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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같은 친구

달부장 2005. 8. 2.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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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같은 친구

새벽부터 세차게 창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드는 오후, 그 끈적끈적하고 눅눅한 오후에 찾아오는 손님은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더구나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하얀 얼굴을 내미는 원고지와 입력을 재촉하듯 반짝이는 워드프로세서의 프롬프트를 오가며 언제 감았는지 모를 기름기 가득한 머리를 긁어대던 남자에게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 부담스러운 방문이 어쩌면 그 때까지 그의 목을 조르던 빈 공간의 압박으로부터 숨통을 트여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주영은 부담스러움에 찡그렸던 얼굴을 애써 펴고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갔다. (그에게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감정을 환기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억지웃음을 짓는 버릇이 있었다.)
"누구세요?"
인터폰이 고장 난지 꽤 되었지만 주영은 고치지 않고 있었다. 그 덕분에 가라앉아 있던 주영의 목소리가 일부러 큰 소리를 내느라 갈라져 금방 알아듣기 힘든 우스운 소리가 되어 문 밖의 손님을 확인했다.
"나야! 정석이."
손님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주영이 문을 열자 밝은 회색의 양복을 입은 정석이 양쪽 어깨가 비에 젖은 채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문으로 들어섰다.
"오래간만이지?"
현관을 들어선 정석은 그의 직업 - 주영이 알고 있는 바로는 그는 어느 회사 영업부에 다니고 있었다. - 때문에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약간은 어색하지만 나름대로 호감을 주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5년만인가? 그나저나 연락도 없이 무슨 바람이 분거야? 아무튼 잘 왔네. 부인이랑은 모두 안녕하시지?"
"응."
정석이 어깨의 물기를 털어내고 소파에 앉자 주영은 부엌에 있는 커피메이커에서 커피를 한 잔 따라가지고 와서 정석의 앞에 내려놓았다.
"머그컵이라 좀 미안하지만 남자 혼자 살림이니 좀 이해해줘. 그래도 그 컵이 나한테는 꽤 소중한 물건이야! 어때 멋지지 않은가? 내가 처음으로 구운 거라네."
주영은 이렇게 말하고는 정석의 뒤 쪽 벽에 있는 사진을 가리켰다. 어느 산 속의 가마 앞에서 자신이 만든 컵을 들고 찍은 사진 밑에는 그의 다른 작품들로 생각되는 도기들이 놓여 있었다. 약간 투박한 모양의 접시에서부터 화병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었는데 그 중의 몇 개는 이상한 모양으로 휘어지거나 갈라져서 장식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단지 그렇게 망가진 모양의 것들은 색이 다른 도기들과는 조금 달랐다. 뭐랄까 다른 도기들의 색에 비해 깊이가 있다고 해야 할까? 약간의 붉은 기가 감도는 흰색이 마치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정석은 저 도기들의 색 때문에 저것들을 버리지 않고 놔두었구나, 짐작하고는 그 것들에 대해 묻지 않았다.
"가끔 취미삼아 하는데 재미있어. 아! 참, 자네는 설탕을 넣어서 마시지? 두 스푼이던가? 가져다 줄 테니 잠시만 기다리게"
"아냐! 그냥 블랙으로 마시지 뭐."
정석이 이렇게 말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부엌에서 설탕을 가져오려던 주영이 그만두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정말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응……. 그게."
정석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주영은 더욱 궁금해졌다. 정석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쾌활한 웃음을 지으며 '그냥 보고 싶어서 왔지' 라던가 '왜 찾아오면 안 되나?' 같은 대답을 했을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일은 잘돼?"
대답 대신 정석이 물었다.
"별로."
주영은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소설을 쓰겠다고 회사를 그만둔 지 - 물론 회사의 명퇴권고를 받은 게 먼저였지만 - 2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소설은 쓰지 못했고 그런 그를 참지 못하고 아내는 이혼을 요구해, 결국 그는 아이들의 양육권도 빼앗긴 채 이 작은 방에 유배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별로인 인생이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는 술이라도 마시면서 해야 하는데……."
"자네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군. 낮술까지 마시면서 해야 할 이야기가 뭔데 그래?"
주영은 정석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대개 서론은 생략하고 결론을 먼저 꺼내는 타입의 남자였다.
"자네가 말이지……. 그러니까 누군가를 죽이려 한다면 어떻게 하겠나?"
정석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온 순간 주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마주 앉은 친구의 얼굴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고민이 그의 이마에 주름을 만들어 놓고 있었고 그 눈빛에서 잠시지만 간절함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왜 그런 것을 물어보나?"
주영이 일부러 얼굴에 웃음을 띠며 이렇게 묻자 정석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허리 꺾인 꽁초 몇 개가 뒹굴고 있는 재떨이를 그의 앞으로 밀어주자 정석이 깊게 한 모금 빨더니 말했다.
"자네가 그런 쪽에 좀 전문적이랄까, 아니 뭔가 자네에겐 번뜩이는 게 있지 않은가.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를 굉장히 좋아하지 않던가? 게다가 지금 미스터리 소설 같은 것도 쓰고 있고 말이야."
"그렇지도 않은데……. 하지만 내 생각에는 자네는 벌써 실수를 저지르고 있네."
"응?"
정석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대꾸하자 주영이 말했다.
"자네의 살의를 누군가에게 보였다는 게 실수지. 벌써 나에게 들키지 않았는가. 자네가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된다면 아마 나는 중요 참고인 또는 증인으로 법정에 가게 될 걸세. 그리고 자네가 나를 찾아와서 이상한 걸 물었다고 진술하게 되겠지. 하하하."
주영은 일부러 큰소리를 내서 웃었지만 분위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고 정석의 얼굴에도 변화가 없었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럼 시나리오를 한 번 짜 주겠나?"
"시나리오라고?"
주영은 시나리오라는 말에 정말 웃을 뻔 했지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정석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대신 길게 한 숨을 내쉰 뒤에 소파에 등을 기대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잠시 뒤 일어서서 냉장고에서 얼음과 그가 가끔 마시는 위스키, 그리고 잔 두 개를 들고 와 정석에게 한잔을 따라주고는 말했다.
"확실히 술을 마시지 않고는 이야기 할 수 없겠군."

2.
두 잔 정도를 마시고 나서 주영은 살인이란 것이 얼마나 비도덕적, 비이성적 행동인지 설명하는 대신 완전범죄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설명해서 그의 살의를 누그러뜨리고 그에게 살인까지 생각하게 한 고민이 대체 어떤 것인지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고민을 먼저 듣고 그를 설득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그의 살의 혹은 분노가 살인으로 연결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순서가 적절할 것이라고 -특히 정석의 성격으로 판단했을 때- 주영은 생각했다.

"자네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 이유는 물론 완전범죄를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다면 뭐 물어보고 말고 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자네가 알고 있다시피 대부분의 추리소설의 결말은 범인이 잡힘으로서 끝나네. 그 이유가 작가가 그런 빈틈, 말하자면 완전범죄가 부서질 수 있는 열쇠 같은 것 말 일세. 그 빈틈을 넣어놓아서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반대로 완전범죄 아니 범죄란 것이 애초에 굉장한 빈틈을 가진 행동이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로 귀착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네."
"……."
"범죄란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지. 물론 해결되지 않는 범죄들도 있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천재지변에 가까운 것들이라고 할 수 있네. 범죄이긴 하지만 범죄의 성격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란 말이지. 예를 들어볼까? 이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두 명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만났네. 그런데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살해하고 암매장을 했을 경우.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게. 내가 생각하는 완전 범죄란 이런 것이네. 이건 범죄라기 보단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천재지변에 가깝지 않은가? 사체가 발견되지 않고 살인범이 자백하지 않는다면 이건 완전범죄가 될 거라고 생각하네. 시체가 발견돼서 살인자에 대한 증거가 나왔을 경우에도 범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닐 거고 말이야."
여기 까지 듣던 정석이 탁자에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시체가 발견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군."
"아니, 시체가 없으면 살인도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게 자네가 누군가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 대상과 자네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게 아닌가. 내가 예를 들었던 것은 두 사람이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네. 사체가 발견되기 전의 실종자와 살인자의 관계가 있다면 범죄가 발각될 확률은 비약적으로 커지는 거지. 그러니까 자네가 자네와 관련이 있는 누군가를 죽인다고 하는 것은 자네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시작하는 게임이라는 말일세. 처음부터 빈틈을 만든 범죄란 말이지. 그런데 내가 지금 까지 이야기 한 것은 단지 내가 생각하는 완전 범죄의 조건을 충족한 말 그대로의 시나리오기 때문에 피해자나 가해자의 관계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을 했지만 시나리오 반대로 일을 저지를 수도 있지. 가해자가 어느 정도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고 있다면 사고사나 과실치사로 위장할 수도 있고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정신이상에 의한 범죄 같은 걸로 이끌고 나갈 수 있겠지만. 사고사의 경우는 위장이라는 것이 밝혀질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정상인이 정신이상자로 위장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 그렇다면 과실치사의 경우가 가장 적절한 타협점일수 있는데 결국 형을 살고 나와서 사회생활을 하기 쉽지 않을 테지. 그렇게까지 해서 누군가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꼭 한 번 만나보고 싶군."
주영이 여기까지 이야기 하자 정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주영은 그가 조금은 포기 했을 생각을 하며 긴 이야기를 지껄이느라 텁텁해진 목을 술로 축이고는 지금쯤 정석의 고민에 대해 묻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가?"
주영의 물음에 정석은 왼쪽 턱을 살짝 긁더니 말했다.
"난 내가 누굴 죽일 거라고 한 적은 없는데. 단지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을 뿐이지."
"하. 시나리오를 짜보라고 하더니 이제는 발뺌하는 건가? 그래도 내 이야기를 잘 들었나 보군. 그러지 말고 말해보게."
주영이 다시 묻자 정석은 길게 한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네."
주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굳어져 갔다. 중년 남자의 외도. 흔한 일이라 자신의 친구에게 일어났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만 지금 그가 누굴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주영은 설마하며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난 사실 좋은 가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성실한 가장이었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성실한 가장이라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더군. 하나 뿐인 딸은 언제부터인가 나를 은행의 자동 인출기 정도로 생각하고 아내란 여자는 나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 물론 내가 일에 바빠서 그 동안 가정에 소홀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의 관계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력도 해봤네. 외식도 해보고 가족여행을 계획하기도 했지. 그런데 그런 나에게 돌아온 말이 뭔 줄 아나? 왜 그러느냐는 거야. 귀찮게 말이지. 그 무렵이었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전형적인 전개여서 삼류 잡지의 기사도 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주영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정석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주영은 버림받듯 쫓겨났고 여자가 있지도 않았다는 점뿐이랄까.
"여자에게서 그런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된 게 얼마만인지. 아니 생애 처음인 것 같았네. 중매로 만난 아내에게서 느낄 수 없는 감정들. 첫사랑의 풋풋함 같은 것이 아니라 잘 깎아 놓은 보석 같은 감정들. 서로를 이해하고 아끼는 따스함.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았지."
정석이 여기까지 이야기하고는 추억을 음미하듯 두 눈을 감았다.
"그것을 들키게 된 건가?"
주영은 그의 빈 잔에 얼음과 위스키를 따라주며 말했다.
"아니. 내가 아내에게 고백했네. 이혼하자고 하면 그녀도 반길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녀는 내가 이야기하기 전에 내게 여자가 생긴 것을 알고 있었네. 그리고 그 끔찍한 무표정의 얼굴로 이혼은 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 그 때 알았네. 그녀는 내 행복을 용납할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을 말이야."
"그래서 부인을......?"
"......."
주영의 물음에 정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혼 소송을 해보라는 말을 할까 했지만 그랬다간 이 친구는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말 것이 분명했다. 법정에서는 이혼의 책임을 정석에게 물을 것이고 거액의 위자료와 함께 어쩌면 양육권까지 빼앗기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살인이라니…….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고 정석 스스로 가까스로 찾은 그의 행복을 망가뜨리는 일이었다. 주영은 다른 해결책이 없을까 궁리했다.
'아니야. 그래도 이혼 소송이 모두를 위해 가장 나은 선택이지.'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주영이 이혼 소송을 해보라고 이야기를 하려는데 정석이 먼저 말했다.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자네가 말한 완전범죄에서 암매장을 하는 이유는 뭔가?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서는 시체처리로 토막을 내서 버리거나 불에 태우거나 하던데 말이야."
왜 였을까. 주영은 그 순간 정석의 물음에 이전의 이야기는 까맣게 잊고 마치 그의 신경이 반사작용을 일으킨 것처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토막 살인은 엽기적일 뿐 살인이라는 행동의 목적에는 어긋나지. 불에 태우는 것 역시 뼈가 남게 되고, 뭐 뼈를 수습해서 치운다면 상관없겠지만 어디 그럴 만한 곳이 있겠나? 암매장의 경우가 가장 무난하지. 하지만 그보다 사고사를 위장……. 이런 내가 엉뚱한 소리를 하는구먼. 이봐, 자네가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그냥 이혼 소송을 하게."
"역시 그렇겠지?"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일어섰고 주영도 따라 일어섰다.
"가려고?"
"음 그래야 할 것 같군. 자네랑 이야기를 했더니 좀 정리가 된 것 같네. 고마워."
"차 가지고 온 것 같던데. 대리운전 부를 거라면 여기서 기다리지 그러나."
"아니. 잠깐 혼자 있고 싶네. 고민 들어줘서 고마웠네. 언제 또 술 한 잔 하지."
정석이 이렇게 말하고 재킷 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를 꺼내 들고 현관으로 나갔고 주영도 문 앞에서 그를 마중했다. 짧은 인사가 끝나고 주영이 문을 닫으려는 순간 그는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문을 열어 정석의 모습을 확인했다. 정석이 자동차 열쇠를 꺼낸 주머니 입구로 수술용의 Latex장갑이 삐져나와 있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불길함에 정석의 뒤를 따라가 그의 승용차 앞에서 장갑을 확인한 순간, 주영을 발견한 정석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자네가 생각나더군.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일을 저질렀지만 자네가 말한 대로 난 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동안 증오와 살의로 눈이 흐려져 있었네. 감정의 틈으로 어둠이 새어 들어온 것처럼 말일세."
정석이 혼잣말 하듯 이야기를 하는 동안 주영은 정석의 차창너머로 잠을 자듯 옆으로 누워 있는 여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혹시나 그녀의 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서 숨을 쉬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상체의 작은 움직임을 찾으려고 시선을 고정했다.
" 그리고 막상 일을 저지르고 나서는 이전의 계획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혼란이 찾아오더군. 그런데 그 혼란함 속에서 왜 자네가 생각났던 것일까. 이혼한 자네 부인이 실종됐다는 말을 듣고 내가 뭔가 이상한 상상을 해서인 것 같아. 어쨌든 내가 조금 늦게 온 것 같군. 조금 일찍 왔다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말하고는 자동차 열쇠를 꽂으려는 정석을 주영은 비 때문에 내려온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고개를 갸웃하고 노려보았다.
“내 아내의 실종에 대한 이상한 상상이라······.”
주영은 차 트렁크에 오른손을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듯 소리 내 두드리더니 정석의 주머니 위로 아직도 입을 내밀고 있는 장갑을 깊이 찔러 넣어주면서 말했다.
"자네의 그 이상한 상상력이 부럽군. 난 늘 그게 좀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생각만큼 늦은 것 같지는 않아. 내 아내의 실종에 대한 자네의 이상한 상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군. 자네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처법도 생각해 보면서 말이지. 어떤가? 자네도 머그컵을 한 번 구워보지 않겠나? 차에 있는 부인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 말이야"
이렇게 말하는 주영의 얼굴로 예의 분위기를 환기시킬 때 그가 짓는 미소가 번져갔다. 하지만 그의 붉은 입술만은 제물을 앞에 둔 악마의 그것처럼 기괴한 모습으로 올라가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골목길에 어두운 욕망을 불러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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