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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눈으로 돌아오다.(Vampiric Touch) 본문
야수의 눈으로 돌아오다.(Vampiric Touch)
잠에서 깨긴 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그대로 눈을 감고 온 몸의 감각에 집중한다. 소음, 냄새, 온도 ……. 처리 되지 않은 정보들이 처리를 기다리듯 몰려든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어서는 그것들에 대한 올바른 인지(認知)가 불가능하다. (사실 올바른 인지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눈을 떠야지 하고 마음먹은 순간 오른쪽 갈비뼈 밑이 뻐근하게 저려온다. 과음한 다음날 느껴봤음직한 통증에 왼손을 오른쪽 갈비뼈 밑에 가져다 대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것은 마치 예열이 끝난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했다.
눈을 뜨고 처음엔 집인가? 하고 생각했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밝은 빛에 눈이 적응하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학생의 놀란 눈과 마주친 순간 덜컹하더니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제야 난 주위를 둘러보았고 지하철 안에 앉아 있다는 걸 깨닫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지금이 몇 시인지 그리고 어디 즈음 인지가 궁금해진다. 주변의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이렇게 당황스러워 하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을 테지만 주변의 어느 누구도 나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 전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맞은편의 여학생도 지금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검은색 쌕(Sack) 안에 손을 넣어 MP3 플레이어인지 핸드폰인지 모를 것을 꺼내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나도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9월 4일 오후 5시 43분.
9월 4일 이란 글자를 핸드폰의 LCD에서 확인한 순간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한 머리가 다시 어지러워진다. 내 기억 속의 나는 9월 2일 오후 5시에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 뒤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지만 9월 4일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약 48 시간이 사라진 것이다. 아니 시간이 사라졌다고 하기 보다는 눈을 감았다 뜬 사이 다른 차원으로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동안 내가 여기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난 오른쪽 갈비뼈에 손을 가져다 댄 채로 입구 쪽으로 걸어가 정차하기를 기다렸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이 흔들리지 않도록 왼손으로 끈을 잡고 사람들 틈에 끼어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는 오후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자취방까지 돌아오는 동안 가슴의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곳의 통증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어깨 뒤가 따가웠고 팔 다리의 근육들이 쑤셔왔다. 마음 같아서는 뜨거운 온돌방에 깔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푹 잤으면 싶었지만 자취방은 싸늘했다. 가방을 침대 옆에 내려놓고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낯익은 천장의 무늬가 나를 반긴다. 따끈한 온돌방만큼은 아니지만 가만히 누워 있으니 그래도 몸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틀간의 공백은 아직도 머리를 짓누른다. 술을 먹고 필름이 끊겨 버린 것도 아니고 지하철에 올라탄 이후 기억이 사라지다니……. 확실히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틀의 공백이 생겼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를 쥐어짜서 기억해 내는 일이 하기 싫었다.
“그래 잊어버린 걸로 그만두지 뭐!”
생각해 내려 하면 오히려 서리 낀 유리처럼 희미해지는 기억이 나를 포기하게 만들고 말았다. 사라진 이틀 동안이라는 시간의 가치가 나의 고민보다 무겁지 못했다. 보지 않을 TV를 버릇처럼 켜고 누워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취방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지수가 TV 앞을 가로 막은 채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선배 도대체 어디 있었어? 연락도 안 되고 거기다 스터디도 펑크 내고…….”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귀를 아프게 했다. 뭐라고 조잘대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을뿐더러 자신이 어째서 추궁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납득하기 힘들었다. 화를 내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시처럼 가슴을 훑어내고 고막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왜 내가 그녀에게 추궁 받아야 하는가? 이틀의 시간은 포기했지만 난 아직도 어떤 사건의 피해자였다. 게다가 그녀와 나와의 지금까지의 관계에서 내가 그녀에게 저런 힐책을 들을 정도의 빈틈을 보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녀의 힐책이 애정을 바탕에 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그런 이성적 판단을 가로막는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내 감정을 뒤흔들고 있었다.
“조용히 해!”
순간적으로 몸을 들어 그녀의 목을 쥘 듯 손을 뻗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내 행동에 그녀가 놀랐는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 보다 더 놀란 것은 나였다. 분명 내 목소리가 맞았지만 뭐랄까 어둡고 습한 그리고 상대를 집어 삼킬 듯 큰, 전에는 한 번도 내 본적 없는 그런 목소리였다. 야수가 내 품는 절규가 그런 소리였을까. 지수는 내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금세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발 좀 조용히 해!”
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하자 그제야 마음이 좀 진정됐는지 침대에 풀썩 주저앉아 말했다.
“방금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선배가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봤어요.”
그 녀의 목소리가 이렇게 기분 나쁜 것이었던가? 마치 한마디 한마디가 내 고막을 뚫고 들어와 내 뇌를 찔러 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숨을 깊게 들이 쉬고는 그녀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거나 내 방에서 나가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다르다. 뭔가 다르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녀의 목소리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나 스스로에게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나를 거울로 바라보는 것 같은 일이었다. 내가 아닌 나를 자신으로 확인하는 일, 표리(表裏)의 나를 등호로 연결 짓지 못하는 일.
“무슨 일 있어요?”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모르겠어. 아니 별로 알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
내 말에 그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내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더니 눈을 살짝 찡그리며 내 눈을 주시한 채 물었다.
“선배! 칼라렌즈 했어요?”
“뭐?”
그녀의 엉뚱한 질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안경도 쓰지 않는 내가 렌즈를……. 그런 일은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수는 여전히 내 눈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당신 같은 사람이 칼라렌즈 같은 것을 이라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선배 거울 좀 봐요. 눈동자 색이 뭐랄까? 밝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화장실 문 옆에 붙은 벽걸이 거울로 다가가서 내 눈동자를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내 그림자 때문에 눈동자의 색은 잘 보이지 않아 몸을 조금씩 틀어 겨우 확인해야 했다.
“정말이죠?”
내 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지수가 내 뒤에 대고 물었다. 하지만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내 눈동자를 건드렸다. 별다른 이물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젠장! 내 눈동자 색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평범한 검정에 가까운 고동색. 그래 분명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밝다. 짙은 노란색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눈동자 색 같은 것에 신경 써 본 일이 없어서 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긴 별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밝은 데서 보면 조금 무서울지도 모르겠는데요. 선배 안경도 안 쓰더니 눈이 갑자기 나빠진 거예요?”
“아니. 이거 렌즈 아니야.”
“그래요. 선배 눈동자 색이 원래 그랬어요?”
난 원래 이랬다고 말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라진 이틀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일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아니 그만두자. 애써 찾은 평정을 깨고 싶지 않아 난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지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침대에서 일어서서 말했다.
“선배 집에 있는 거 확인했으니까 갈게요. 피곤한 것 같으니까 얘기는 나중에 해요. 아! 그리고 내일 스터디 있는 날이니까 준비해오세요.”
지수가 이렇게 말하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나가는 문소리를 듣고 나는 일어나 앉았다. TV에서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식상한 포맷의 코너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책가방을 집어 들어 가방 안에 있는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들어 전원을 켜고 누웠다. 내 눈을 카메라로 찍어 확인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플래시를 끄고 실내촬영 모드로 설정한 뒤 내 얼굴을 몇 컷 찍고는 재생모드로 놓고는 사진들을 확인했다.
눈동자 색이 변한 것이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확실히 노랗고 어찌 보면 괴기스럽기도 하다. 적목 현상(플래시를 사용한 사진에서 눈이 붉은 빛을 띠는 현상)이 일어난 사진과는 또 다르다. 그런데 방금 찍었던 사진들을 확인하느라고 이동 버튼을 누르다 이상한, 그리고 언제 찍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사진을 발견했다. 지하철 안의 모습을 찍은 사진인데 우습게도 좌우의 남녀 사이의 텅 빈 좌석에 포커스를 맞춰 찍은 사진이었다. 난 카메라의 설정을 건드려 사진 정보가 나타나도록 바꾸었다. 9월 2일 5시 10분 그렇다면 내 기억에서 사라진 시간동안 찍은 사진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빈 좌석을 찍었을까? 양 쪽의 사람들을 찍으려다 잘못 찍은 것인가도 생각했지만 그것도 이상한 것이 마치 텅 빈 좌석을 찍으려 한 것처럼 가운데가 정확히 맞아 있었다. 난 다른 사진이 더 없나 확인했지만 9월 2일에 찍은 것은 그 사진뿐이었다. 사진 때문에 잊어버리자고 했던 것을 잊고 기억해 내려고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역시 부질없는 짓이었다. 난 그 이상한 사진을 한참 더 쳐다보다 전원을 끄고 가방에 집어넣은 뒤 형광등을 껐다.
오른쪽 갈비뼈 밑의 뻐근함이 좀 가라앉는가 싶더니 이제는 명치와 등 뒤가 아파온다. 통증이 몸속을 돌아다니며 나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연예인의 웃음소리가 의식에서 조금씩 멀어지더니 의식이 잠시 멈춘다.
통증 때문인지 두 번인가 잠에서 깨어 뒤척였고 세 번째 잠에서 깼을 때는 방송시간이 끝난 TV에서 시끄러운 잡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TV를 끄기 위해 리모컨을 찾으려고 침대 위를 손을 더듬거리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잡음에 섞여 무언가의 움직임이 어스름한 TV 뒤편에서 느껴졌다. 몸을 돌려 뭔가 있나 살펴보려는데 뭔가 체온이 있는 것이 나를 덮친다. 팔꿈치 같은 것이 갈비뼈를 세게 누르는가 싶더니 뭔가 번쩍이고 날카로운 것이 목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피할 겨를도 없이 오른손으로 그것을 낚아챘다. 화끈한 느낌이 오른손을 타고 어깨를 지났고 뒤이어 진득한 액체가 손에서 느껴진다. 쓰라림과 얼얼함이 머릿속에서 점멸했다. 그 바람에 난 정신을 차렸고 힘을 다해 나를 덮친 자의 턱을 올려쳤다. 둔탁한 소리,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을 꼭 쥐고는 침대에서 뛰쳐나와 불을 켰다. 그리고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가득한 피나 내 오른손의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내게 달려들었던 상대가 상상 밖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수야!”
내가 겨우 입을 열어 아직도 칼을 손에 쥔 채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는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죽여야 할 것 같았어! 본 뒤로 너무 무서워서……. 머릿속이 이상한 생각들로 가득차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녀는 횡설수설 하더니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발견하고는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섰다.
“날 쳐다보지 말아줘. 아니! 날 해치지 않을 거지.”
그 녀가 두 손을 벌리고 내게 다가오는 바람에 난 뒤로 물러서다 벽에 막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말았다. 그녀의 모습은 괴기 영화에서나 본 섬뜩한 모습이었다. 공포와 체념이 섞인 인간의 표정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 그전에는 알지 못했다.
“지수야 정신 차려!”
겨우 용기를 내 그녀에게 다가가 뺨을 가볍게 때리자 그녀가 다시 주저앉았다. 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전화기를 들었지만 어디에 전화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
긴장이 풀린 건지 손바닥의 통증이 강하게 느껴진다. 출혈량도 많아서 내가 서 있던 바닥은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손의 상처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난 얼른 수건을 손에 감고는 지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정신 좀 차리고 선배 좀 봐!”
하지만 그녀는 내 눈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겁에 질려 떠는 그녀의 모습은 방금 전 칼을 들고 달려들던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경찰에 알려야 하나? 혹 그녀에게 정신 병력이 있었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간다.
‘일단 그녀를 집에 보내고 난 병원에 가자!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해서는 날이 밝은 뒤에 들어보고.’
복잡하게 꼬일지 몰라 나는 경찰에 연락하는 대신 그녀를 집에 데려갈 사람을 부르기로 했다. 내가 물러서 일까? 나에게 그녀는 나를 죽이려 했던 살인미수범이 아니라 후배였다. 내 손의 상처보다 그녀가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이 내게는 더 큰 고통이 될 것 같았다. 핸드폰을 꺼내 연락할 만한 사람의 번호를 찾는데 지수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선배 내가 왜 여기 와 있어요?”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난 하마터면 웃어버릴 뻔 했다.
“뭐? 정신이 들었냐?”
내 가 겨우 이렇게 묻자 그녀는 대답 대신 방 안의 혈흔들을 보고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나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행동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신이 나를 칼로 찌르려 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녀가 연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언뜻 스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녀가 나를 죽이려는 확실한 의도가 있었을 때에야 일어날 일이었다. 그러나 정신병이나 내 얄팍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심령현상 같은 게 아니라면 그녀가 나를 죽일 만한 이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손을 좀 베어서 바닥이 엉망이야.”
거짓말을 하고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내 말에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그녀 옆으로 다가가 그녀가 모르게 바닥에 떨어진 칼을 살짝 발끝으로 차 침대 밑으로 밀어 넣고는 말했다.
“꿈 꾼 것 아냐. 너 피곤하다면서 여기서 잤잖아.”
어 디서 이런 거짓말이 생각난 걸까. 사실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난 거짓말에 능한 편이었다. 표현하기는 애매하지만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말해서 30%정도의 사람을 속여 넘길 수 있는 정도랄까. (물론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말에 실제로 속아 넘어갈 사람은 없겠지만)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해답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경우라면 설명 가능한 답을 던져주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여기서 잤어요? 요즘 정신이 없나 봐요. 그런데 선배 많이 베었나 봐요. 얼른 병원에 가봐야겠어요.”
그녀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내 손을 바라보며 말한다.
“괜찮아 살짝 베인 건데 피가 좀 많이 나네. 넌 얼른 집에 들어가 늦었어.”
“네……”
그녀를 집에 돌려보내려고 난 서둘렀다. 피 묻은 시트를 걷어내고 바닥의 피를 대충 닦아내자 지수가 말했다.
“병원에 같이 가 줄까요?”
“아니 혼자 가도 돼! 괜찮아 . 얼른 집에 가봐!”
“네.”
그 녀가 내 손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방을 나가자 나는 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귀신에 홀린 것 같다는 것이 이런 것 일까? 잠깐 만이라도 그대로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서 빨리 병원에 가야할 것 같았다.
가방과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와서는 가까운 병원이 어딘지 한 참을 생각해야 했다.
‘택시 타고 기사에게 물어보는 편이 빠르겠군.’
결국 나는 손에 검붉은 피가 묻은 노란색 수건을 감은 채 길 한 쪽에 서서 택시를 잡아야 했다. 몇 대의 택시가 조롱하듯 나를 지나치고 나서야 겨우 택시 한 대를 잡아 올라타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기사에게 물었다.
“가장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가주세요.”
다급한 내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기사는 미터기의 버튼을 누르고는 아무 대답 없이 어디론가 출발했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나 아직 꺼지지 않은 신호등의 정지 신호 앞에 차를 세우고 나서야 룸미러로 내 쪽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요?”
건조한 그의 목소리는 전혀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아서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살짝 베였는데 피가 좀 많이 나서요.”
“젊은 양반이 조심하시지! 뭘 하다 이 밤중에 손을 베었소?”
난 그의 두 번째 물음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버렸다. 나름대로는 별로 대답할게 없다는 표현이었는데 그 정도로는 상대의 궁금증을 잠재울 수 없었던 모양인지 신호가 바뀌고 차를 움직이고 나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 많이 아프면 내가 진통제라도 하나 드릴까?”
“아닙니다.”
내 대답이 그의 말을 끊을 듯 튀어 나오자 기사도 그제야 포기했는지 아무 말 없이 운전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익숙한 침묵이 지나고 차가 부드러운 정지 모션과 함께 불 켜진 병원 응급실 앞에 서자 나는 도망치듯 퍼런 지폐를 내밀고는 차에서 내렸다. 병원에 들어서자 내 손에 감긴 노란 수건의 피를 발견한 간호사 하나가 말할 새도 주지 않고 팔을 끌고 한쪽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손에 감긴 수건을 벗기면서 말했다.
“접수는 조금 있다 하시구요. 아! 잠깐만요. 김 선생님!”
그녀의 빠른 움직임이 왠지 나를 진정시켰다. 됐다. 뭐 골치 아픈 밤이긴 했지만 ……. 그래 알아서 해주겠지. 잠시 후 여의사 하나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아까 간호사가 벗기다만 수건을 마저 벗기고는 내 손바닥을 살펴보다 말했다.
“다치신 분이 이 분 맞아요?”
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다시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아한 얼굴과 그녀 가슴에 적힌 이름표 – 김준희였던가? – 그리고 내 손이 마치 술에 취했을 때처럼 오버랩 된다.
“다치신 곳이 어디에요?”
그 녀의 목소리가 이젠 머릿속을 울린다. 그리고 내 눈은 분명 피를 흘리고 있어야 할 내 손바닥에 못 박혀 있었다. 여기 저기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있지만 상처가 보이질 않는다. 그러고 보니 통증도 없다. 의사는 나보다 더 당황한 듯 내 몸을 살피더니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내 눈에 의료용 손전등을 비추더니 말했다.
“술 드셨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칼에 손이 ……. 베어서 …….”
“흠”
그녀의 표정이 알 수 없다는 듯 변하다가 수건에 묻은 피를 지나 칠 수 없었던 건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방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잠시 기다려주실래요.”
뭘 어쩌려는 걸까. 아! 그보다 내 손은 어떻게 된 일인가. 내 방안에 떨어졌던 피며 그 통증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분명 지금도 벌어진 살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통증이 내 신경을 괴롭히고 있어야 했다. 또 의사는 지혈을 하고 벌어진 상처를 꿰매고 붕대를 감고 있어야 한다. 간호사가 나를 끌고 왔을 때의 편안함은 상처가 사라진 내 손을 바라보는 순간 복잡한 모양으로 변질되었다. 난 아직도 손에 상처가 있는 것처럼 손을 꼭 쥔 채 고개를 내밀어 나를 진찰하던 의사의 모습을 찾았다. 그녀는 저쪽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어쩐지 마지막에 나를 바라보던 눈이 범죄자라도 보는 듯 떨리더니 아마 경찰서에라도 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수상한 것인가? 물론 내 손에 사라진 상처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일이긴 하지만 단지 손에 피 묻은 수건을 감고 들어와 멀쩡히 진찰을 받는 사람이 수상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단지 이상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이상한 사람을 대하는 그녀의 행동은 수상했다. 어쩌면 응급실에서 끔찍한 사건들을 많이 접해서 그녀에게는 나의 이상한 행동들이 상대적으로 위험해 보였는지 모르겠다. 난 그녀의 모습을 살피면서 천천히 밖으로 움직였다. 아직 접수도 하지 않았고 이대로 들어왔던 문으로 되돌아 나가면 끝……. 그 뿐 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저기요.”
그 의사의 목소리다. 나는 못 들은 척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에 섞여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잠시만!”
그 목소리를 신호로 해서 나는 입구로 뛰었다. 그리고는 어둠속으로, 나를 집어삼켜줄 어둠속으로 달려갔다.
얼 마나 달렸을까. 어느 낯선 골목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펴보면서 정말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피만 묻어 있을 뿐 멀쩡한 내 손을 확인한 순간 나는 문득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라진 기억,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지수,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손바닥. 인과도 불문명하고 엉뚱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꿈이라고 하면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된다. 난 여기 까지 생각하다가 참지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멍청한 자식! 꿈일 리가 없잖아. 차라리 네가 미쳤다거나 마약 같은걸 해서 환각을 보고 있다는 편이 좀 더 설득력 있을 거야.”
그 렇게 자신을 힐책하고 난 뒤 천천히 일어서서 간판 불빛과 가로등 빛으로 환한 거리로 걸어 나왔다. 피가 말라 붙어 흉해 보이는 오른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니 누구도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알아채거나 섣부른 짐작을 하지 못하도록 태연한 모양으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늦었지만 거리는 밝고 사람들의 움직임은 조금 느슨해 졌을 뿐 다름없다. 그 사이에 끼어들어야 하는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겨우 그들을 흉내 내며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걷다 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들었는데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잡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누구인가 확인했는데 하얀 가운을 입은 채로 아까의 그 여의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만……”
그 녀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아래쪽에서 뭔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더니 배가 따뜻해진다. 그리고는 이내 뜨거워지더니 통증으로 바뀐다. 하지만 손을 베었던 느낌과는 또 다른 통증이 척추를 탄다. 그녀를 길 쪽으로 밀쳐내고 난 배를 움켜쥐었다. 메스 손잡이가 내 배에서 반짝거리며 실실 웃고 있었다. 길에 넘어진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 다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메스를 뽑아낼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이를 악문 채 그것을 뽑아 바닥에 팽개치고는 내게 다가오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
이 를 악물고 한 말이라고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목을 그녀의 작고 차가운 손으로 움켜쥐었다. 길 한 복판에서 나를 죽이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몇 몇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그들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여자의 손을 떨쳐내야 했지만 몸에 힘이 빠진다. 아까 여자를 밀쳐냈을 때 남아있던 힘을 다 써 버린 것 같았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차가운 그녀의 손이 내 체온을 받아들인 듯 온기를 찾아가는 것 같더니 여자의 손이 내 목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소리치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왜 그러세요. 정신 차려요.”
하 지만 멈출 수 없는 기계에 시동을 건 것처럼 깊고 어두운 바다로 빠져들어 가는 나를 끌어 올릴 수는 없었다. 땅으로 스며드는 물처럼 나는 지하로 내 의식의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갔다. 기억나지 않는 유영(遊泳)이 끝나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옆에 그 여자가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차리셨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의 모습이 암사자의 앞발에 짓눌린 얼룩말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큰 눈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런 느낌은 그녀가 입을 열면서 금방 사라져버렸다.
“제가 당신을 발견했을 때는 복부에 자상이 있었어요. 출혈도 있었고, 물론 옆에서 메스도 발견했고요. 그런데 지금 보니 상처가 없어요. 불과 1시간 전의 일인데 말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복잡했다. 여러 가지 불안이 뒤섞여 있어서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표정에 난 어째서인지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다행이지 않아요? 내 배에 아직도 그 상처가 남아있었다면 난 당연히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테니까.”
비웃음과 함께 던진 내 말에 그녀도 짐작은 하고 있었는지 달리 부정하진 않았지만 놀란 기색마저 감출 수는 없었는지 눈을 한 번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나가고 난 뒤에 굉장히 무서워하면서 정신없이 뒤쫓아 간 것 밖에는 기억이 안나요.”
“괜찮아요. 나를 죽이려고 한 게 당신 하나만은 아니니까.'
자 포자기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를 추궁한다고 해서 내게 일어난 일들의 해답이 튀어나올 것 같진 않았고 그녀의 겁에 질린 얼굴이 문득 생각나 애써 태연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옆에 놓인 가방과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좀 더 진찰을 받아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못 들은 척 사라지려고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교대 시간이니까 같이 나가요. 제가 집에 바래다 드릴게요.”
“그건 죄책감 때문 인가요? 아니면 의사로써 놓칠 수 없는 기이한 생체현상에 대한 궁금증 때문인가요?”
같이 나가자는 말에 나는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녀 역시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다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쳐다보는 것 같더니 말했다.
“죄책감 30%, 궁금증 30% 그리고 기타 이유가 40% 에요. 먼저 나가 계세요. 이야기 하고 곧 뒤따라 나갈 테니까.”
그 녀가 사라지고 난 뒤 나는 천천히 응급실을 나와 문 앞에서 주머니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혼돈 속에 홀로 떨어진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같이 나자가는 그녀의 제의를 뿌리칠 수 없어 나는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곤 다시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찾는데 라이터가 나오질 않았다. 옷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두 뒤지다 결국 가방에 있나 싶어 가방을 열어 뒤지는데 라이터 대신 처음 보는 종이성냥이 가방 앞주머니에서 나왔다. 나는 무슨 물건인지 생각도 하기 전에 얼른 성냥 한 개비를 찢어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야 종이 성냥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Bar Heaven'
검은색 바탕에 은색 고딕체로 적혀있는 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뒷면엔 역시 은색으로 전화번호와 약도가 조그맣게 그려져 있었다.
‘여기 가본일이 있었나?’
확 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확실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기억을 잃은 동안 갔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성냥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어 가는데 문을 열고 그녀가 나왔다. 가운 대신 재킷차림에 안경을 쓴 모습이 응급실 안에서 본 모습과는 딴 판이어서 내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자 그녀가 그걸 눈치 챘는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렌즈를 오래 끼고 있었더니 눈이 피곤해서요. 집이 어디시죠 제 차로 바래다 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난 손에 쥐고 있던 종이성냥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술 좋아해요?”
내 말에 그녀가 무슨 말이냐는 듯 네 하고 반사적으로 답했다가 이내 알아차리고서는 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녀에게 종이성냥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로 가요.”
그 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흰색 승용차에 올라탔고 나도 그녀를 따라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차 안은 마치 외부와는 단절된 다른 세상 같아서 나는 다시 내게 일어난 사건 속으로 빠져 들고 말았다. 푹신한 자동차 시트에 앉아 시선은 창 밖에 고정한 채 성격 테스트용 슬라이드를 넘기듯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려고 내가 노력하는 동안 그녀가 어색한 차 안의 침묵을 없애고 싶었는지 카스테레오에 CD를 집어넣었다.
‘드리트리 쇼스타코비치던가?’
귀에 익은 재즈풍 왈츠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생각에 빠져들지 못하고 눈길을 운전하고 있는 의사에게 옮겼다. 그녀의 목과 거기서 이어지는 턱 선이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입고 있는 검은색 재킷 덕분에 그녀의 피부색이 더 하얗게 보였는지도 모르지만 어두운 차 안에서도 그녀의 흰 피부는 깎아놓은 배처럼 반짝였다.
“내 이름 알아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그녀가 도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난 얼른 시선을 앞으로 옮기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이름표대로라면 김준희 씨가 맞겠죠?”
“그럼 불공평한데요. 난 아직 그 쪽 이름을 모르는데.”
“이정현 이에요.”
“아! 이정현 ……. 이정현 씨는 뭐하는 분이세요?”
그녀는 내 이름을 기억하려는 듯 작게 한번 되뇐 뒤에 이렇게 물었다.
“아직 학생이죠. 전공은 정보처리고 박사과정 중이에요.”
“아……. 예비 공학박사님이시군요.”
자기 차 안에 올라탄 것이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어서였을까? 그녀의 목소리는 전보다 많이 가벼워져 있었다. 어쩌면 일부러 그녀가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아직 20대?”
“만으로 따지면 그렇죠. 그런데 제가 김준희 씨보다 2살 정도는 많을 것 같은데요?”
“저 보이는 것 보다 나이 많아요.”
그 녀가 젊다는 말이 기분 좋았는지 웃는 얼굴로 대답하고는 둘 사이의 대화가 끊겼다. 나도 내 나이를 밝히지 않았고 그녀에게 나이를 묻는 것도 실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왈츠 리듬만 차 안에 울려 퍼지고 있는데 그녀가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우며 말했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 하죠?”
“잠깐만요.”
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Bar Heaven' 이란 간판을 찾다가 저 멀리 건물에서 간판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신호가 바뀌고 건물 뒤 쪽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 그녀가 물었다.
“여기 처음 와보시는 거예요?”
“네.”
나는 짧게 대답하고는 차에서 내려 간판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생각날 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역시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난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Bar Heaven의 문을 열었다.
문 에 달아놓은 작은 종이 울리며 우리 두 사람이 안에 들어섰을 때, 나는 마치 우리가 물위에 떨어뜨린 기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일순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몰렸기 때문일까? 왜인지 딱 꼬집어 이야기 할 수 없는, 하지만 피부로는 느껴지는 느낌에 나는 잠시 안으로 들어서던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왜 안 들어가세요?”
내가 문 앞에 멈추어 서자 그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너무 예민해서 일까? 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 바에 앉았을 때 바텐더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셨네요. 사장님께서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시는데…….”
난 그 말에 놀란 얼굴로 바텐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2O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바텐더는 내 의아해 하는 눈빛을 미소로 받으며 말했다.
“조금 기다리세요. 지금 손님을 만나고 계시거든요. 기다리시는 동안 어떤 걸 드시겠어요?”
“아 전 맥주 그리고 ……”
내가 준희 쪽을 바라보자 그녀가 처음에는 주스를 시켰다가 이내 맥주로 바꾸었다.
“운전해야 하지 않아요?”
“그런데 술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오늘 같은 날엔.”
난 그녀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분명 그 녀에게도 어려운 하루였을 터였다. 바텐더가 마른안주를 내놓고 술을 가지러 가는지 잠시 우리 앞에서 자리를 비우자 준희가 말했다.
“처음 오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에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바텐더가 맥주를 가져오는 것을 기다려 잔에 맥주한 잔을 가득 부어 마신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여기 처음 와본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두 번째 왔을 수도 있어요.”
내 말에 그녀가 한숨을 내쉬더니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말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내가 풀지 못할 수수께끼 책 앞에 앉아 정답이 적힌 종이를 기다리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어요.”
“쉽 게 납득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난 사실 2일 오후 다섯 시에 지하철에 올라탔다가 5일 날 다섯 시에 지하철에서 깨어났어요. 물론 그 48시간 동안 내가 잠을 자거나 하진 않았겠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기간 동안의 기억이 나질 않아요. 게다가 겨우 집에 돌아왔더니 후배는 내 눈동자 색이 변했다고 하더니 내가 잠자고 있는 사이에 들어와 나를 죽이려고 하고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이번에는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하더군요. 어때요! 뭔가 굉장한 수수께끼나 스릴러 영화 같지 않아요?”
내가 남의 이야기하듯 이렇게 늘어놓고는 웃으며 맥주를 들이키자 그녀가 약간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기억 상실 같은 걸까요? 그런데 그 후배와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이해가 되지 않죠? 그래서 나도 포기해 버렸는데 당신을 기다리던 도중에 발견한 거예요. 그 종이성냥을요. 어쩌면 여기서 내 기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죠.”
내 말을 듣고 있던 준희는 내가 포기했다는 말을 할 때는 잠깐 눈을 찌푸렸다가 기억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에야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기억을 찾는다고 해도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어요. 변했다는 당신 눈동자 색이라던 지, 내가 저지른 일 같은 거 말이에요.”
“흠.”
난 순간 그녀에게 당신이 저질렀던 행동에 대해 가장 묻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일 거라고 이야기 하려다 그만 둬 버렸다. 어린아이의 장난기 섞인 잔인한 질문이 내 목 바로 밑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나는 애써 짓눌렀다. 그 때 옆에 있던 바텐더가 우리 두 사람이 앉아있던 뒤 쪽의 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 사장님 나오시네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뒤 쪽을 바라보았다. 무광의 검은색으로 도색된 두꺼운 철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긴 은빛 생머리를 한 젊은 여자가 검은색 실크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걸어 나왔다. 백지처럼 하얀 그녀의 피부와 그녀가 입고 있는 검은색 드레스는 이상하게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소에 어울려서 나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보기에도 반할 것 같은데요.”
옆에서 같이 그녀를 바라보던 준희가 내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 말대로 젊은 여사장은 미인이었다. 갸름한 얼굴과 큰 눈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문을 열고 나온 여 사장은 나를 바라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어깨에 자연스럽게 그 하얗고 긴 손가락을 얹으며 말했다.
“왔니? 좀 더 일찍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늦었네. 게다가 손님까지 모시고 오고 말이야?”
그녀는 마치 나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친근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옆에 앉아 있던 준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자친구?”
“아니에요. 음……. 그냥 친구에요.”
여 사장의 물음에 준희가 당황했는지 머뭇거리다 이렇게 대답했다. 여사장의 그런 친근한 행동에 나는 잠시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대로 이야기 하고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물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있어야 할지 결정해야만 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전혀 기억 할 수가 없어요.”
그녀의 차가운 느낌 때문이었는지 나는 돌려 이야기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날 대하는 그녀의 친근함에서 거부감을 느껴선 지도 몰랐다. 내 말에 날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순간 장난기 섞인 미소가 스쳤다.
“어머. 그럼 어쩐다지.”
여사장은 이렇게 이야기 하더니 이번에는 준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정현이를 좀 데려가도 되겠어요. 이런 건 조용히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요.”
“네……”
여 사장의 말에 준희는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여사장은 나를 데리고 그녀가 방금 전에 나왔던 검은색 문으로 걸어갔다. 내가 문 안으로 들어서자 내 뒤에 서있던 여사장이 검은 문을 잠그는지 찰칵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네게 과한 충격이었나 보구나?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보니 말이야. 물론 농담이 아니라면 말이지.”
“…….”
“음 그렇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나?”
여 사장은 이렇게 말하고서는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고 나도 그녀를 따라 앉았다.
“그럼 지하철에서 나를 만난 것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네?”
“지하철에서 처음 만났나요?”
여사장의 물음에 내가 이렇게 되묻자 그녀가 내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지금도 그 가방 안에 있을 거야. 네가 나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는 바람에 내가 너를 알아보게 됐지.”
“네?”
그녀의 말대로라면 디지털 카메라에 그녀의 사진이 남아 있어야 했지만 그녀의 사진은 없었다. 사라진 시간 동안 내가 지웠던 것일까? 내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그녀가 말했다.
“지금 다시 한 번 찍어봐. 그게 내가 설명하기 쉬울 것 같으니까”
그 녀의 말에 약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난 순순히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그녀의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터지고 찍은 사진을 확인하려고 디지털 카메라의 LCD를 확인하는 순간 난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분명 뷰파인더로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는데 LCD에는 그녀의 모습이 들어있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하철에서 몰래 다른 사람 사진을 찍는 건 나쁜 일이야. 덕분에 내가 너를 찾게 됐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이 렇게 묻고 나서 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하철의 텅 빈 좌석에 포커스를 맞춰 찍었던 사진! 그 때에도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도 그 사진이 그녀를 찍은 사진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몰래 사진을 찍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녀의 아름다움에 홀렸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무료한 지하철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지작거리던 카메라를 잘못 조작해 그녀가 찍히게 된 것일까? 어쨌든 그 일이 내가 겪고 있는 이 사건들의 열쇠가 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난 오후의 지하철을 좋아해.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공간은 황홀한 느낌이 들거든. 뭐 싫어하는 자들도 있지만……. 여자들의 향수 냄새, 남자들의 땀 냄새 그리고 젊은 처녀들의 피 냄새가 섞이면 식욕이 돌거든. 뭐 멘스중인 여자가 들어와 있다면 조금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말이야.”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리고 대체 당신은 누구에요?”
“나! 어떻게 이야기해야 좋을까? 그래 네 할머니라고 하는 게 좋겠구나.”
“뭐라고요?”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내 할머니라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태연한 표정으로 내뱉는 그녀의 얼굴을 나는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 네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없니? 그 덕분에 내가 네 얼굴을 알아봤단다.”
“그런 황당한 이야기 집어 치워요.”
“그게 언제더라 . 음 그래 1950년 이었던가. 네 아버지가 두 살 때 이었으니까 맞을 거야. 그런 혼란을 타고 한 명이 이곳에 왔지. 그리고 그가 죽어가던 나를 살렸단다.”
“우리 할머니는 돌아가셨어요. 그러니 그 지겨운 농담은 집어치워요.”
내가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소리치자 그녀가 말했다.
“그래 인간으로서는 죽었지. 하지만 흡혈귀로 다시 태어난 거야. 너도 방금 전에 확인했잖아. 카메라에 내 모습이 찍히지 않는 것 말이야.”
“장난 그만 둬요!”
난 참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어느 틈에 그녀가 움직였는지 어느새 내 뒤로 와 내 목에 그녀의 입술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넌 믿어야 돼. 아니 믿는 게 좋을 거야.”
그녀의 차가운 숨결이 내 목에 닿는 순간 등골이 찌릿하고 울렸다. 난 그녀에게 떨어져 나오며 소리쳤다.
“당신 미쳤군.”
내가 이렇게 소리치자 그녀는 내가 재밌는 농담이라도 한 듯 큰소리로 깔깔거리며 웃더니 말했다.
“네 아버지 이름은 이진호, 네 할아버지 이름은 이경석 네 할아버지는 6.25때 돌아가셨고 네 아버지 등에는 어릴 때 데인 흉터자국이 있지. 음…….이런 이야기를 다시 해야 하다니 조금은 슬퍼지려고 하는데……”
“그런 것 따위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야!”
그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지만 난 그녀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구나. 처음 만나 이곳에 왔을 때는 순순히 내 말을 모두 믿어줘서 이야기하기가 쉬웠는데.”
“믿건 믿지 않건 그건 네 자유야. 뭐 이제 와서 달라질 것도 없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내가 묻자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쳐다보더니 나에게 걸어와 말했다.
“네 가슴에 손을 대보면 알게 될 거야!”
난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가슴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가슴에 손을 댄 채 노려보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느껴지지 않니? 심장이 멈췄을 텐데……”
“뭐!”
그제야 난 가슴에서 두근거림을 느낄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아냐 옷 때문에 느껴지지 않는 걸 거야.’
그리고는 손목을 잡고 맥을 찾아보았지만 급한 마음 때문인지 맥이 뛰질 않는 건지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환영해! 이제는 할머니라고 하기 보다는 어머니라고 하는 게 좋겠는데. 어 때 흡혈귀가 된 걸 축하하는 의미에서 네가 데려온 저 아가씨 피라도 빨아볼까?”
“어떻게 된 거지?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건가?”
내가 그녀의 목을 쥐고 이렇게 소리치자 그녀가 말했다.
“아냐! 난 강요하거나 억지로 하진 않았어. 네가 스스로 원했던 거야. 그래서 내 피를 받아마신거고. 그래서 네가 나간 이후로 넌 서서히 죽어간 거야. 인간으로서의 죽음은 서서히 그리고 고통 없이 찾아오지.”
“웃기지마! 내가 그랬을 리 없어. 아냐! 흡혈귀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어. 게다가 내가 순순히 되고 싶어 했다고? 내가? 하하하”
난 흥분해서 머릿속의 말을 미친 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할 수 없어 그것을 그대로 쏟아내는 내 귀에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리며 들려왔다.
“천 천히 죽어가는 동안 네게 변화가 일어났을 거야. 통증도 있었을 테고 뭐 그리 심하진 않지만. 죽음의 고통이 그렇게 시시할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겠지? 어쩌면 그 과정에서 네 기억이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네. 아니면 그 잘난 이성과 네 자아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해서 일어난 일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때론 인간의 제멋대로인 해석은 너무 이기적으로 작용하는 법이라서 말이야. 어때 넌 너의 변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니?”
“그럼 지수랑 저 여의사가 나를 죽이려고 한 것도 상처가 사라진 것도 그 것 때문인가?”
난 반사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상 처가 사라지는 건 확실한데 죽이려고 했다는 건 잘 모르겠네? 아! 네 눈동자 색이 달라진 걸 보니 네가 얻은 능력 때문인가 보구나. 흡혈귀 모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아니지만 종종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공포를 갖게 하고 최면을 거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 있는데 네가 그 능력을 가지게 된 것 같은데. 제대로 된 능력이 아니라면 오히려 상대방의 공포가 너에 대한 증오로 바뀌어 공격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말에 난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머릿속엔 그녀의 말이 사실일까? 하는 물음들이 가득 차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 때 그녀가 다시 내게 다가와 양 손을 어깨에 얹고 말했다.
“자! 그럼 첫 번째 식사를 시작해보자.”
그 녀의 말이 마치 신호가 된 듯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밖에 있는 저 여의사를 피해자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니 그것은 과거의 내가 내렸던 결정에 대한 부정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여자에 대한 부정이었으며 이기적인 타협에 대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반성의 방법이었다.
“잠깐 기다려요. 당신 말이 사실인지 저 밖에 있는 여자를 상대로 실험해볼테니.”
“음. 그래 마음대로 하렴.”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난 여사장을 뒤에 남겨 놓고 준희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뒤에서 번쩍이거든 당신은 얼른 내 물건들을 가지고 차로 가서 나를 기다렸다 내가 차에 타거든 당신 집으로 가요! 알겠어요?”
“네!”
정 말 내 눈 때문에 그녀가 최면이라도 걸린 것일까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난 가방을 내려 그녀에게 주고 나서 난 바텐더에게 럼 한 병을 가져다 달라고 한 뒤 준희 앞에 잔에 따라 놓고는 아직도 뒤에서 내 모습을 바라보는 여사장에게 병과 잔을 든 채 다가가 말했다.
“사실인 것 같군요. 내가 눈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최면에 걸린 것 같아요.”
“호호.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한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하겠니?”
“뭐 급할 건 없잖아요. 술이라도 한 잔하면서 생각해보죠.”
난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에게 잔을 내밀고 럼을 따라 준 뒤에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술을 마시는 틈을 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있었던 손님들은 다 사라지고 가게에는 네 사람 뿐이었다. 난 병을 들어 한 모금 머금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아까의 성냥을 찾는데 여 사장이 옆 탁자에 있는 촛불을 들어 미소 지으며 내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 숙여 담뱃불을 붙이는 것처럼 하다가 촛불위로 머금고 있던 럼주를 뿜었다. 순간 여사장의 실크 드레스에 불이 붙었고 나는 럼주 병을 흔들어 그녀에게 럼을 뿌린 뒤에 준희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뛰고 있었다. 여사장의 비명소리와 바텐더의 비명소리 그리고 손님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섞여 지옥의 소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고 난 그 한 가운데 선 채 여자들의 비명이 만들어낸 아리아를 감상하고 증오하고 폭발하고 있었다. 난 몸에 불이 붙은 채 팔을 흔들고 있는 여사장을 발로 밀어 쓰러뜨리고 럼 병을 바텐더를 향해 던지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나도 상세히 기억 할 수는 없다. 폭발한 이성의 조각을 다시 맞출 정도의 시간도 없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알 수 없지만 난 마치 악마가 된 듯 그 안의 모든 것을 부숴버렸다. 문으로 뛰쳐나오는 자들이 흡혈귀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었지만 벽을 타고 번지는 불길에 마치 불나방처럼 흔들리는 그들의 비명소리가 멀리서 울리는 듯 귓가에 어른거릴 뿐이었다. 보이는 대로 치고 닥치는 대로 부셨다. 파괴를 위해 태어난 자처럼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번뜩이며 피와 불이 가득한 나락의 한 자락을 헤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번지는 불길을 뒤로 하고 문을 뛰쳐나와 준희의 차에 올라탔다. 기계처럼 그녀가 차를 몰고 거리로 나가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저 안의 모두가 흡혈귀였을까? 아니 그보다 내가 정말 흡혈귀가 된 것일까. 어쩌면 나는 그 여사장에게 럼을 뿜는 순간 정말 흡혈귀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수백의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영화에서처럼 난 햇빛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정말 사람의 피를 빨아야만 살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난 정말 죽은 것일까?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떠다녔다. 그런 생각들 속에 빠져 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깊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느 아파트 단지의 주차장에 주차된 준희의 차 안에 앉아있었다. 어느새 오전 8시가 다 되어있었다. 난 아직도 옆에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준희를 흔들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죠?”
난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 차가운 아침공기를 마시며 태양을 바라보았다.
‘내가 나쁜 꿈을 꾼 걸까?’
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다시 집어넣고는 차에 올라타 준희에게 말했다.
“당신이라면 흡혈귀가 되고 싶겠어요?”
“네?”
내 말에 그녀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이렇게 되물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녀의 얼굴을 한 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집에 돌아가야겠어요. 나중에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음, 당신은 연구할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요.”
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동차의 핸즈프리에 꽂혀 있던 그녀의 핸드폰에 내 전화번호를 찍어주고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이 기분 나쁜 꿈에 대해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지하철에 올라타기 전까지는 그 꿈에 대해 실감하질 못했다. 마치 누군가의 재밌는 공상을 들은 것처럼 그렇게 되새길 뿐 이었다. 꿈이라고 믿고 싶은 사실인지 아니면 사실인 꿈인지 ……. 그러나 출근 시간의 지하철 안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기분 나쁜 꿈에 대해 곰곰이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고 말았다. 폐에서부터 올라오는 목마름과 나를 둘러싼 맥동들 그리고 피 냄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십의 사람들로부터 느껴지는 이유 없는 외로움. 고립감. 그리고 그 여사장이 말했던 황홀한 식욕을 사람들이 내뿜는 냄새들 속에서 느꼈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처럼 송곳니는 솟지 않았지만 난 지하철 좌석에 등을 기댄 채 변해버린 육신과 나에 대해 질근 질근 씹기 시작했다.
난 여기까지 적혀 있는 환자의 노트를 덮고 일어섰다. 분명 여기서 등장하는 김준희라는 의사가 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나는 낯선 익숙함에 잠시 당황해야 했다. 이 남자의 노트를 몰래 훔쳐 낸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그의 불안한 정신과 과대망상에 대해 치료를 목적으로 한 행동일 뿐 이었다. 그는 지금도 햇빛이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따뜻한 정원 벤치에 앉아 내 방 창문을 주시하고 있다. 처음에 그의 사라진 시간 속으로의 여행은 한 시간이었으며 흡혈귀 같은 것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런 사라진 시간에 대해 관대했으며 스스로에 대해 낙천적이었다. 실제로 그의 성격이 그러했다면 그가 이곳까지 오진 않았을 테지만 어쨌든 그의 노트 속에 등장하는 인격은 그러했다. 난 그의 메모 안에 등장하는 또 다른 주인공 인 간호사 김지수씨 에게 그를 내 방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검은 눈동자를 소년처럼 반짝이며 내 방에 들어선 그는 내가 미처 치우지 못한 그의 노트를 발견하고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가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생각해요?”
그의 갑작스런 질문에 난 당황해서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즐기는 듯 미소 지었다가 말했다.
“그 이전에 당신이 훔쳐보던 내 메모가 진짜 일까요? 아니면 이게 진짜 일까요? 아니면 모두다 거짓일까요?”
“왜 병원에 오셨는지는 알고 계시죠? 지하철 안에서 당신에게 목을 물어뜯긴 사람이 열 명이 넘어요.”
그의 기분 나쁜 미소에 내가 이렇게 소리치자 그가 이번에는 뭔가 생각하는 듯 눈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내 눈동자를 잘 봐요.”
난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노트에 적힌 것처럼 그의 눈은 노랗게 빛나지도 않았고 그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건 그 자신만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창가에 서 있던 내 손목시계에 반사 된 햇빛이 그의 눈에 닿는 순간 잠시 그의 눈이 노랗게 빛났다.
“뭐 필요하신 건 없어요?”
그를 조롱하듯 그의 눈을 바라보던 내가 눈을 돌리고 이렇게 말하자 그가 픽 웃으며 말했다.
“지하철에 태워줘요. 그 황홀감을 다시 느끼고 싶으니까.”
“그럼 다음에 또 이야기 할 까요?”
난 그의 말을 못들은 척 그를 내보내기 위해 간호사를 다시 불렀다. 그런데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신경이 날카로운 건 커피를 많이 마셔서 일까요? 아니면 생리중 이라서 일까요?”
그 렇게 말하고 그가 사라지고 나서 난 의자에 앉아 테이블을 손톱으로 두드리며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지 짐작이 맞았을 뿐이라고 결론 내리고는 그의 노트를 책상 서랍 안에 집어 넣어버렸다. 그리곤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 뿜는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떠올리고는 양 팔을 쓰다듬으며 따스한 창가 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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