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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습작

Hellic the Ghost

달부장 2005. 2. 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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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의 우주 공항은 다른 행성에 정착하려는 이민자들과 어딘가에서 벌어진 전쟁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거나 또 다른 전쟁터를 찾아 풀벌레처럼 떠도는 용병과 군인들로 항상 붐볐다. 사실 이런 혼잡한 틈을 타서 특정 행성에선 상당한 액수의 금액이 현상금으로 붙어있는 이른바 지역적 범죄자들이 시크릿 가든으로 숨어들어 은신하기도 했고, 지구 연합의 세력 확장에 반대하는 테러리스트들의 중간 거점으로 이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시크릿 가든 우주 공항의 경비요원들은 혹시 모를 사고나 숨어드는 범죄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셀돔행 셔틀 탑승구 옆에 서 있던 경비실장 역시 혹시라도 시크릿 가든의 범죄자 중 하나가 도망쳐 나가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지금 막 탑승구에 올라타기 시작한 승객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신념이나 열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과거 자신도 용병으로 일했었기 때문에 총이나 범죄, 살인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에게 경비 요원이라는 직책은 뭐랄까,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일과는 다른 일이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거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그가 직장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동안 의외로 자신이 용병을 했던 경험이 채용에 의외로 좋은 작용을 하는 것을 보고는 별 다른 주저 없이 이 직업을 택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오래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년 정도 지나자 자신의 직업에 많이 익숙해졌고 회사로부터 상당한 신임도 받아서 실장으로의 승진도 상당히 빨랐다. 실장이라고 해봐야 일반 경비직원 보다 보수가 20퍼센트 정도 많다는 것 외에는 별 다른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혼자 살고 있지 않아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별다른 불만 없이 실장직을 맡았다. 그가 데리고 있는 하란인 꼬마는 성장이 매우 빨라 지금은 거의 그의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고 그만큼 먹는 양도 많았다. 먹을 것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하란인 아이를 데리고 온 뒤 이웃에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가끔씩 그가 하란인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하란인이 고향에서 다시 태어나 어디론가 떠난다면 왜 그 많은 시체들이 그곳에 있는지를 수수께끼 풀 듯 추리하곤 한다는 점이었다. 뭐 결론내기 좋아하는 그의 생각으로는 어느 정도의 횟수를 채운 이후에 죽는다는 생각과 육체의 죽음이 아닌 영혼의 죽음 때문일 것 이라는 두 가지 가설을 세우고 결론 지으려 했지만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아서 하란인 아이가 말을 할 정도로 성장하고 나면 물어보기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놀이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줄을 서고 있는 30여명의 다른 행성인들 과 중간 중간 끼어든 인간들을 바라보던 그는 탑승객들을 살피는 것을 그만두고 잠시 자신의 현재가 전장을 누비던 자신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다는 생각을 했다. 눈가에 있던 죽음처럼 깊은 어두운 주름도 조금은 옅어진 것 같았고 볼에 살도 좀 붙어 있었다. 그러다 혹 여기서 옛 전우를 만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탑승객들을 살폈다. 아마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란인의 무덤에 대해 또 생각하며 시간을 보낼지도 몰랐다. 

그 때 그의 눈에 인간 남자하나가 들어 왔다. 아까는 너무 뒷줄에 서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는데 그가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줄이 짧아져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요즘에는 보기 힘든 상당히 오래 되어 보이는 선글라스에 짧은 검은머리를 하고 양손에는 꽤 무거워 보이는 은색 금속 가방 두개를 들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실장은 이런 유형의 남자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양손에 가방을 들고 있는 젊은 남자. 그의 머릿속에서 이 남자가 수상하다고 결론 내리고 있었다. 목적도 분명해 보이지 않는 젊은 남자가 셀돔을 향한다라는 점. 그의 눈에 보이는 저 남자의 차림새로는 목적이 불분명해 보였다. 저 남자가 사업차던지 관광을 위해 셀돔에 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임에 분명했다. 저런 복장에 사업이나 관광은 어울리지 않았다. 뭐랄까? 그의 움직임에서 풍기는 죽음의 냄새가 실장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마치 전장에서나 볼수 있을법한 몸짓. 다른 사람들은 눈치 못 챌지 모르지만 실장은 알수 있었다. 정글의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듯 아니 자신의 적을 속이며 잠입하는 군인의 모습을 그 남자의 조그마한 행동들에서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 그의 육감이 그의 행동을 도왔다. 실장은 줄을 서고 있는 젊은 남자에게 대열에서 나오라는 손짓을 일단 보냈다. 하지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그 젊은 남자는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그대로 대열에 서 있었고 실장은 할 수 없이 그에게 다가가 자신의 신분증 카드를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잠시 줄 밖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자신으로서는 최대한 정중한 억양과 행동이었으나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실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젊은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죠?” 

실장은 선글라스 뒤에 숨겨져 있던 젊은 남자의 눈이 마치 자신을 옥죄어 오는 것 같아 긴장했다. 얼마나 오래전의 일인가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에게서 위협적인 눈빛을 본 것이 ……. 지금 자신과 마주 서 있는 이 젊은 남자의 눈빛이 언젠가의 그 눈빛을 기억나게 했다. 젊어서일까? 젊은 혈기에서 나오는 힘 같은 걸까. 실장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이 젊은 남자에게서 순간 그런 강렬한 위협을 느꼈다. 실장은 젊은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조용히 이야기 했다.  

“보안상의 문제로 손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줄에서 나오셔서 사무실로 가시죠?” 

그가 젊은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것은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위협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대처였는지도 몰랐다. 자신을 위협하는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행동으로 자기 자신이 그의 위협에 아무런 반응도 없음을 그에게 보이려 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행동이 오히려 그의 깊은 곳에서 조금씩 새어나오는 알 수 없는 두려움 혹은 불안을 상대방에게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젊은 남자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남자의 손을 천천히 내리며 줄밖으로 나왔다. 

“좋습니다.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겠죠?” 

그가 방금 전까지 느끼던 위협과는 다른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 젊은이의 분위기에 경비실장은 방금 전까지의 방어적인 태도를 조금은 후회했다. 어쩌면 자신이 느꼈던 위협이 자신에 의해 과장된 것일 거라는 생각까지도 들기 시작했다. 

“빨리 처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남자는 젊은 남자를 데리고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는 열을 지나 탑승구 뒤쪽으로 향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이러한 움직임이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몇몇의 사람들은 마치 누군가 잡혀가는 구나하는 눈으로 젊은 남자를 바라보기도 했다. 


두 남자가 도착한 곳은 밖의 소란함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조용한 방이었다. 실장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젊은 남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닫고 의자에 앉기를 청했다.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방 안에는 전등하나가 밝히고 있었고 그 옆으로 커피 자판기 하나가 서 있었다. 

젊은 남자는 자신의 가방을 탁자 옆에 내려놓고는 의자에 앉았고 경비실장은 자신의 개인용 데이터 전송장치를 이용해 다른 경비 직원에게 연락을 하고는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앉아 있는 젊은 남자에게 주고는 자신도 커피 한 잔을 뽑아 자리에 앉았다. 

“커피. 괜찮겠죠?” 

“예. 좋습니다!” 

남자는 커피를 한잔 마시고 젊은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함이...?” 

젊은 남자 역시 앞에 놓여져 있는 커피를 한잔 마시고는 자신의 ID 카드를 꺼내 남자에게 내놓았다. 실장은 시크릿 가든에서 임시 발급 받은 것처럼 보이는 그의 ID카드에서 이름을 보고는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헬릭 에스몬드 씨. 셀돔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경비실장이 헬릭에게 묻자 헬릭은 표정 없는 얼굴로 경호 실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을 찾으러 갑니다.” 

“그게 누구죠?” 

사람을 찾으러 간다는 헬릭의 말에 바로 경비실장의 입에서 누구냐는 질문이 튀어 나왔다. 당연한 물음일 테지만 헬릭에게는 그러한 그의 질문이 어려웠는지 그의 물음에 답이 빨리 나오지 않았다. 헬릭은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여자입니다.” 

“애인이신가 보죠?” 

여자라는 헬릭의 대답에 경비 실장은 바로 애인인지를 물었다. 쉽사리 건넬 수 있는 질문이라 실장은 생각했지만 그런 질문을 받은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금방 심각해지는 것을 보고 경비 실장은 자신이 이상한 질문을 한건 아닌가하고 의아해 하기까지 했다. 

“여자 친구가 꽤나 위험한 곳에 가셨군요.” 

경비 실장이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헬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 실장은 탁자 옆에 놓여져 있는 헬릭의 가방을 들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뭐 형식적인 검열이니까 크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경비 실장을 그렇게 말하고 바로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총 한 정과 탄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굉장하군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오래된 화약식 총기라니 혹시 골동품 상이라도 하시는 모양입니다” 

약간의 웃음이 흐르는 경비 실장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헬릭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자신이 숨기고 있던 것을 들킨 것처럼 불안해 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뭐 무기를 소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물건을 가지고 여자 친구 분을 찾으러 가신다고 하니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겠군요…….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경비실장의 눈이 헬릭의 눈을 바라보았다. 뭔가 결심한 듯한 모든 것을 다 말해주겠다는 듯한 표정의 헬릭이 경비실장의 눈을 주시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Storm - 13 4MM 의 60발들이 탄창을 사용하는 자동 소총입니다. 지금은 자동소총이라는 개념이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많이 사용하던 무기였죠. 25미터 거리의 직경 5센티미터 탄착점에 100발중 98발을 명중시킬 정도의 명중률입니다. 한 200년 가까이 지난 오래된 물건이지만 아직도 쓸만하죠. 신경 접속 형으로 제작된 제 3기 모델로 당시에는 직접 인체 접속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헬릭의 말에 경비실장이 그의 다음 말을 막았다. 

“헬릭씨 저는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아…….” 

경비 실장은 헬릭이 진짜 셀돔에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으려다가 그의 어깨를 보고는 말을 잊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어깨에는 4개의 조그만 신경 접속장치가 드러나 있었고 헬릭은 그것을 경비 실장에게 보여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신체 접속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지금에는 거의 이런 물건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 제가 저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골동품으로 팔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용하기 위해서지요”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를 골동품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항의라도 하는 것일까? 그는 그의 어깨를 경비 실장에게 내보이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찾으러 가는데 이런 물건이 ……. 더구나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경비 실장은 이 여자를 찾아간다는 남자가 오래된 구식 자동 소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골동품이라고 말했다면 오히려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가 어깨를 보이며 사용하기 위해서 가지고 간다고 말한 것이 경비실장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고 말았다. 

그 때였다. 남자 한 명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180 정도의 큰 키에 검은 양복의 남자는 그의 짧게 자른 머리만큼이나 각 이진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남자는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실장에게 다가갔다. 

“헬릭 에스몬드 씨가 이분입니까?” 

벌써 헬릭에 대한 자료를 확인했는지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실장이 일어나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실장은 남자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엘. 안에 있는 저 남자 서류 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말이야. 어딘지 꺼림칙해. 자네가 오기 전까지 몇 마디 나눠 봤는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거든. 그래서.…….” 

“그렇다면 실장님의 육감 때문에 저를 부르셨다는 거군요?” 

라엘이라 불린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실장은 입을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를 부른 이유를 알겠나?” 

실장의 말에 라엘은 그의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 갔다. 

라엘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헬릭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가방을 다시 탁자 밑에 내려 놓고 있었다. 라엘은 실장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손 하나를 올려 놓고는 헬릭에게 말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되도록 금방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아! 제 이름은 라엘 헌트입니다. 헬릭씨 제가 이제 몇 가지 질문을 할겁니다. 당신은 그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면 됩니다.” 

“좋습니다.” 

헬릭의 대답을 듣고 라엘은 헬릭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첫 질문을 건넸다. 

“부모님께서 이혼 하셨습니까?” 

라엘은 헬릭의 눈빛에서 그가 엉뚱하고 갑작스런 라엘의 질문에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고아라서요.” 

“제가 착각했군요. 미리 당신의 자료를 보고서 그런 질문을 하다니 제가 죄송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라엘의 입가에는 수상쩍은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가장 격렬하게 싸웠던 적의 기억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예?” 

헬릭이 놀라며 말하자 라엘이 다시 한번 물었다. 

“생애 중에 가장 격렬하게 싸웠던 때의 기억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헬릭의 입에서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뭔가 입을 중얼거리지만 왜인지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라엘이 노리던 것을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가 오랜 과거의 기억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그가 조금이나마 자신에 대한 경계를 풀게 되고 그 틈이 커지면 라엘은 그 틈으로 그의 숨기고 싶은 과거를 읽어 내려고 하고 있었다. 

아주 비밀스러운 능력이지만 라엘은 자신의 이런 능력을 아주 긍정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의 머릿속에서 라엘 자신에 대한 경계의 벽을 허물었을 때 그 순간에 라엘은 상대방의 기억을 마치 자신에 대한 것인 마냥 감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에서 자료를 뽑아내듯 정확하게 출력되는 것이 아닌 흡사 라엘 자신이 일순간 상대방의 기억을 토대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상대방이 지금 무엇을 하려하는 가를 알아 내는 데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지금 라엘은 앞에 앉아있는 이 남자에게 구멍이 뚫린 것을 눈치 챘다. 

‘자 열렸다 라엘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라엘은 자기 자신에게 최면이라도 걸 듯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헬릭의 눈을 주시했다. 

‘그래 열린다... 조금이지만 ... 저 정도면 들어 갈수 있어... 들어 갈수 있어’ 

라엘의 눈은 헬릭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의식은 그의 몸을 떠나 헬릭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갑자기 확하고 열려버린 헬릭의 의식의 문안으로 들어섰을 때 엄청난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껏 침착하게 헬릭을 바라보던 라엘의 눈이 경직 됐다. 겁에 질린 듯한 라엘의 눈빛을 눈치 챈 헬릭이 탁자위에 올려져 있던 라엘의 손을 잡았다. 

“이봐요... 듣고 있는 겁니까...?” 

희미하게 정신을 차린 라엘이 머리에서 두통을 느껴 이마에 손을 올리며 일어 났다.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실장님께서 오실 겁니다..... 그럼....” 

갑자기 일어난 라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헬릭을 뒤로하고 라엘은 거친 숨을 내쉬며 문 밖으로 나왔다. 

라엘이 밖으로 나오자 저 쪽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던 실장이 라엘에게 뛰어왔다. 

“자네 왜 그러나 안색이 좋지 않은데...” 

“저 남자 이상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일단 위험한 남자는 아니니까 짐만 놔두게 하고 내보내십시오. 그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엘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실장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죄송합니다. 손님이 탑승 하시려던 셔틀이 이미 출발했다고 하는군요 다음 셔틀 출발이 한 3시간 정도 남아 있으니까 짐은 여기에 놔두고 밖에 나갔다 오시죠. 지구에서 오시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신 것 같은데... 손님의 좌석은 1등석으로 예약해 놓겠습니다 물론 저희 회사에서 지불할겁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실장의 모습에 헬릭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제 짐 잘 부탁드립니다. 2시간 뒤에 돌아오죠.” 

남자가 나가고 나자 잠시 후 라엘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뭔가 거대한 것에 의해 충격이라도 받은 양 놀란 눈을 하고서 실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야기 해보게 무슨 일인지?” 

라엘이 의자에 앉자마자 경비 실장이 물었다. 

“실장님께서는 왜 저 남자를 수상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라엘이 대답대신 반문 하자 잠시 머뭇거리던 실장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난 용병 출신이야. 전쟁터를 돌아다니다 보니 사람의 분위기만 보고 어느 정도는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지... 자네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실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엘이 다시 물었다. 

“단지 실장님의 느낌만으로 찾아내신 거라면 실장님의 능력도 무시할 것 못되는 군요” 

“그건 무슨 소린가?” 

갑작스런 라엘의 대답에 실장이 묻자 라엘은 머리에 얹었던 손을 내려 놓고는 대답했다. 

“처음에는 저도 대단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기억을 읽으려 하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읽기는 한 건가?” 

“아니요 읽지 못했습니다. 저 남자의 정신력이 다른 사람의 간섭을 막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어서도 아니고 제가 제대로 기억을 읽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라엘의 말에 실장은 더욱 더 궁금증만 쌓이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소린가 확실하게 말해보게” 

“그게 저도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일이니까요. 저 남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억의 양이 엄청 났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기억을 가지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너무나 거대해서 그 기억을 열려고 하는 순간 두통이 시작되더군요. 마치 수백년이상 살아온 사람처럼 엄청난 기억을 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뭐?” 

실장은 라엘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기에는 젊어 보이는 저 남자가 그렇게 오래된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을 뿐더러 지금껏 한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라엘이 머리를 쥐어짜며 힘들게 말하는 것 역시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남자 위험한 건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니까.” 

“순간 제가 느낀 것만으로 추측하자면 그는 위험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누군가를 찾아간다는 말도 사실인 듯하고요. 다만 그의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그리움 같은 감정들이라서 그게 좀 마음에 걸립니다만.” 

라엘의 말을 듣고 실장은 결정을 내려야만했다. 사실 이정도 사실만을 가지고 그를 잡아 놓을 수도 없을 뿐 더러 라엘 역시 위험하지 않다고 말하니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가 돌아오면 보내기로 하지...” 

“예. 그런데 저 남자도 용병인 것 같더군요. 뭐라더라... 그의 콜 사인이 Ghost 였던 것 같습니다.” 

“Ghost! 유령 말인가?” 

“예. 뭐 아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헬릭 그리고 유령이라 실장은 뭔가 생각나려는 듯 했으나 순간 자신의 휴대 통신 장치에서 울리는 접속음 때문에 그 조그맣게 고개를 내민 실마리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마치 한번 놓치면 쉽게 잡히지 않는 사냥감처럼 생각해 내려 해도 생각하지 않는 헬릭이란 이름과 고스트란 단어의 연관성이 그의 머릿속을 괴롭히다 이내 그것마저도 잊혀져 버렸다. 실장은 라엘을 내보내고 탁자 밑에 남아 있는 그의 다른 가방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역시나 그가 처음 보는 총 한자루가 탄창과 함께 있었고 길게 뻗은 총신이 그의 가슴을 뛰게 하고 있었다.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의   곡선의 총신과 직선의 총열이 마치 예술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예전 전쟁터에서의 기분으로 실장은 그 총을 들어 한번 벽을 향해 겨냥해보고는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순간 총에서 화약 냄새에 섞여 여자의 향취 같은 것이 느껴지자 다시 한 번 겨누어 보았다. 그리고 총몸 옆에 적혀있는 Blink 430이란 이름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실장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헬릭은 그대로 공항을 빠져 나왔다. 이런 종류의 검사는 예전에도 종종 받아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는 않았지만 끝나고 나자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아직 3시간이나 여유가 있다는 생각에 그는 시내로 나와 식사도 하고 시내도 거닐어 볼 양으로 공항을 나와 시내로 향했다. 10분 정도를 걷기 시작하자 상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그는 맘에 드는 식당하나를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낮인데도 어두운 실내가 포근한 분위기를 만드는 식당이었다. 벽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골동품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그 사이 사이 낡은 사진들이 이 식당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것 같았다. 

헬릭이 안으로 들어서자 흰 수염을 멋지게 기른 주인이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쇼. 뭘 드릴까요?” 

“식사 됩니까?” 

“물론이죠.” 

헬릭은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웨이트레스가 건네주는 메뉴판을 살펴보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하고는 주인에게 물었다. 

“아직도 햄버거를 하는 곳이 있군요.” 

“예. 건강에 안 좋으니 뭐니 하는 소리가 있긴해도 저희 집에서는 그게 가장 오래된 메뉴입니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셨거든요. 손님 그걸로 하시겠습니까?” 

주인의 물음에 헬릭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햄버거라면 여기서 먹는 것 보다는 밝은 공원에라도 가서 먹는게 좋을 것 같군요. 2개만 포장해 주세요 가지고 나갈테니까. 참 마실 것도 같이 주시구요” 

“예! 예! 금방 만들어 드리죠.” 

주인이 햄버거를 만드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헬릭은 그런 주인을 바라보며 옛날 일을 떠올렸다. 예전 누군가와 함께 햄버거를 먹던 기억. 지금 자신이 찾아가는 그녀의 기억.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는가 하는 생각이 날 때 즈음 주인이 직접 헬릭에게 포장된 햄버거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여기 있습니다. 맛있게 드십쇼” 

“예” 

헬릭은 주인에게 돈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어디 바람이 부는 벤치 같은 곳을 찾아 그는 움직였다. 햄버거가 포장된 봉투에서 새어나오는 따뜻한 온기가 그의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아 그는 기분이 좋았다. 도로 표지판을 보며 5분 정도를 걷자 공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헬릭은 초록색이 눈에 보이자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공기도 좋아지는 것 같아 상쾌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이런 평화로움, 좋은 느낌들. 그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흐르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 공원 산책로를 따라 놓여져 있는 벤치 하나에 앉아 있던 헬릭은 자신이 가지고 온 햄버거를 꺼냈다. 

아직도 따뜻한 햄버거를 두 손으로 잡으며 한 입 깨물려는 찰라 누군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에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옆에 아이 하나가 다가와 막 햄버거를 먹으려는 그를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10살 즈음 되어 보이는 그 남자 아이는 언제라도 장난을 칠 듯한 커다란 눈으로 헬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일에 헬릭은 조금 당황해서 헛기침을 했고 그런 헬릭을 아랑곳하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던 아이는 이내 손가락으로 햄버거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저씨 그거 뭐예요?” 

목소리에 궁금함이 가득하다. 헬릭은 아무 말 없이 남은 햄버거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저 먹어도 돼요?” 

“궁금해 하지 말고 먹어봐.” 

아이가 두 손을 내밀어 햄버거를 받아들고 헬릭 옆에 앉았고 두 사람은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아이는 햄버거가 맘에 들었는지 우와 하는 표정으로 헬릭을 한번 쳐다봤고 헬릭 역시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라…… 헬릭은 꽤나 오랜만에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지금껏 돌아다니던 전쟁터에서는 아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절망과 죽음이 넘치는 전쟁터에서 아이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헬릭은 이 아이와 함께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새삼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헬릭이 남은 햄버거를 마저 입 안에 넣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직 반도 채 먹지 못한 아이의 입가가 케첩으로 범벅되어 있는 것을 보고 헬릭은 웃으며 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아이는 잠시 먹는 것을 멈추었다가 헬릭이 입가를 닦아주자 다시 먹기 시작했다. 헬릭은 한참 그렇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나도 아이를 가질 수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녀가 아직 살아있을까? 하는 생각에서부터 혹시 지금 떠도는 셀돔의 소문들에 혹시 그녀가 관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그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들도 아이의 말 한마디에 사라져 버렸다. 

“아저씨 이거 진짜 맛있어요. 이름이 뭐예요... 우리 누나한테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헬릭은 이 조그만 꼬마가 꽤나 붙임성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햄버거야. 그런데 너희 누나가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꽤 예전에 먹었던 음식이라.” 

“음...그래요?” 

아이는 누나가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헬릭의 말에 조금 실망한 것 같았다. 하지만 금방 얼굴이 밝아지며 말했다. 

“아저씨 입에 빨간 거 묻었어요.” 

“어!” 

순간 헬릭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아이는 웃다가 헬릭이 손수건으로 입가을 훔치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아저씨 어디서 사세요?” 

“아저씨는 지구에서 왔단다. 너는 어디서 사니?” 

아이는 어디서 사냐는 헬릭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여기서 살고 있지만 곧 이사 갈 것 같아요. 아버지는 지구로 가신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저도 잘모르겠어요. 누나는 지구로 가는걸 싫어하거든요” 

“어머니는 좋아하시니?” 

아이가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헬릭이 묻자 아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엄마는 죽었어요. 병으로 돌아가셨데요.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저하고 누나만 살았는데 아버지가 생겼어요! 얼마 전에” 

아이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아버지가 생기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에게는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어느 날 아버 오셨어요. 저는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누나가 데리고 오셨어요. 처음에는 가짜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저랑 누나에 대해서 다 알고 있더라고요. 이상하지만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오고 난 뒤에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좋은 집으로 이사도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아닌 것 같아요. 누나에게 물어보면 누나는 아버지가 맞다고 하고......”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짜라고 생각은 하지만 알 수 없다는 말. 아이가 어려서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헬릭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서 잊고 있었던 거겠지. 

“근데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헬릭이라고 불러라. 네 이름은 뭐니?” 

“아더에요” 

아더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이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헬릭에게 말했다. 

“아저씨 저 여기서 누나 기다려야 하는데 아저씨랑 같이 있어도 돼요?” 

“응” 

헬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답하고는 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아더는 벤치에서 내려 공원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가 그것에 실증을 느꼈는지 헬릭의 옆에 다시 앉아 잠시 헬릭처럼 멍하니 턱을 괴고 앉아 있다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헬릭을 불렀다. 

“아저씨?” 

“왜?” 

“재미있는 이야기 해주세요.” 

“응?” 

갑작스런 아이의 요청에 헬릭은 아이를 바라보다가 아이의 진지한 표정에 할 수 없이 이야기를 해주기로 마음먹고는 무슨 이야기를 해주지 하고 생각하다 이내 뭔가 생각났는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 아름다운 아가씨가 살았단다. 아가씨는 매일 밤 피아노를 치며 창밖을 내다보곤 했지. 어쩌면 집을 떠나신 어머니가 다시 돌아오실까 해서. 아가씨의 어머니는 아가씨가 어릴 적에 집을 떠났거든. 그런데 창밖을 바라보는 아가씨의 모습에 아가씨 집 주변 풀숲에 살던 유령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지. 그래서 유령은 항상 그녀의 집 주변을 맴돌며 아가씨가 창밖을 내다보기를 기다렸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가씨는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단다. 유령은 계속 기다렸지. 하루… 이틀… 그렇게 2주가 지났어. 그녀가 밤마다 연주하던 피아노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 결국 참지 못한 유령은 아가씨의 방 창문으로 가서 그녀를 바라보았지. 혹시 자기를 보고 놀라지는 않을까 해서 유령은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거든. 유령이 아가씨 방 창문을 통해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침대에 누워 신음하고 있었단다. 유령은 마음이 아팠단다. 그녀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다 그것이 병이되어 곧 죽을 거라고 몰래 유령을 따라온 요정이 말했거든. 유령은 아가씨를 살리고 싶어 요정에게 물었지. 어떻게 하면 그녀를 살릴수 있는지. 요정은 처음에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다가 유령이 하도 간절하게 묻자 대답했단다. 

“나와 계약을 맺으면 아가씨를 살려주지” 

유령은 고민했어. 자기 친구들을 죽일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어느 날 밤 신음하는 아가씨를 보고는 결국 친구들을 다 죽였단다. 그리고 요정에게 찾아가서 말했지. 아가씨를 살려 달라고. 그런데 이 요정은 착한 요정이 아니었어. 나쁜 요정이었거든. 이 요정은 아가씨에게 죽지 않는 저주를 내렸단다. 아가씨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고 아가씨의 아름다운 목소리도 사라졌지. 그녀가 그렇게 변하자 유령은 요정에게 말했어. 계약과 틀리다고. 하지만 요정은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고 말했단다. 유령은 친구도 죽이고 아가씨에게 고통을 준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단다. 그때 아가씨의 어머니가 돌아왔어. 아가씨의 어머니는 변한 아가씨에게 마법을 걸어 그녀가 깊고 깊은 잠에 빠지게 했단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버렸어. 유령은 그런 것도 모른채 사방을 떠돌았단다. 친구를 죽인 괴로움에 참을수가 없었지. 그러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아가씨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았지. 그래서 그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단다. 유령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거든......“ 

헬릭이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자 아이가 헬릭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끝이에요.” 

“응. 재미있었니?” 

“유령이 너무 불쌍해요”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유령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여행을 계속하고 있단다.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말야. 유령이 너무 착하게 나오는 이상한 이야기지?” 

헬릭의 말에 아더는 헬릭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유령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죽은 사람은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아이의 말에 헬릭이 아더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이의 말이 맞았다. 죽은 사람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죽은 유령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지. 헬릭은 어쩌면 이 아이도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아더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기특하다는 듯 아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때 멀리서 젊은 여자하나가 아더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자 아더는 얼른 벤치에서 일어나 헬릭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우리 누나가 데리러 왔나봐요. 그럼 아저씨 안녕” 

아더는 그렇게 인사하고는 쪼르르 뛰어 누나의 품에 안겨 사라졌다. 

헬릭은 아더의 뒷모습을 계속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아이가 남긴 말처럼 자신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를 바라며.


헬릭이 자신의 짐을 찾으려 조사실로 돌아왔을때는 셔틀의 출발시간을 20분 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헬릭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방안에는 실장이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오셨군요.” 

“예. 덕분에 조금 쉬었습니다.” 

헬릭의 말에 실장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가 할 이야기라도 있는 듯 헬릭에게 맞은편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사실 저희는 손님의 개인적 기억에 대해 조사를 했습니다.” 

실장은 헬릭에게 이렇게 말하고 헬릭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헬릭의 표정에서는 불쾌한 듯한 표정은 찾아볼 수가 없어 오히려 자신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라엘이라는 남자였죠?” 

헬릭의 말에 실장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헬릭은 심각하지 않은 얼굴로 실장을 바라보다 탁자옆 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가방을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당신도 용병이었죠?” 

헬릭의 말에 실장은 어찌 알았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당신이 저를 알아 보았듯 저도 당신을 알아볼 수 있더군요. 그런 걸 육감이라고 하나요?” 

실장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헬릭에게 실장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건넸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까 가방을 열어보고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전쟁터에만 나타난다는 유령의 이야기. 당신이죠! 헬릭 에스몬드씨?” 

실장의 말에 문을 나서려던 헬릭이 멈추어 섰다. 헬릭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실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게 저의 여행에 문제가 되지는 않겠죠?” 

“물론이죠. 당신이 누굴 찾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꼭 찾기를 바랍니다. 밖에 라엘이 당신의 티켓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 

실장의 말에 헬릭은 방을 나서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 이름도 모르는 군요?” 

“아...... 제 이름은 레니 렌스 입니다. 다음에 다시 보게 되면 레니라고 불러주십시오” 

“전쟁터에서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실례 많았습니다.” 

헬릭이 그렇게 사라지고 난 뒤 20분정도가 지나자 라엘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헬릭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실장을 바라보다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레니에게 라엘이 물었다. 

“뭐라도 생각해 내신 겁니까?” 

“음,,,,,,” 

신음 같은 대답이 레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라엘은 궁금해 재촉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실장이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떠났나?” 

“예.” 

“그렇군. 저 남자 내가 알고 있는대로 라면 유령이라는 말 그대로인 사람이네. 자네가 수백 년이라도 산 것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그게 사실인지 모르지만 저 유령이라는 남자의 기록은 전쟁터에서만 나타난다고 들었네. 혼자서 전쟁터를 누비는 남자라고 하더군. 자세한 건 나도 모르지만 용병들 사이에서는 빛바랜 전설 같은 이야기지. 저 남자가 누굴 찾는지 모르겠지만 찾았으면 좋겠군. 그래야 전쟁터에서 사라질지 모르니까” 


레니와 라엘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헬릭은 셀돔으로 향하는 셔틀 안에서 눈을 감고 이름 하나를 되뇌고 있었다. 

“세린, 세린, 세린, 세린! 당신 그곳에 있나?”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에 여러 번 되뇌어 보는 것이었지만 부를 때마다 낯설어지는 그 이름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아가씨를 위한 긴 여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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