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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습작

은하 끝의 등대

달부장 2005. 2. 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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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 은하 끝의 등대


멀리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저편을 바라보며 남자는 별을 세고 있었다. 초점 없는 흐린 눈에 들어온 흐릿한, 마치 검은 쟁반 위에 뿌려진 설탕 같은 별빛들을 몇 시간째 세고 있었다. 세고 또 세는 건지, 수많은 별을 세다 수를 잊고 다시 세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눈이 조금씩 위 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 창 밖의 별을 세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자신이 이런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한 달에 정확히 네 번 그러니까 일 주일에 한번씩 시크릿 가든을 지나 다른 은하로 넘어가는 수송선의 항로 변경을 위해 설치된 항로 유인선 에서 생활한 지 이제 2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실 남자도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우주에 항로 유인 시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거대한 수송선의 항법장치가 유인 시설이 필요할 정도로 엉성할 거라고는 생각하진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송선에 달려 있는 항법장치의 기술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 아닌 그의 항로 유인선 Road-Finder 가 위치하고 있는 이 곳, 그러니까 시크릿 가든에서 0.3광년 떨어진 이 전사의 무덤이란 곳에서 항법장치의 오류를 발생시키는 신호가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시에 적의 신호 교란과 감청을 피하기 위해 사용했던 신호 장치들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태양전지의 에너지로 작동해서 항법장치에 에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여기에 와서야 그는 알게 되었다. 다른 은하로 가는 최단거리 항로에 위치한 이런 골칫덩어리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 연합 항로 관리국에서는 굉장히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 곳에 항로 유인선을 배치해서 정확한 항로를 가리켜 줄 수 있는 레이저를 항로에 비춰주는 방식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한 달에 네 번 밖에 운항하지 않는 수송선이지만 굉장히 대규모의 운반이었고 물자 수송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항로였기 때문에 그런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전적 방법이 2년이나 사용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자신이 이곳에 보내지고 난 뒤에 2년 동안 그 항로의 잔해의 처리 문제가 언급되고는 했지만 그 뿐, 이렇다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지나가는 수송선이 보내주는 식량으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먹는 문제에 대해선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가끔씩 오래된 공기 발생 장치가 고장나면 영락없이 마스크를 쓰고 수리 선박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 무심하기 짝이 없는 수송선에서 보급용 물탱크를 다른 방향으로 발사해버리거나 하면 오줌을 정수기에 걸러 마셔야 할 정도로 물이 귀했기 때문에 그다지 편한 생활은 아니었다. 거기다 시크릿 가든과 연결되는 통신 회선도 굉장히 잡음이 심해서 어떤 때는 2주 내내 사람목소리 한번 듣지 못하고 지낼 때도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창 밖을 바라보며 별을 세던 것을 그만두고 천천히 일어서서 2리터 용량 정도 되어 보이는 우유 통에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냉장고 옆의 정수기에 소변을 걸러 다른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고는 다시 창가 의자에 앉아 중얼거렸다.

“아! 저 물 먹는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는데.”

그리고는 눈을 감고 잠이라도 자려는 듯 자세를 고치고는 흠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남자는 잠을 자진 않았다. 다만 그렇게 눈을 감고 곰곰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사실 그는 그렇게 생각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혼자서 이곳에 오고 난 이후로는 잡다한 생각들이 많아졌고 그런 공상들이 의외로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데 상당히 도움이 됐기 때문에 수송선에서 보내주는 읽을거리를 다 읽고, 좋아하는 영화도 다보고 이렇게 별까지 세고 난 이후에는 그는 늘 긴 공상에 빠지곤 했다. 오늘은 전에 연락했던 친구의 기묘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뭐라고 하더라? 아 그래. 지구 연합과 FIAP사이에서 떨어져 나온 기묘한 해적이야기를 그 친구는 했었다. 그 시즈라는 남자가 두 집단으로부터 추격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남자는 그런 남자가 자신과 한 2년 교대 해주고 이 항로 유인선에 숨어 있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었다. 

그가 한참, 그 갈곳 잃은 남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 등 뒤에서는 빨간 불 하나가 계속 반짝이고 있었지만 눈을 감은데다 등까지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공상에 흥미를 잃은 그가 TV프로그램이라도 볼 셈으로 의자를 돌리는 순간 점멸하고 있는 붉은 빛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그 반짝거림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나 붉은 전등 아래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를 부셔버리기라도 할 듯 손으로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 놈의 스피커 또 고장났잖아!”

등 위의 조난 신호등이란 글자가 빨간 불빛을 받아 붉게 물들기를 반복하는 동안 남자는 황급히 통신기 쪽으로 다가가 디지털 방식의 LCD 패널과 아날로그 주파수 레버를 번갈아 작동시키며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여기는 항로 유인선 Road-Finder. 조난선박은 응답하라. 여기는 항로 유인선......”

그렇게 네 번 정도를 반복했을까 드디어 조난선 쪽으로부터 남자 목소리의 응답 메시지가 수신되었다.

“여기는 수송선 Package-Ship #2234. 엔진 고장으로 표류중이다. 긴급 도킹을 요청한다.”

화상데이터는 저쪽 채널에 문제가 있는지 제대로 수신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음성 채널은 제대로 수신되고 있었다.

“셀데이터(데이터 송수신을 위한 패킷보다 작은 단위의 데이터 조각)를 송신하지 말고 현대 연결된 음성채널로 위치를 말하라. 확인 후 이쪽에서 유인 레이저를 발사해 주겠다.”

“....34.....X..45...Y.....-45Z”

상대방의 음성에 약간의 잡음이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좌표를 수신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좌표가 수신되자 마자 남자는 얼른 옆에 설치된 레이저 조종패널의 키패드를 두들겨 방금 수신한 좌표를 입력해 유인할 항로를 설정했다. 그러자 선체 아래쪽에 위치한 레이저 실에서 레이저 발사기가 좌표를 향해 움직이는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난선에서 말한 좌표 쪽으로 밝은 적색의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남자는 패널로 레이저 발사기의 작동 상태를 확인하고 창가로 다가가 붉게 발사되고 있는 레이저를 눈으로 확인하고는 다시 통신기 쪽으로 달려갔다.

“방금 유인 레이저를 발사했다. 적색 광선이 보이는가?”

“......보인다...이쪽에 상태가 심한 부상자가 있으니 도착하는 즉시 치료할 수 있는 준비를 해주기 바란다.”

‘부상자!’

부상자라는 말을 듣고 남자는 잠시 멈칫했다. 심한 부상자를 치료할만한 도구가 항로 유인선에는 비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내에 있는 의료용품이라면 간단한 응급조치용 약품들과 10개 정도의 진통제 앰플이 고작이었다. 

‘아무래도 바로 시크릿 가든으로 보내야겠는걸’

남자는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통신기의 주파수를 시크릿 가든 쪽으로 맞추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럴 때 시크릿 가든과의 통신채널에 잡음이 너무 심해서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주파수를 바꾸어가며 연결을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결국 할 수 없이 출력이 높은 비상용 통신기를 사용해 연결해 보려고 창가 옆 조종패널로 다가가는 순간 그의 눈에 Road-Finder 쪽으로 다가오는 수송선 한 대가 보였다.

‘이렇게 빨리? 엔진이 고장났으면 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시크릿 가든으로 연락하려던 것을 일단 그만두고 통신기로 다시 다가가 조난선을 향해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도킹을 준비하겠다. 도킹 모듈을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 약간 충격이 있을지 모르니 대비하도록.”

“알았다.”

남자는 도킹을 위해 두 선박의 위치 상태를 동기화하는 정보를 송신하고는 조종패널을 조작해 모니터로 도킹 진행 상황을 모니터링 했다. 잠시 후 도킹 모듈이 작동하는 기계음과 함께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수송선과 유인선이 도킹한 것을 확인하고는 도킹실 쪽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동안 남자는 자신의 발걸음이 가벼운 것을 느끼고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따분함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이 흥미롭고 흔치 않은 사건이 그를 즐겁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도킹실의 문을 열면서 이런 재미있는 사건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정작 도킹실의 문이 열리고 세 명의 남자가 유인선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었다. 

“무슨 사고를 당하셨습니까?”

남자는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에게 일단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남자의 물음에도 그들은 아무런 대답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다시 한번 묻고 싶었지만 조난당해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들을 만나자마자 꼬치꼬치 캐묻는게 이상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유인선에 들어선 세 남자는 피곤하고 지친 표정으로 조종실 바닥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

그런데 그 세 남자의 복장이 상당히 특이했다. 맨 처음 들어선 남자는 깡마른 얼굴에 검은색 양복차림이었는데 그 뒤에 따라 들어온 사람들은 왠지 뒷골목 냄새가 나는, 말하자면 앞서 들어온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차림이었다. 거기다 그 세 명중에는 저 수송선을 조종할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남자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부상당한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남자가 부상당한 사람이 있으니 치료할 준비를 해달라는 말을 기억하고 이렇게 물었다. 남자의 질문에 검은 양복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송선 안쪽에 있는데 이미 죽었을 거요.”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는데.’

상대가 입을 열자 남자의 수상쩍은 생각이 조금은 사라졌고 그제야 다시 한번 물을 용기가 생겨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었다. 남자의 질문에 거칠어 보이는 두 명중 짧게 자른 금발 머리의 남자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딴거 알아서......”

“후안!”

후안이라 불린 남자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자 검은 양복의 남자가 얼른 그의 이름을 불러 제지하고는 말했다.

“지금 우르크스인들이 시크릿 가든에서 연결되는 몇 개의 항로를 점거했습니다. 우리는 그 중 한 항로로 이동하던 도중에 우르크스 전투함의 공격을 받아 엔진고장을 일으켜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계속 표류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런 외진 곳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이 남자는 다른 두 명과는 달리 매우 점잖아 보였다. 말투도 부드럽고 인상도 나쁘지 않은데 다만 눈빛이 너무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남자 자신이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눈빛이었다. 장난기와 함께 어딘지 모르게 악한 기운이 서려있는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우르크스 녀석들이 드디어 일을 저질렀군요. 항상 으르렁거리며 시끄럽게 하더니 결국…...”

“예!”

남자는 일어서서 통신기 쪽으로 걸어가서 말했다.

“그럼 제가 시크릿 가든 쪽에 조난당했다고 말하겠습니다. 수송선 번호가...... 어떻게...”

남자는 물음을 끝마칠 수가 없었다. 통신기 앞에 앉아있던 자가 언제 일어섰는지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에 들어와 있는 칼이 남자의 목을 조금 파고 들었는지, 목 아래로 피가 흘러 앞 가슴쪽이 조금 뜨끈해졌다.

“왜…...이러시는 겁니까?”

약간 겁에 질린 남자의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오자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던 남자가 소리쳤다.

“입 다물고 조용히 해!”

그러자 창가 앞에 주저 앉아있던 검은 양복의 남자가 천천히 일어서 바지를 손으로 털면서 말했다.

“아뇨, 아뇨! 연락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예정에 없는 항해였으니까.”

검은 양복 남자의 말이 끝나자 그 옆에 앉아있던 후안이란 금발머리 남자도 따라 일어서며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남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어버리라고 앤튼! 그 자식 죽이고 우리가 이걸 타고 가면 되잖아.”

후안의 말에 남자는 목에 들어와 있는 칼날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뭐 하는 자들이지?’

“당신 이름이 뭐죠?”

남자가 세 사람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는 사이, 검은 양복의 남자가 다가와 목에 들어와 있는 앤튼의 칼을 서서히 잡아 내리며 물었다. 남자는 일단 자신의 목에서 칼이 사라진 것에 안도하며 목에서 조금씩 흐르는 피를 손 등으로 닦아내고는 입을 열었다.

“헤인스. 조셉 헤인스입니다.”

“아! 헤인스씨, 제 이름은 크린트입니다. 저희들의 무례함을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이 두 친구는 상당히 거칠어서 말보다 행동이 앞서거든요. 다행히 제가 같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필요한 건 이 유인선입니다. 저희들이 꼭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하지만 이 항로 유인선이 없으면 다른 수송선들이 이곳에서 표류하고 맙니다. 어쩌면 떠도는 잔해와 부딪혀 사고를 일으킬지도 모르고…... 더구나 이 유인선의 항속거리는 여행을 할 만큼 길지 못합니다. 겨우 좌표 수정이나 가능할 정도의 기동력만을 가지고 있어요”

헤인스의 말을 들은 크린트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아무래도 이 유인선의 항속거리에 대한 것은 그들의 계산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하! 그렇다면 이를 어쩐다.”

크린트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후안을 불러 말했다.

“이 유인선을 이용하는 건 그만둬야겠는데 헤인스씨 말대로 이 유인선의 항속 거리는 길지 않을 거야. 아까 본 커다란 레이저 발사기를 달고 있는걸 보아도 그럴 것 같아. 아무래도 저 패키지 쉽을 다시 이용하는 방법 밖에는 없겠는데.”

“하지만 저 수송선의 엔진 하나로는 돌아가는 것 조차 무리 일텐데요”

“아냐. 돌아가지 않아. 셀돔으로 가는 항로 중간에 있는Funhouse까지만 가면 거기서 우리 손님들에게 연락을 할 수 있어”

크린트의 말이 끝나자 후안이 잠시 멈칫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금 고장 난 엔진 쪽의 연료 펌프 부분을 수동 정지 시키고 연료를 조금 더 보충한다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아!”

헤인스는 후안과 크린트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할 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저들은 분명 도망치고 있거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자들로 보였고 그렇다면 저들이 그들의 얼굴을 본 자신을 살려 둘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방금 전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댔던 앤튼이란 자는 아직도 그의 등 뒤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더욱 뚜렷해졌다.

‘어떻게 하지. 여기는 도망칠 곳도 없으니…...’

그 때 헤인스의 눈에 아직도 열려 있는 도킹실의 문이 보였다. 움직임 감지 센서가 고장 나서 반 자동으로만 작동되는 저 도킹실의 문이 이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래 일단 저들이 타고 온 수송선으로 도망치자. 거기서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다면......그래!’

이대로 있다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세 명의 불청객들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방금 생각한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불청객들이 잠시 주의를 돌린 사이 도킹실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그런 헤인스를 발견한 크린트가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탕!”

바람처럼 달려나간 헤인스의 귀 옆으로 총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스쳐 지나가 도킹실의 문을 맞추었다. 헤인스는 도킹실을 통해 팩키지 쉽으로 옮겨 타자마자 도킹해치를 서둘러 닫았다. 막 그의 뒤를 따라오던 앤튼이 닫힌 도킹 해치를 두드려 댔지만 꽉 닫힌 금속 해치를 사람의 힘으로 열 수는 없었다. 손으로 안 될 것이라 것을 알아차린 앤튼이 총을 꺼내들었을 때, 크린트가 어느새 다가와 총을 들고 있는 앤튼의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그만둬. 어차피 독 안에 든 쥐야.”

팩키지 쉽으로 들어선 헤인스는 곧장 조종실로 향했다. 복도를 따라 달려가 막 조종실의 문을 열었을 때 조종석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 잠시 멈칫했지만 그 사람이 조종석에 묶여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조종석 의자에는 여자가 한 명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죽었는지 기절한 것인지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헤인스는 그녀의 목에 손을 대 맥박이 뛰고 있는지 확인한 뒤에 입에 물려 있는 재갈을 풀고 뺨을 살짝 두드려 깨웠다.

“이봐요. 일어나요”

서너 번 정도 가볍게 뺨을 때리자 그녀가 조그마한 신음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고개를 들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는 제논이라는 이름을 연달아 부르며 찾는 것 같더니 헤인스를 바라보고 말했다.

“아! 당신은 누구죠? 혹시 제논이라는 남자 보지 못했나요?”

여자에게서 숨 쉴틈 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을 듣고 있던 헤인스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일단 이것부터 풀죠.”

헤인스가 여자의 몸을 묶고 있던 끈을 풀어주는 사이에도 여자는 뭔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을 계속 중얼거렸다. 그러다 끈이 풀리자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쪽 구석의 의자로 천천히 다가갔다. 잠시 후 그녀가 뭔가를 발견한 듯 입을 틀어막고 흐느꼈다.

“제논...... 미안해. 내가 그 화물만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헤인스는 여자가 무엇을 보고 저러나 하고 천천히 다가가 의자를 바라보았다. 돌려져 있어 헤인스가 발견 못한 제논이란 남자의 시체가 의자에 늘어뜨려져 있었다. 가슴 쪽에 입은 상처에서 많은 출혈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것이 사인인 것 같았다.

“이 사람은 누굽니까?”

헤인스가 묻자 여자는 손 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려 헤인스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당신은 누구죠? 저들과 한패는 아닌 것 같은데.”

“저도 저 세사람을 피해서 이쪽으로 도망쳐 온 겁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누구고 당신과 이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헤인스의 질문에 여자는 심호흡을 하듯 길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고는 가슴에 손을 얹어 진정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로즈고 이 배의 선장이에요. 저 남자는 제논이라고 항해사였구요. 그 놈들은 냉동된 사람들을 다른 종족 미식가들에게 식료품으로 팔아치우는 놈들이에요. 저와 제논은 우연히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가 저 놈들에게 잡혀서 팔려가는 중이었는데 도중에 우르크스인들의 공격을 받아서 이렇게 되었어요. 제논은 공격 받는 도중에 저 놈들이 고장난 엔진의 수리를 시키는 바람에 엔진실에 들어갔다가 이렇게 부상을 당하고 죽은거구요.”

“아 그렇군요……”

로즈라는 여자의 말에 잠시 헤인스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을 식료품으로 팔아넘긴다니. 하지만 여자의 말대로라면 아까 크린트라는 남자에게서 자신이 느꼈던 눈빛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헤인스에게는 낯선 잔혹함이란 것이었다.

“일단 먼저 시크릿 가든으로 연락을 취해야 해요. 로즈, 당신이 연락을 해주세요. 저는 이 쪽에서 도킹락(Docking lock)을 풀 수 있을지 보고 올께요”

“알았어요. 그런데 그보다 먼저 당신 목에 난 상처부터 처리해야겠어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어요.”

로즈의 말에 헤인스는 손바닥으로 목의 상처를 한 번 감쌌다가 다시 펴보았다. 자신의 생각보다 많은 피가 흐르는 것 같았지만 흥분 때문인지 그다지 통증도 느낄 수 없었다. 헤인스가 괜찮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어느새 로즈가 조종패널 밑의 구급 상자에서 봉합용 밴드를 꺼냈다.

“일단 이걸 붙이고 있으면 피는 멈출거에요”

“......”

밴드에 묻어있던 마취성분 때문이었지만 여자의 손길이 그의 목에 닿자 오랜만에 느끼는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 덕분에 통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목에 밴드를 붙이고 나서 헤인스는 얼른 다시 도킹실로 달려 갔고 로즈는 통신기를 잡고 주파수를 바꿔가며 시크릿 가든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도킹실에 도착한 헤인스는 패키지 쉽에 물려 있는 도킹락을 풀려고 스위치를 눌러 보았지만 반대 쪽 락이 그대로 물려있어 풀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수동 도킹을 위한 컨트롤 패널을 건드려 보았지만 Road-Finder 쪽에서 신호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포기하고 조종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우르크스 인들이 전파를 차단을 하는 모양이에요. 노이즈가 잔뜩 섞여 연결이 되질 않아요!”

“전파 차단이 아니라도 이 곳은 원래 접속이 잘 안되는 곳이에요. 그래도 계속 시도해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군요. 도킹락도 풀리지 않으니 그것 밖에 방법이 없어요.”

헤인스의 말에 로즈가 몇 번 더 시도해보는 듯 했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파 차단 같아요. 아무리 접속이 안 되는 곳이라고 해도 수신 데이터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면......”

“아!”

로즈의 말에 헤인스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엎친데 겹친 격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어쩌지? 이러다간 영락없이 저 녀석들에게 죽고 말겠는걸.’

헤인스가 절망감에 빠져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통신기의 스피커에서 크린트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헤인스씨 선택을 잘못했어요. 여기 있었으면 살 수도 있었을텐데. 우리를 이렇게 애먹이다니…… 성질 급한 엔튼과 후안이 지금 서로 당신을 해치우겠다고 이를 갈고 있어요.”-

“닥쳐!”

헤인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로즈가 그렇게 소리쳤다.

“아! 로즈양 그러고보니 당신을 깜빡했군요. 그렇게 화내지 말아요. 그렇게 화를 내면 스트레스 때문에 육질이 안 좋아질테니까. 일부러 살아있는 채로 운반하는데 그러면 의미가 없지요.”

비아냥거리는 크린트의 말에 로즈가 이를 악물었다.

“맹세하건데 꼭 네 놈의 심장을 꺼내 씹어주겠어.”

“제가 연락한 건 이렇게 말다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헤인스씨, 당신이 그 팩키지 쉽을 우리에게 돌려준다면 당신의 생명을 보장하겠습니다.”

크린트의 말을 들은 로즈가 헤인스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저렇게 속이고는 결국 죽일거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헤인스는 로즈처럼 흥분해서 소리치는 대신 여느 때보다 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오”

“아! 좋습니다. 20분의 여유를 드리죠. 그 뒤에 다시 연락할 테니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접속이 끊기자 헤인스는 로즈가 앉아있던 의자에 털석하고 앉아버렸다. 20분의 시간을 벌긴 했지만 별다른 대책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그 사이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내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머리를 쥐어짜도 적당한 해결책은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죠?”

“생각 좀 해 보구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머릿속은 백지처럼 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공상으로 시간을 보낼 때는 별의별 생각이 머리를 맴돌더니 그런 쓸데없는 생각 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지? 이제 어쩐다.’

그 때 그의 머리에서 Road-Finder의 공기 발생장치가 생각 났다.

“그래!”

갑자기 헤인스가 소리치며 일어나자 로즈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뭐 좋은 생각이라도 났어요?”

로즈의 물음에 헤인스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 유인선의 공기 발생장치는 밖에서 수동으로 조절할 수 있어요. 제가 밖으로 나가서 그것만 조절한다면 저 녀석들에게 치명적일 겁니다. 제가 쓰던 비상용 마스크는 하나 밖에 작동되지 않으니 두 명 아니 세 명의 목숨을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지요.”

“적어도 둘은 어떻게 처리할수 있다는 말이군요. 하지만 너무 위험한거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저 쪽이 한 명만 남는다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협상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넘어오는 셈이니까요. 이 안에 선외 작업을 위한 우주복은 있겠죠?”

“긴급 작업용이 있긴 하지만…...”

로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헤인스는 로즈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는 외부해치 쪽으로 달려 갔다. 거기서 두 사람은 우주복을 갈아 입고 외부 작업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해치를 열고 우주로 나왔다.

헤인스는 먼저 작업 복에 달린 후크를 팩키지쉽 외부 작업용 고리에 걸고 팩키지쉽 위를 천천히 기어가 유인선의 조종석을 살펴보았다. 다행인지 패키지 쉽의 외부 해치가 유인선의 조종석에서는 보이지 않는 방향에 있었기 때문에 팩키지쉽의 아래로 조금 돌아서 간다면 놈들에게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로즈! 나는 유인선 쪽으로 가서 공기 발생 장치를 조작할테니까, 당신은 팩키지쉽의 엔진을 고쳐봐요. 아까 놈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엔진 하나로도 어느 정도는 항해할 수 있을거라고 하더군요”

“알았어요. 조심하세요!”

“당신도요.”

외부 해치 쪽에서 두 사람은 갈라져 헤인스는 유인선 쪽으로 다가갔고 로즈는 반대쪽에 있는, 아직도 작은 불꽃을 일으키고 있는 패키지 쉽의 엔진 쪽으로 다가갔다.

헤인스가 천천히 세 악당의 숨통을 조이러 가는 동안 크린트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다른 두 명은 해치를 열 방법을 찾고 있었다.

“크린트씨, 저 해치, 패키지 쉽 쪽에서 잠겨 있어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겠는데요.”

“......”

앤튼의 물음에도 크린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뭔가 대답을 기다리던 앤튼이 다시 한번 크린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뭔가 생각난 듯 크린트는 입을 열었다.

“저쪽에서 열게 하는 방법 밖에 없겠지.”

“그게 무슨?”

후안이 묻자 크린트의 얼굴에 검은 미소가 비쳤다.

“저 놈들이 가진 공기를 없애 버리면 되잖아. 저 팩키지쉽의 공기 조절 장치는 컨테이너 아래 부분에 있거든. 우리가 유인선의 외부 해치를 열고 나가서 공기 공급 레버에 장난만 조금 쳐도 놈들 스스로 해치를 열게 될거야. 우주복에 있는 공기는 4시간 정도 분량일테고 4시간 뒤에는 놈들이 스스로 문을 열게 되는 거지.”

크린트의 설명을 듣고 있던 두 녀석이 역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후안! 자네가 나가서 처리하고 오라고.”

크린트의 명령에 후안은 헤인스의 우주복을 입고는 유인선의 외부 해치 쪽으로 다가갔다. 그 때 헤인스는 이미 유인선 아래의 레이져 발사대 쪽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가장 허술한 강화 유리판 한 장을 제거하고 레이저 발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공기 공급 장치의 작동 에너지와 레이저 발사 장치의 작동 에너지가 레이저 발사실 바로 위에서 공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외부에서 레이저 실로 들어가 에너지 조절 패널의 수종 조절 스위치를 누르고는 새 고리 하나를 꺼내 레이저 발사기에 걸고는 잠시 그대로 멈췄다. 그의 생각대로 라면 아까 크린트와 약속한 20분이 지날 즈음에는 유인선 안의 사람들은 죽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설령 모두 죽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두 명은 죽을 것이 분명했다. 헤인스는 손목의 컨트롤 버튼을 눌러 작업복의 헬멧에 현재 시간과 작업복에 남은 공기 상황을 뜨게 하고는 잠시 그렇게 유인선 안의 혼란을 기다렸다.

그 즈음, 유인선 안에 남아있던 자들은 지금까지 계속 그들의 귀에 들리던 소리 하나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존재하고 있던 작은 소음 하나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것이었다. 유인선 안에 남아있던 크린트와 앤튼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먼저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아챈 것은 크린트였다. 그는 상황판에 나타난 반짝이는 붉은색 글씨를 얼른 읽고는 좌석 밑의 비상용 공기 마스크를 꺼내 쓰며 말했다.

“공기 발생장치에 이상이 생겼나 본데. 너도 얼른 저쪽 밑에서 마스크를 찾아서 써!”

크린트의 말에 앤튼이 서둘러 창가 아래의 마스크를 꺼냈다. 하지만 그가 막 쓰려고 할 때 크린트의 총구가 앤튼의 머리에 닿았다.

“잠깐! 내 것이 고장나서 말이야.”

그 말과 동시에 앤튼의 손에서 마스크를 빼앗자 크린트의 방향에서는 보이지 않는 앤튼의 오른손에서 언제 꺼냈는지 칼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리고 크린트가 마스크를 쓰려는 순간, 앤튼의 몸이 돌면서 크린트의 목 쪽으로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 거리가 모자랐는지 크린트는 곧바로 쓰러지지 않고 뒤로 몸을 빼며 목을 움켜 쥐었다. 그리고 앤튼의 가슴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총탄은 그대로 앤튼의 가슴을 관통해서 반대편의 컨트롤 패널에 맞았고 그게 중력 유지 장치에 영향을 일으켰는지 크린트의 몸이 둥실 하고 떠올랐다. 그리고 쓰러지던 앤튼의 가슴에서 솟구치던 피는 순간 몽실몽실 뭉친 핏방울이 되어 유인선 안에 퍼졌다.

“젠장!”

크린트가 한 손으로 마스크를 잡고 총을 쥔 손으로 앤튼의 시체를 밀쳐내며 컨트롤 패널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고장이 심해서 고쳐볼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크린트는 얼른 후안에게 연락을 취했다.

“후안! 놈들이 유인선을 건드린 것 같아. 이쪽의 공기 장치가 고장이야!”

“걱정 말아요. 이쪽에서 여자를 찾았으니까. 여자를 처리하고 남자도 처리하죠.”

후안의 말에 크린트가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건드리지 말고 남자나 처리해!”

“……그러죠. 알겠습니다.”

갑작스럽게 크린트가 소리치자 후안이 주눅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이저 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헤인스가 움직인 것은 그 때였다.

‘이쯤이면 됐겠지? 슬슬 로즈에게 가봐야겠군.’

헤인스가 시간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하고는 막 레이저 발사실을 나오려는 순간 뭔가 자신을 잡아 당기던 것이 픽하고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유인선 쪽에 걸어 놓았던 후크 연결선이 앞 쪽에서 힘없이 풀려 나오는 것이 보였고 그 뒤로 낮익은 작업복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자신의 작업복을 입고 있는 후안이었다.

“이런!”

갑작스런 등장에 놀란 헤인스의 눈에 후안에게 칼이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헤인스는 자신의 작업복에 있는 훅을 떼어내고 다시 레이저 발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다시 공기 발생장치의 에너지 스위치를 다시 켜고 레이저 발사기로 다가갔다. 헤인스는 레이저 발사기의 충전 상태 창을 확인하고 레이저의 출력을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는 영역까지 끌어 올렸다. 실제로 어느 전함에서 떼어내어 재활용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 레이저 발사기를 공격용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앞쪽으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후안을 향해 레이저 발사기를 돌리자 후안의 움직임이 일순 멈추었다. 하지만 그런 후안과는 달리 헤인스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몇 개의 스위치를 조작하고 수동발사를 위해 발사 스위치를 누를 순간이 되었을 때 헤인스는 망설였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 그 자신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죽여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드는 동안 후안은 몸을 피하지 않고 레이져 발사실에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후안이 레이저 발사실에 5미터까지 다다랐을 때 로즈의 목소리가 헬멧을 울렸다.

“조심해요!”

로즈의 말이 마치 발사신호가 된 것처럼 헤인스는 레이저를 발사했고 붉은색 레이저는 그대로 후안의 배를 관통했다. 결정을 내리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일단 행동으로 옮기고 나자 붉은색 레이저와 함께 복잡한 생각들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레이저를 쏘고 나서 헤인스는 자신이 비명소리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배에 커다란 구멍난 채 우주 공간에 떠 있는 후안의 처참한 상태와는 달리 우주는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레이저를 발사하고 잠시 멈추어있던 헤인스에게 다시 로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패키지 쉽으로 돌아오세요.”

헤인스는 다시 공기 발생 장치의 에너지 스위치를 끄고 천천히 후안의 시체에 다가가 그의 등 뒤에 연결된 후크를 떼어내 자신의 작업복에 걸고는 조심스럽게 팩키지 쉽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다 잠시 무슨 생각이 났는지 멈추더니 유인선과 팩키지쉽이 도킹된 부분을 향해 방향을 돌렸다.

엔진수리를 서둘러 마치고 팩키지쉽으로 돌아온 로즈는 유인선 안에 떠다니는 앤튼의 시체를 발견하고 유인선을 향해 몇 번인가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유인선 쪽에 있던 사람들이 다 질식해서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헤인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도킹실로 다가가 해치를 열고 유인선 쪽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해치를 연 순간 쉬익하고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가 유인선 쪽으로 다가가는 동안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그녀가 안으로 다가가며 무중력상태에 익숙해져 벽의 손잡이를 잡고 재빠른 움직임으로 유인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마스크를 쓰고 있는 크린트가 그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패키지 쉽으로 돌아온 헤인스는 로즈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찾다가 도킹실 문이 열린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서 손을 들고 걸어 나오는 로즈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뭔가를 눈치챈 헤인스가 도킹실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로즈가 패키지 쉽으로 들어오고 뒤이어 누군가의 총을 든 손이 보이자 잽싸게 낚아채 총을 든 손을 움켜잡았다. 동시에 로즈가 몸을 돌려 세 사람이 엉켜 붙었다. 로즈가 심장 대신 크린트의 손을 물어뜯자 그의 입에서 으악 하는 비명소리 같은 게 새어나오면서 손에 들려 있던 총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더니 공기의 흐름을 타고 유인선의 복도 쪽으로 빨려갔다. 그리고 동시에 헤인스의 발이 크린트의 명치를 차올리자 크헉 하는 소리와 함께 도킹실 복도 쪽으로 크린트가 나가 떨어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로즈가 팩키지쉽의 도킹해치를 잠그자 도킹 해치의 창문으로 크린트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지만 이 쪽에는 들리지 않았다.

“.......”

로즈가 아무 말없이 헤인스를 바라보자 헤인스가 헉헉거리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죠.”

“예.”

두 사람은 천천히 패키지 쉽의 조종실 쪽으로 향했다.

“저 도킹 락은 어떻게 하죠? 그게 풀리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데……”

로즈의 물음에 헤인스는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다가 로즈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걱정 마요. 혹시나 해서 그것까지 처리하는 바람에 늦으니까. 우리 쪽에서 신호를 보내면 주 도킹 락은 풀릴 거에요. 보조락은 약해서 수송선이 움직이면 아마 큰 손상 없이 부서질테고요. 어차피 다시는 도킹 할 일은 없을 테니까.”

헤인스의 말에 로즈가 아무 말 없이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팩키지쉽의 선체가 움직이는 동안 보조 도킹락이 부서지는 소리가 쿵 쿠쿵하고 선내에 울렸다. 퍽 하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울리고 패키지 쉽이 자유롭게 선회하자 로즈는 방향을 Funhouse 쪽으로 맞추고 헤인스에게 말했다.

“저 크린트라는 자는 어떻게 될까요?”

“아마 죽겠죠? 보조 마스크의 공기도 오래 지속되진 않을테고 남아있는 음식도 얼마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것에 문제가 없다고 해도 저 곳에 적응하지 못 한다면 오래 살지 못할 거에요.”

헤인스의 말에 로즈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헤인스에게 이야기했다.

“당신이 있는 줄 알고 수송선이 음식이나 물을 보내주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시크릿가든의 항로들이 우르크스인들에게 막혔다고 하니까 아마 얼마 동안 이 항로는 사용되지 않을 거에요.”

“그럼 당신이 있었다고 해도 그냥 그대로 놔두었을 거라는 말인가요?”

“아마도요.”

헤인스의 말에 로즈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약간의 분노가 섞인 로즈의 물음에 헤인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전 인간이 아니거든요. 합성인간이에요. 죽은 사람들의 기억을 이식해서 만들어낸…...”

“예?”

로즈가 놀라 헤인스를 바라보자 헤인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로즈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인간들은 이런 곳에 같은 인간을 보낼 정도로 잔인하지는 않아요”

헤인스의 말에 로즈는 잠시 부끄러운 표정으로 헤인스를 바라보았다. 인간을 보낼 정도로 잔인하지 않다. 역설적인 헤인스의 말이 로즈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잠시 아무 말도 오가지 않다가 로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뭘 할 거죠?”

로즈의 질문에 유인선에 있었던 때처럼 조종실 창 밖을 바라보며 별을 세고 있던 헤인스가 꿈에서라도 깨어난 듯 멍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2년이 넘게 메인터넌스 데이 (Maintenance Day)에 참여하지 못했어요. 그러니 제일 먼저 메인터넌스 센터(Maintenance Center)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FunHouse로 향하는 패키지 쉽의 뒤로 남겨진 크린트의 비명소리가 울리고 있다는 것을 이제 막 악몽에서 빠져 나온 두 사람은 알 수 없었다. 팩키지 쉽과 유인선 사이의 공간에는 지독한 어둠과 정적이 흐를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갈증과 배고픔 그리고 시크릿 가든과의 연락 두절로 절망에 빠진 크린트가 결국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는 사실도 두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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