 잊은 듯 잠시 앉아 있었다.

‘뭐지? 임무 전달과 장비를 위해 P-430으로 연락하라고?’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대부분의 정찰 임무라면 정찰 지역과 시간 전달로 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P-430이라는 처음 듣는 곳으로 연락하라는 메시지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었다. 거기다 참여 인원도 헬릭 혼자 뿐이었다.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정찰 임무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됐지만 그 외의 임무가 어떤 것일지는 짐작 할 수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그의 등 뒤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안을 껴안은 채 가만히 있을 수 만은 없었다. 헬릭은 기어를 다시 내리고 임무 전달 메시지를 다시 열람한 뒤 링크된 P-430으로 접속했다.

“헬릭 에스몬드 씨?”

접속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여자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네!”

“지금 즉시 A-103으로 오십시오. 거기서 장비 지급 및 임무를 부여 받고 작전지역으로 이동하게 될 겁니다.”

상대는 이렇게 말하고 바로 접속을 종료했고 헬릭도 더 기다리지 않고 상체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참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질척이는 진흙 바닥 위를 걷는 동안 그의 머리 위로 적 저격수의 탄이 몇 번인가 스쳐 지나갔다. 아마 저 앞 어딘가에서 진흙 속에 몸을 숨기고 참호를 지나는 머리를 노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탄도 역추적 장치의 대응 사격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헬릭은 아픈 허리를 더 숙이며 탄도 역추적 장치가 수리되기 전에 새로운 타깃이 참호 위로 머리를 내밀지 않기를 기도했다.


네비게이터에 A-103지역에 도착했다는 표시가 나올 즈음 헬릭은 어느 새 자신의 키보다 높아진 참호에서 기어 나왔다. 적과 대치한 채 머리 위로 총탄이 날아다니는 프론트 라인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프론트 라인이 죽음과 적막 그리고 긴장이 가득 찬 곳이라면 이곳은 소란과 활발함이 있었다. 전방의 전투원들이 잠에 찌든 채 축축한 참호 바닥에 엎드려 공격 신호를 기다리는 것에 비해 후방의 지휘관들은 이 지리한 전투를 휴가쯤으로 생각하는지 한 켠의 야전 캠프에 앉아 음악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거나 지휘봉을 손에 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손에 데이터 패널이나 전술 지도가 그려진 LCD필름 같은 것을 잔뜩 들고 뛰어다니는 부관들이나 붕대를 감고 재배치를 위해 움직이는 병사들 그리고 야전 병원 앞의 간이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모습들이 그러한 지휘관들의 평화로움과 비교되어 헬릭은 잠시 굳은 듯 멈추어 있었다. 지금껏 많은 전장에서 이런 부조리한 상황들을 겪었지만 이번엔 머릿속이 뜨겁고 흐릿지는게, 그런 상황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긴 불면 때문인지 아니면 프로낭의 환경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헬릭이 그렇게 멍하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저 쪽에서 프로낭 왕정군 정복을 입은 여자가 걸어왔다.

“헬릭 에스몬드 씨. 저쪽으로 가시죠.”

온 몸에 잔뜩 묻어 있던 진흙이 조금 말라 움직일 때마다 먼지를 떨어뜨리는 헬릭과 깔끔한 정복차림의 여자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은 천사와 같이 걷는 악마를 보는 것 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았다. 야전 병원 옆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던 여자는 그를 주둔지 밖에 주차되어 있는 전투 지원 차량 앞까지 안내 한 뒤 말했다.

“여기 타시면 안에서 장비를 지급할 겁니다. 그럼.”

부드럽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그 말을 마친 뒤 여자가 전투 지원 차량의 문을 열었다. 차 안은 전등이 설치되지 않은 컨테이너처럼 어두웠고 안쪽에 설치된 몇 개의 모니터만이 엷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차내 양 편으로 길게 설치된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헬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헬릭이 차에 오르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맞은 편 의자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고 그와 동시에 문이 닫혔다. 잠시 후 차가 출발하면서 작은 진동이 그의 몸을 흔들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맞은 편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명암이 두드러져 흡사 조각상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프로낭에 지구의 용병들이 대거 투입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이 남자는 용병 같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헬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자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네 실력이 좋다는 말을 들어서 선택된 거네.”

“무슨 임무입니까? 정찰 같은 단순한 임무는 아닌 것 같은데요.”

헬릭의 물음에 남자의 눈빛이 날카로워 지는 듯 보였다.

“음! 맞네. 자네의 임무는 무엇인가를 없애는 거네.”

없앤다? 헬릭은 맞은편의 남자가 죽인다 가 아닌 없앤다 란 말을 쓰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아 자신이 저격임무에 투입된 거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보타지(Sabotage) 입니까?”

“아니네! 그보다는 저격…….아니, 그래! 사냥에 가까울 걸세.”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차 안의 불을 켰다. 헬릭은 이제야 불빛에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었다. 50대 정도의 백인남자, 두툼한 양 볼에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게 하는 백발이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게다가 프로낭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옷 안쪽에 환경 적응용 슈트를 따로 착용하고 있었다. 헬릭은 그 모습을 보고 아까 용병은 아닌 것 같다는 짐작이 맞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헬릭이 남자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남자도 헬릭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 같더니 의자 아래 놓여있던 가방을 헬릭 쪽으로 슬쩍 밀었다.

“자네가 사용하는 무기가 요즘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구식 무기여서 거기에 적당한 탄을 새로 제작했네. 일반탄과 달라 탄도에도 변화가 있을 테니 자네 라이플과 멀티 센서에 새로 변수들을 입력해야 할 거야. 아! 그리고…….”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헬릭이 종이를 받아들자 남자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까지도 이진 데이터를 믿지 못하는 분들이 지구에는 계시거든. 그 종이에 자네 임무 지역과 목표에 대한 설명이 있을 거네. 읽어보고 자네에게 전달된 임무 메시지는 삭제하게.”

이 말을 듣고 나자 헬릭은 뭔가 대단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말 대로라면 이 남자는 지구에서 왔고 프로낭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는 용병을 불러 내 임무를 주는 것이 된다. 흔치 않은 일, 아니 여러모로 수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종이로 된 자료는 헬릭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헬릭은 천천히 종이로 시선을 가져갔다. 거기에는 임무지역과 지구시간으로 표시된 임무 예정 시간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줄엔 간략하게 한 줄로 Target = D 라고만 적혀 있었다.

“D? 이것뿐 입니까?”

마지막까지 읽은 헬릭이 이렇게 묻자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간략하지만 그게 다네. 뭐 자네가 전후 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도 없고 그 D라는 글자 한 글자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믿네. 그래서 자네를 선택한 거니까?”

“...... 곤란하게 만드시는군요. 그렇다면 왜 이 D를 제거하려고 지구에서 여기까지 오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음!”

헬릭의 물음에 남자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 졌다. 하지만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구의 높은 분들이 매우 위험하게 생각하는 존재라고만 알아두게, 사실 우주로 인간이 진출하면서 수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좀 특이한 경우거든. 과학적으로 증명을 한 경우니까.”

“과학적인 증명?”

헬릭은 남자가 과학적 증명이란 말을 끊어 읽는 것이 잠시 마음에 걸렸지만 그 보단 인간이 우주로 겪은 위험이란 말에 더욱 신경 쓰였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대체 어떤 임무인지 대충이라도 짐작할 수 없자 어두운 방 안에 떨어진 열쇠를 찾기 위해 바닥을 더듬거리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작전 시행 이후 회선은 모두 연결 종료됩니까?”

“아 그렇군. 채널을 하나 열어 놓을거네. 암호화는 되어 있지만 그래도 모르니까 코드네임을 쓰도록 하겠네. 나는 신부, 자네는 순교자, 타겟은 D 그리고 이 지휘차량은 성당으로 하지”

신부와 성당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 거기다 자신의 코드네임이 순교자라니, 마치 임무수행 중에 죽으라는 것 같아 거슬렸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 빠르게 움직이던 차가 정지하더니 캐터필러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로로 가는 것이 아닌가? 사방이 막혀 밖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헬릭이 GPS를 보려고 멀티 센서 기어를 내렸지만 센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 안에서는 작동하지 않을 걸세 신호 차단 장치가 되어 있거든”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일어서서 모니터 앞에 가 앉아 말했다.

“사실 자네를 이 임무에 투입하는 것을 결정하는데 조금 문제가 있었네. 자네에 대한 기록이 지구에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지. 프로낭 측 서류에는 지구 태생으로 되어 있었는데 말이지.”

“.......”

헬릭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남자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일만 제대로 끝내 준다면 큰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야. 나도 자네처럼 정체를 숨겨야 하니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르지.”

이상한 임무에 신경 쓰느라 남자의 이름이나 정체 따위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남자가 그 말을 한 순간 문득 남자의 정체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때론 아무런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는 것을 헬릭은 알고 있었다. 그 때 다시 차가 멈추더니 남자가 모니터 앞에서 일어나 문을 열면서 헬릭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야 할 걸세. 그럼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헬릭은 남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고는 자기 앞에 놓인 케이스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어느 새 해가 저물어 악마의 혓바닥처럼 붉은 노을이 헬릭을 맞이했고 길게 늘어진 헬릭의 그림자가 바람소리만 황량한 대지에 기괴한 일그러짐을 그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둠과 허리춤까지 자란 일년생 식물들을 은폐물 삼아 걸었지만 작전지역에 가까워지자 계속 그렇게 이동할 수는 없었다. GPS와 육안으로 확인한 작전지역은 엄폐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무 한그루 바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진흙으로 된 평원을 바라보던 헬릭은 총구를 마개로 막고는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곤 미끌미끌하고 끈적한 진흙을 온몸에 바른 채 적진이 시작되는 경계선을 넘어 작전 지역으로 향했다. 지구의 지렁이와 비슷한 환형동물이 진흙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가끔 느껴질 뿐 수상한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구름에 별 빛도 가리워져 사방이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라 코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자 GPS를 확인하는 빈도가 많아졌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까 GPS에 표시해 놓은 위치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헬릭은 포복으로 전진하던 것을 멈추고 자신의 라이플을 들어 망원 스코프로 주변을 살폈다.


‘이 즈음이면 뭔가 나타나야 하는데…….’


야간 모드의 스코프를 적외선램프를 끄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낮과 다름없이 움직임도 없고 구조물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헬릭은 천천히 라이플을 내려놓고 이마 위로 올려놓았던 멀티 센서 기어를 내렸다. 그리고 몇 개의 모드를 변환해 가며 전방을 확인해 보았지만 역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지정된 위치로 더 접근하려는 데 그의 등에 뭔가 작은 것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뒤 이어 머리와 다리로 뭔가가 떨어지자 헬릭이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펴서 앞에 내놓고 센서기어를 야간 모드로 바꾸었다. 아니나 다를까 빗방울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헬릭은 천천히 기어를 올리고 라이플의 총구를 막은 채 몸 안쪽으로 밀어 넣고는 통신채널을 열었다.

“순교자로부터 신부에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상 예측 대로다. 20분 내에 그칠 테니 사냥에 지장을 주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 D는 찾았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위치에서 대기하라.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곧 나타날 것이다.”


신부는 이렇게 말하고는 바로 채널을 닫았다. 임무 종료 예상시간을 1시간 정도 남겨 놓고 있었다. 헬릭은 라이플을 품에서 꺼내 천천히 바이포드(bipod)를 펴 진흙 속에 담그고 다시 스코프로 눈을 가져갔다.

'D……'

도대체 누구일까? 아니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지구에서 이 먼 프로낭까지 와서 그것울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신부의 정체와 D 그리고 이 이상한 임무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 때였다. 스코프의 렌즈를 바라보던 헬릭이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뭐지?”

무엇인가가 지면 가까이 진흙 속에 낮게 파묻힌 채 헬릭이 있는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헬릭은 새끼손가락을 까닥여서 음성채널이 아닌 문자채널을 열고 손가락으로 메시지를 써서 보냈다. 비도 오고 있었고 거리도 멀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수상한 물체 발견. 접근 중 T=D인지 확인 바람-

헬릭은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채 탄도 수정 장치를 켰다. 바람도 불지 않고 지급받은 탄 속성은 이미 입력해 놓은 상태였다. 스코프에 표시된 위치대로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성당으로부터의 연락이 늦고 있었다. 헬릭의 손가락이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다가오던 물체가 움직임을 멈춘 것은 헬릭이 다시 한 번 메시지를 보내려던 순간 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진흙 위로 두 개의 뾰족한 것이 튀어 오르는 것 같더니 비에 젖은 우산이 펴지듯 물방울을 사방에 튕기며 펴졌다.

그것은 날개였다. 흡사 박쥐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단 얇고 검은 날개 두 장이 펴진 것이었다. 그 거대하고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헬릭은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음성채널을 열었다.


“접근하던 물체가 날개를 폈다."

“D다! 제거하라.”

신부의 목소리도 헬릭의 목소리만큼 다급했다. 헬릭은 D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아쇠에 올라가 있는 손가락에 힘을 더했다. 전기 노리쇠가 탄두를 내보냈을 테지만 소리는 없다. 다만 어깨에 느껴지는 작은 반동으로 격발되었음을 느낄 뿐이다. 탄환은 정확이 조준하던 곳에 명중했다. 날개를 펼친 알 수 없는 물체의 본체에 정확이 맞아 지상 위로 올라오던 그 물체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명중했다.”

움직임이 멈추지 않았더라도 명중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곧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을 후회했다. 날개가, 그 검은 날개가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날개를 무겁게 하는 물기를 털어 내려는 듯 얇은 막을 떨며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본체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D가 완전히 몸을 일으킨 뒤 공격하겠다고 헬릭은 마음먹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몸을 일으킨 D의 모습이 헬릭의 스코프에 잡혔다. 머리 위로 솟아오른 두 개의 뿔, 말의 허벅지와 같이 발달한 근육의 다리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두 개의 팔,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자란 손톱. 인간과 비슷한 실루엣이지만 동화책에서나 보았을 법한 그 것이 거기에 서 있었다. 맹수의 눈처럼 빛나는 두 개의 눈이 기어를 벗은 헬릭의 눈에도 들어왔다. 낯설지만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헬릭의 머릿속에서는 악마라는 단어만이 떠올랐다. 그것은 틀림없는 악마의 형상이었다.

‘D! 이래서 D였군.’

보면 알아볼 것 이라는 신부의 말이 생각났다. 지구인이라면 쉽게 알아볼 것이 분명할 테니까. 하지만 어째서 저런 것이 이곳에 있는 것 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해답을 찾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프로낭의 진흙 구덩이에서 날개를 펴고 일어난 악마를 보고 DNA에 각인된 두려움에 질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헬릭의 총구로부터 D의 머리 쪽을 향해 세 발의 탄환이 다시 날아갔다. 이번에도 역시 맞은 게 분명하지만 그것은 일어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스코프에 예측된 탄착점은 확실히 그것에 겹쳐 있었다. 서서히 빗줄기가 가늘어질 때 까지도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거 했나?”

이어폰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발을 명중시켰는데 움직임이 없다.”

“......”

채널은 연결되어 있지만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는다. 그것은 10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헬릭도 세 발의 탄환을 쏜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렇게 머나먼 곳에서 찾아온 두 개의 생물이 진흙 속에서 죽은 듯 멈춰있는 동안 프로낭의 태양이 떠올라 그 붉은 혓바닥으로 악마인지 뭔지 알 수 없는 D의 등을 핥아대고 있었다.

“방금 생존 반응결과가 들어왔다. 표적 제거 확인 후 귀환하라.”

성당으로부터의 연락에 헬릭은 아무 말 없이 스코프를 주시하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지난 새벽 자신이 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몸을 숙인 채 걸어갔다. D라 불린 그것은 그대로 선 채 헬릭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악마의 모습을 한 그것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헬릭이 쏜 네 발의 탄환은 모두 맞았는지 머리에 세 개, 목 밑에 하나, 그렇게 네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피나 비슷한 액체 같은 것이 흘러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방금 확인했다. 표적은 제거 됐다.”

헬릭은 이렇게 말하고는 진흙이 말라붙은 손을 들어 그것의 거대한 손으로 가져갔다. 날개를 다 펴지 못하고 멈추어선 채 죽어버린 D는 헬릭이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마치 원래부터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그 거대한 것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자 헬릭은 꿈이라도 꾼 것처럼 몽롱한 기분에 빠졌다. 그리고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 얼른 몸을 숙이고는 바닥에 다시 엎드렸다. 너무 놀라 자신이 적진에 들어와 있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 몽롱한 기분에 엎드려 한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던 헬릭은 케일이 주었던 캡슐을 떠올렸다. 정리되지 않는 머리 때문인지 갑작스레 잠도 몰려왔기 때문했다. 탄창 주머니에서 캡슐을 꺼낸 헬릭은 각성효과가 있다는 그것을 입 안에 털어 넣으려다 멈추고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약에 의존하기도 싫었지만 자신이 겪은 이 기이한 일을 약에 취해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헬릭은 몸을 돌려 천천히 포복하려 안전지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되지만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그는 올 때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적진을 벗어나 구보로 이동한지 20분 정도 지났을 때 작전 지휘 차량이 나타났다. 헬릭이 가쁜 숨을 내쉬며 멈추어 선 채 지휘 차량의 문을 열자 동시에 남자가 차에서 내리며 헬릭에게 악수를 청했다.

“수고 했네.”

남자의 얼굴은 자신과 헬릭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내가 저격한 것의 정체가 대체 뭡니까?”

헬릭의 차가운 음성에 남자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자네는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

그의 목소리는 알고 있는 것은 왜 묻느냐는 듯 했다. 

“......”

헬릭은 악마냐고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혹 그것이 실제로 악마라면 자신의 쏜 총 따위에 그렇게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신의 존재를 믿나?”

남자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헬릭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없앤 건 우주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동물 중에 오늘 멸종을 맞은 종일 뿐이네. 그러지 말고 차에 타서 이야기 하지.”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차에 올라탔고 헬릭도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고 차량이 출발하자 남자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인간의 상상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네. 게다가 그런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사물에 대한 인식 역시 마찬가지고 말일세, 실제로 자네도 악마라는 것을 본적이 없으면서 그것을 보고 악마를 떠올리지 않았나?”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헬릭은 남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그 동물이 가진 불행이었네. 인간이 우주로 진출하면서 수많은 외계의 생물체들과 조우하게 되었고 그것 역시 그런 생물체 중의 하나일 뿐 이었지. 최초에 발견자가 알펜라스 라고 이름 붙인 초식동물로 소수 생물학자들만이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생물이네. 먹이를 찾아 우주를 떠돈다는 점이 다른 초식동물들과는 다르지만 말일세.”

“그럼 그게 악마도 아니고 단지 악마의 형상을 한 초식동물 이란 말입니까?”

“맞네.”

“그렇다면 어째서 그것을 없애려고 한 겁니까? 단순한 초식동물을……”

헬릭이 무엇을 물으려는지 안다는 듯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처음에 자네에게 신의 존재를 믿느냐고 물은 이유와 비슷하네. 인간은 생각보다 나약해서 저런 동물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악마의 존재를 믿어버리고 그것을 숭배하는 자들이 늘어날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저것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악마도 존재하니 반대로 신도 존재 할 것이라고 생각할 거란 말인가?”

헬릭의 말에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정말 그럴까? 자네라면 눈 앞에 보이는 것의 존재를 믿겠나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믿겠나? 아니 그보다 자네는 그것을 해치우면서 신을 떠올린 적이 있나?”

헬릭의 물음에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헬릭은 잠시 남자의 마지막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남자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이기적이군요.”

“맞네 이기적이지. 하지만 믿음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작은 위험도 남겨 놓을 수 없었네. 다행인지 이 일도 이제 마지막이군. 자네가 우리의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마지막 녀석을 해치웠으니까.”

남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기지로 돌아오는 동안 두 사람 간의 대화는 끊겼다. 어느새 기지에 도착해 문이 열리고 헬릭이 차에서 내리고 나자 남자는 처음 만났던 것처럼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말했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번 작전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주길 바라네, 내가 자네에게 했던 이야기들도...... 작전에 대한 성과급은 곧 지급 될 거고, 원한다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말하게”

남자의 말에 헬릭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지긋지긋한 진흙탕에서 빠져나갈 기회였지만 그 남자의 도움을 받기는 싫었다. 

“알겠네. 그럼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남자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헬릭은 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차를 뒤로한 채 참호로 뛰어내려 자신이 담당하던 지역으로 향했다. 그 사이 탄도 역추적 장치가 수리되었는지 이따금 발포 음이 들려오는 것만 다를 뿐 참호는 전과 다름 없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진흙 참호에 등을 기대고 잠을 청해 보려는 찰라, 언제 나타났는지 케일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디 갔다 온 거야? 그래 어제 준 건 잘 썼나?”

“아니. 쓸 일이 없었어”

헬릭이 이렇게 말하고 자신의 탄창 주머니에서 캡슐을 꺼내 케일에게 돌려주자 그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하긴 나도 자네가 그런 것을 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어제 자네가 사라지기 전에 어떤 남자가 자네에게 그것을 전해 주라고 하더라고. 돈은 나중에 자기가 줄 테니 자네에게는 비밀로 하고 말이야. 그래서 특별히 조제한 것으로 줬는데 안 썼다니 좀 아쉽군. 각성효과에 공포심도 사라지게 해서 인기 있는 건데 말이야”

“나한테 전해 주라고 했다고? 어떤 남자였지?”

헬릭의 물음에 케일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얼굴은 잘 생각 안 나고……. 나이가 좀 들어 보였는데. 아! 그래 안에 환경 적응 슈트를 입고 있었어.”

헬릭은 그게 누구인지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럼 쉬라고, 일단 자네에게 준 건 사실이니까 그 자에게 돈이나 받으러 가야겠네.”

케일이 이렇게 말하고 몸을 일으키자 헬릭이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왜?”

“돈 받으러 가면서 그 사람에게 한마디 전해줘”

“무슨 말?”

카일의 물음에 헬릭이 쓴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디선가 천사도 사냥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케일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헬릭의 얼굴을 쳐다보자 헬릭은 꼭 전해 달라고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허리의 통증은 여전했지만 왠지 이번에는 꽤 긴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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