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클럽

도망치는 남자 본문

단편습작

도망치는 남자

달부장 2005. 1. 28. 18:34
반응형

네다섯 평 남짓한 여관방 바닥에는 컵라면이 입을 반 쯤 벌리고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었다. 남자는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아직도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를 연신 뒤로 넘기며 반쯤 열린 컵라면 종이를 완전히 뜯어내고는 나무젓가락을 들이 밀었다. TV는 켜져 있었지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아져 있었고 후루룩하는 소리가 더 크게 방 안에 울렸다.

연신 젓가락을 움직여 대던 남자가 컵라면 용기를 들어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나무젓가락을 용기 속에 던지듯 집어넣고는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물 내려가는 소리를 꼬리처럼 늘어뜨리고 방으로 나온 남자는 TV 맞은편 벽에 기대어 앉아 리모컨을 들어 소리를 높였다. 14, 15 볼륨 버튼에 맞춰 올라가던 숫자가 18 정도에서 멈추자 남자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듯 옆에 깔린 이불 위로 리모컨을 휙 집어 던졌다. 

TV 소리를 켜긴 했지만 사실 남자는 TV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보고는 있지만 입력시키고 있지 않다는 편이 맞을까? 눈도 TV를 향하고 귀 역시 TV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여자 앵커의 목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아무런 이미지나 작용이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덩하게 남자는 그렇게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사실 그는 소리에 굉장히 민감해서 같이 TV를 보는 사람은 답답할 정도로 볼륨을 줄이고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소리를 높이고 TV 앞에 앉아 있는 것은 단지 흘러나오는 소리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피어나는 사고들을 꾹 누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TV를 켜고 그 앞에 앉아 있는 것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TV가 품어내는 빛과 소리들로 안개너머 웅크리고 있는 혼자라는 불안을 억누르고 싶었다. 나이를 웬만큼 먹었지만 혼자라는 사실은 쉽게 익숙해지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더욱 더 익숙해지기 힘든 것이었다.

“이제야 실감이 나는 군.”

십여 분 움직임 없이 누워 있던 남자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남자는 시선을 TV에서 여관 한 쪽 벽에 붙은 거울로 옮겼다. 용도가 수상쩍은, 벽을 따라 낮게 붙어 있는 긴 거울에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귀 밑의 희끗한 머리, 어느새 이마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주름 그리고 끝이 떨어진 눈썹 이제 마흔 다섯인데 거울 속의 얼굴은 이미 쉰을 넘어서고 있었다. 배는 나오지 않았지만 확실히 늙은 것을 그는 실감하고 있었다. 이렇게 거울 속의 자신을 자세히 바라본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확실히 매일 아침 그는 거울 앞에 섰었지만 그 때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때는 분명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목적 없이 바라본 거울에서 발견한 그는 자신을 새삼 발견한 것이 반갑지 않은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실패한 인생이군!”

남자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머릿속에 떠올린 표정과 거울의 표정은 달랐다. 빙긋 웃는다고 웃었지만 그 표정은 웃는 다기 보다는 내키지 않는 상대에게 지치(舐痔)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자신이라는 것을 실감 할 수 없는 낯선 표정이었다. 아내 앞에서의 자신의 표정은 어땠을까? 아마 바로 지금 낯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거울 속의 표정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혼 하자고 말하는 아내 앞에서나 집을 나서는 자신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던 딸 앞에서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담담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아니 실감하지 못했다. 냉정한 아내의 얼굴에 어쩌면 그가 최면에 걸린 것인지도 몰랐다. 그 싸늘한 눈빛에 빠져 그녀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였을 것이다. 아니면 심장의 한 쪽에 작은 구멍이 뚫려 패닉에 빠져버렸는지도…….

마치 지금까지 다른 사람과 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내는 낯설었다. 그렇다고 그가 이혼 할 만 한 잘못 같은 것을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가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딱 이것이다 할 만한 이혼 사유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인지 남자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퇴근하고 돌아온 자신의 쟈켓을 받아주며 

“우리 이혼해요”

라고 말하는 그녀의 차가운 얼굴에 그는 이유를 묻기보다는 도망치고 싶었다. 아니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남자는 아내의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느릿한 움직임으로 넥타이를 푼 채 침대에 걸터앉아 아내의 화장대 거울을 바라보았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회색 양복 재킷을 받아든 채 대답을 채근하는 선생님 마냥 아내는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

남자는 결국 그렇게 대답했다. 이유도 묻지 않고 큰소리도 내지 않고 심지어는 방 안에 있을 딸에게 한마디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 집은 아내에게 넘겨주고 딸 역시 아내가 맡기로 했다. 그 집에 필요 없는 것은 남자뿐이었던 것일까. 그는 분리 쓰레기를 내다 놓듯 그렇게 버려졌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은 도망쳤을 뿐 이라고 아내와 딸의 차가운 얼굴로부터 도망쳤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 이후 이 여관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회사에선 아직 그가 이혼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언젠가는 말해야겠지 하고 남자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이 나이에 집에서 쫓겨난 아저씨 이야기를 누가 제대로 들어주겠어.”

다 잃고, 다 허물어진 인생의 말을…….

남자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아까 사 가지고 들어온 캔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보는 것만으로 시원해지는 듯한 맥주를 들이키고는 남자는 TV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런데 그 때 뭔가 다른 소리가 TV소리에 섞여 있는 것을 느꼈다.

‘옆 방 투숙객이 내는 소리인가?’

사실 여관에서 묵는 동안 한 번도 옆방으로부터 넘어오는 소리 같은 것은 들어보질 못했다. 그래서 방음이 잘 되어 있나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벽을 타고 넘어오는 것을 보면 꽤 격렬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TV 소리를 높여 옆방에서 넘어오는 소리를 묻어 버리고는 일어서서 전등을 끄고 누웠다. 하지만 옆방의 음란한 소리들은 TV 불빛만으로 밝혀진 어두운 방 때문인지 묘한 집중을 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잠시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빙긋 웃어 버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아내가 자신과 의 잠자리에서 저런 소리를 낸 적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 적은 없었군.’

남자는 엎드려 TV를 잠시 바라보다 결국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썼다. 하지만 옆방의 소리는 들려왔다. 아내와의 기억 때문인지 더욱더 불쾌하고 잠을 달아나게 하는 그 소음에 결국 남자는 잠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불을 켜고 벽에 걸린 옷을 주섬주섬 입고는 여관에서 도망쳐 버렸다.

여관 앞 거리는 열 시를 넘겼는데도 사람이 많았다. 술 취한 젊은 남자, 젊은 연인들 그리고 잔뜩 멋을 낸 아가씨 속에서 자신은 여느 때처럼 홀로 서 있었다.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바람대신 사람 소리만 불어대는 시끄러운 산책을 시작했다. TV를 보던 때처럼 굳은 머리를 하고선 사람들 사이를 부유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공원에 가 볼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목적지 따위에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도망쳐 나온 것뿐이었다. 그들이 쾌락의 나락에서 기어 올라올 때까지 시간만 보내면 될 뿐이었다. 불쾌하고 시끄러운 비명을 피해 더 시끄럽고 불쾌한 곳으로 산책을 나와 버린 것뿐이었다.

꽤 오랫동안 걷던 그가 멈추어 선 것은 차로 너머 자신의 딸을 발견 했을 때 였다. 사실 그 소녀가 자신의 딸이 맞는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멈추어 서서 소녀의 모습을 쫒았다. 그러다 소녀가 지하도로 모습을 감추고 난 뒤에야 주머니를 뒤져 휴대전화를 꺼냈다. 하지만 꺼냈을 뿐 그는 전화를 하진 않았다. 그의 핸드폰에 딸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을 잊어버려 새로 샀다는 이야기만 아내를 통해 들었을 뿐 그 뒤로 전화번호를 물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뛰어가 볼까?’

남자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그만 두자고 생각했다. 딸이 이 늦은 시간에 거리를 헤매고 다닐 리 없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닐 거야 잘못 본거겠지’

하지만 남자의 발걸음은 횡단보도 쪽을 향하고 있었다. 뛰지는 않았지만 빠른 걸음으로 남자는 소녀의 뒤를 쫒아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소녀의 모습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데 플랫폼으로 지하철이 들어왔다. 그리고 지하철 문이 열리는 그 순간 남자는 딸인 듯한 소녀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꽤 가까웠지만 아직도 단정 지을 수 없었기에 남자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했지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지하철문이 닫히려는 순간 남자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출발할 때 남자는 잠시 중심을 잃었다 옆의 쇠기둥을 잡고는 몸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며 소녀를 찾았다.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닌데 소녀의 모습은 눈에 띄질 않는다. 하지만 마침내 한쪽 끝, 이어폰을 낀 청년 옆에 서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남자는 노인의 심장처럼 박동하는 지하철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소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 …….

남자가 소녀에게 다가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찰라 소녀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소녀도 남자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남자는 소녀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 버린 듯 가만히 멈추었다. 자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도 깡그리 잊은 채 그는 그렇게 서 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소녀는 그런 남자의 얼굴을 이상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소녀가 고개를 돌리고 난 뒤 남자는 소녀의 어깨에 올리려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는 몸을 돌려 문쪽으로 움직였다. 

역시 아니었다.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이 비슷하긴 했지만 아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지하철 문 쪽으로 돌아오는 남자의 움직임은 처음의 그것과는 달리 긴장이 사라져 있었다. 문 옆으로 돌아와 기둥을 잡고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아파보이기 라도 했는지 옆 좌석에 앉아 있던 검은색 양복의 청년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지만 남자는 괜찮다는 듯 억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작게 흔들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지하철 노선 표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이유로 올라타긴 했지만 그래도 열차는 그의 옛집 근처로 가고 있었다. 

‘집에 가볼까?’

남자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지만 받는 사람이 없다. 신호가 다섯 번 울렸을때 남자는 전화를 끊고 다시 한번 걸었다. 새로 신호가 울린다고 해서 받는 다는 보장은 없지만 남자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기다렸다. 자기 집에 간다고 전화를 해야 하는 자신의 모양이 조금 처량했지만 그보다는 늦은 시간에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더욱 그의 마음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다 어디 간 거지?’

남자는 두 번째 건 전화 신호가 5번을 넘어서자 끊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때 지하철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그의 옆을 지나 문 밖으로 사라지고 나자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이자 남자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보니 맞은편에 그가 딸로 착각했던 소녀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지하철이 다시 박동하기 시작하고 남자는 눈을 감은채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도 없는 집을 향하는 자신이 이상했지만 왠지 아무도 없는 집의 현관문이라도 보고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긴 누군가 집에 있었더라도 현관문만 보고 돌아왔을지 모르지만......

지하철의 박동이 몇 번인가 멈추고 난뒤 남자가 눈을 떴을 때는 언제 내렸는지 앞에 앉아 있던 소녀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의 안내 방송을 자장가 삼아 잠이라도 들었는지 잠시 눈을 감은 것 같은데 어느새 다음 역에서 내려야 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익숙한 길을 걸으며 남자는 꽤 긴 산책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곧장 자신의 집으로 가지는 않았다. 멀리서 아파트 창에 불이 켜져 있는지를 확인하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조금 전에 전화 했었는데 아무도 받지 않더구나. 지금 근처에 있는데 잠깐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전화를 받은 그의 딸은 오랜 만의 전화였지만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단지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마지막에 그러세요! 한마디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딸의 그 목소리 때문에 남자는 엘리베이터에 오른 순간에도 돌아갈지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을 보러 왔다고 말하긴 했지만 딸의 얼굴을 마주볼 자신이 그에게는 없었다. 어쨌든 딸을 이혼가정의 자녀로 만들어버린데는 자신도 한 몫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결국 예전 집 문 앞에서 그를 뱉어내버렸다.

남자가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 안쪽에서 작은 소음이 울리더니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그래...”

전화기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변함이 없었다. 일정한 톤의 그 목소리는 어쩌면 아내에게 물려받았을 거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문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벌써 자신의 집에서 낯설음을 느꼈다. 자신의 존재만 사라졌을 뿐 분명 달라진 것이 없는 풍경이었지만 어쩐지 낯설었다. 그 낯섦 때문인지 남자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는데 딸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엄마는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응...그래...”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어색하게 현관 부근에 서있던 남자는 멈칫거리다 다시 몸을 돌려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얼굴 봤으니 이제 가마.”

“왜 오셨어요?”

“어?”

딸아이의 물음에 남자는 굳은 듯 멈추어 섰다. 분명 들었지만 아무런 말도 답할 수 없었기에 남자는 그렇게 서 있을 뿐, 그 뿐 이었다. 

“아! 그래 네 새 전화번호 좀 알려 다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던 남자가 문득 떠올리고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휴대폰을 꺼대 들었다. 하지만 딸은 소파에 앉은 채 남자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물어 보러 오신 거예요!”

딸의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남자 얼굴의 어색한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알고 계셨어요. 엄마한테 다른 남자 있었다는 거, 그래서 그렇게 쉽게 이혼 하신 거예요!”

따지듯 딸은 남자의 초라한 어깨 뒤에 비수를 꽂듯 그렇게 쏟아냈다. 딸의 말에 남자는 발을 돌려 딸 옆에 풀썩 하고 주저앉아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길게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엄마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이혼한 것도 아니다.”

“그럼 왜요! 왜!”

딸의 비명소리 같은 물음에 남자는 딸의 손을 잡았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어. 이혼하자고 말하는 네 엄마의 말이..... 너무나 차가워서 같이 산 시간을 깨부수는 것 같았어.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냥 도망쳐버린 거야.”

“하지만 그건 도망친 게 아니라 끝내버린 거잖아요. 비겁하게 문제 따위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땅에 파묻고 모든 걸 부정해 버린 거잖아요.”

딸의 말을 듣고 있던 남자가 다시 그 어색한 웃음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 말이 맞구나.”

남자는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이내 일어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저는요. 저는 두 분사이의 일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건가요? 왜 저한테는......”

현관문을 나서는 남자의 등 뒤에 딸이 이렇게 소리쳤다. 

“미안하구나.”

남자는 겨우 딸을 쳐다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더 이상 딸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011-9456-???? 이에요!”

막 문을 나서려는 남자의 등 뒤에 대고 딸이 전화번호를 불러주자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 입력하고는 문을 나서며 말했다.

“아빠가 전화 하마.”

딸아이가 했던 말들이 귓가에 계속 울리는 것 같아 남자는 오른 손을 들어 한 쪽 귀를 막아보았다. 모두 맞는 말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 더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머릿속을 가득 메울 뿐 이었다.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딸의 말이 머리를 휘저어 놓자 남자는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양쪽 귀를 막았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냥 그는 텅 빈 엘리베이터 안에서 미친 사람처럼 고개 숙인 채 그를 쫓는 수많은 질문과 고민들을 떨쳐 버리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 다 변명일 뿐이다. 모두 변명일 뿐이야. 도망칠 수밖에 없어서 도망친 게 아니니까.’

남자는 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서자  빠른 걸음으로 단지를 빠져나가 택시를 잡아 탔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XX동 가주십시오”

“예”

택시가 출발할 때도 남자의 한 쪽 손은 그의 오른 쪽 귀를 막고 있었다. 밤이 깊어 한가해져서인지 택시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여관 주변에 도착하자 남자는 택시미터기를 흘깃 쳐다보고는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기사에게 내밀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지?”

택시에서 내려 여관으로 걸어가던 남자는 여관이 있는 골목 쪽에서 붉은 불빛이 번쩍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싸움이 잦은 곳이니 경찰차라도 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여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뭔가 다른 것 같았다. 단순한 싸움이 아닌 모양이었다. 서너 대의 경찰차에 응급차 까지 와 있고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뭔가 큰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여관에서 사람이 죽었다는데......”

여관 쪽으로 걸어가던 남자에게 모여 있던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관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말에 남자는 혹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이런......!”

혹시 했는데 역시나 였다.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 앞에 출입 금지 라는 푯말이 붙은 줄이 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 경찰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건 처리가 끝날 때까지 들어가서 자기는 글렀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여관 문으로 피해자의 시체가 실려 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로 형사인 듯한 남자 둘이 여관 주인과 함께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남자 쪽에 들려 왔다.

“그 옆방에 투숙하고 있던 남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아까 나갔습니다. 어디 멀리 가는 차림은 아니었는데......”

“혹 들어오면 저희 쪽으로 연락 주시겠습니까. 형식상이긴 하지만 조사는 해야 하니까요. 범인이 자수 했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 때 시체를 덮고 있던 천 한쪽 끝이 차 모서리에 걸려 죽은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

그 시체의 얼굴을 바라보고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내 질렀다. 눈을 뜬 채 속옷 차림으로 죽어있는 여자의 얼굴... 잠시 뿐이었지만 남자는 분명히 알아보았다. 남자가 취한 듯 자신을 막고 있는 줄을 넘어 시체를 향해 다가가는데 여관 주인이 그를 가리키며 형사에게 말했다.

“저 남자인데요... 저 죽은 여자 옆 방에 묵고 있는 사람이...”

여관 주인의 말에 형사 한명이 느린 걸음으로 남자에게 다가가 시체쪽으로 가려다 제지 당한 남자에게 말했다.

“저 살인 사건 때문에 조사를......”

하지만 남자의 귀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시체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고자 하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남자의 행동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형사가 남자를 막고 있는 경찰의 어깨를 두드렸다. 방해가 사라지자 남자가 시체로 다가가 얼굴을 덮고 있는 천을 끌어내리고 죽은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형사가 남자에게 이렇게 물었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여자의 얼굴을 그렇게 바라볼 뿐 이었다. 

‘ 옆방에 있었다고?... 그게 나였다고?... ’

그 때 남자의 전화가 울렸다. 하지만 남자는 전화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여자의 얼굴만 바라볼 뿐 이었다. 참다못한 형사가 남자에게 전화를 받으라고 말하려 하는데 남자가 기계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귀에 가져갔다.

“아빠! 지금 어디세요...엄마가 돌아가셨데요...”

형사에게도 들릴 만큼 큰 소리가 전화기에서 울렸다. 하지만 남자는 그 소리도 듣지 못한 듯 아무런 대답 없이 전화를 끊고는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더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잡는 형사의 손을 뿌리치고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봐 저 사람 잡아!”

남자의 등뒤로 형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남자는 달렸다. 뭔가로부터 도망치듯...그렇게 달렸다. 하지만 그의 도망은 길지 못했다. 몇 십 미터 가지 않아 그를 쫓던 형사의 손에 잡히고 만 것이었다.

“왜 도망치시는 겁니까!”

형사의 물음에 남자는 거친 숨만 내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웅켜 잡으며 탄식처럼 소리쳤다.

“하아...하... 도망치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으니까...하아... 내 머릿속의 종양으로부터....그리고 그녀로부터....아니 현실로부터....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뿐이니까....”

형사는 남자의 알 수 없는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형사에게 잡힌 남자는 경찰차에 올라타서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도망칠 수밖에......”

-----------------------------------------------------------------------

2003.12.24 일 포스팅

뇌종양 판정을 받은 중년 남자와 다른 남자가 생긴 아내 그리고 딸의 이야기입니다.

대화가 단절된 가족 안에서 그에게 닥친 현실로 부터 도망칠 수 밖에 없는 남자에 대해 써보려고 했습니다만 뒷부분에서 조금 이상하게 흘러버렸습니다. (마무리 짓기 위해 억지수를 둔 듯한 느낌이죠)

제목은 카와지리 요시아키의 단편 애니메이션 "달리는 남자"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반응형

'단편습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마스  (0) 2005.02.01
은하 끝의 등대  (0) 2005.02.01
쓰던 물건을 완벽하게 버리는 방법  (2) 2005.01.27
전화번호  (0) 2005.01.27
A씨가 왜 옥상에 올라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0) 2005.01.26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