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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습작

전화번호

달부장 2005. 1. 27.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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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가 끝난 다음날이라설까? 책상에 앉아 있는 게 전보다 더 지루하게 느껴졌다. 뭐 새해가 된다는 것이 나의 일상에 끼치는 일이라고 해봤자 몇 년간 사용해 오던 다이어리의 연락처란을 정리하고 메모 페이지를 다 떼어내고 새 것으로 갈아 넣는 것 정도의 일뿐이었다. 새해 인사라는 명목으로 낯선 이름들 옆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어보는 일이 연휴 내내 계속 되다 보면 어느 틈엔가는 이 번호가 도대체 누구의 번호인지, 어디서 적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 때가 있다. 물론 나의 이런 어설픈 기억력을 대신하기 위해 전화번호 옆에 꼭 누구인지 하는 - 예를 들자면 고교 동창, 대학교 후배라는 식의 - 간단한 설명을 적어 넣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적어 놓지 않은 연락처가 매년 몇 개씩 어디선가 꼭 튀어나온다.

금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번호 세 개가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두개의 전화번호 앞에는 사람이름이 적혀있어서 그나마 나았지만 하나는 성명 란은 비어있고 전화번호와 설명만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그런데 그 설명이란 것이 매우 특이했다.

078-8810-7710 (꼭 필요할 때만 연락할 것)

꼭 필요할 때만 연락하라니…….거기다 글씨체나 사용한 펜을 보니 분명 내가 쓴 것은 아니었다. 다이어리의 연락처란을 볼펜이나 기타 수정할 수 없는 펜으로 쓰다보면 매우 지저분해져서 나는 웬만하면 샤프펜슬이나 연필같이 지울 수 있는 필기구로 연락처를 적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전화번호는 사인펜으로 마치 이 번호를 잊지 말라는 것인지 꼭 전화를 걸어달라는 것인지 연필로 쓰인 여러 개의 전화번호 중에서 눈에 띄게 툭 튀어나와 있었다.

뭐 이런 누군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전화번호야 그냥 지워 버려도 되겠지만, 혹 나중에 앗 하고 그 이름이 생각나게 되면 낭패 일뿐 아니라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내 성격에 그냥 지워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이름은 비어 있고 번호만 사인펜으로 적혀있는 전화번호가 나의 궁금증을 더욱 자극했다. 사적인 내용이 많이 적혀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거나 맡기지 않는데 어째서 다른 사람의 필적으로 전화번호가 적혀 있을까?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직접 전화를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먼저 이름이 적혀 있는 두개의 전화번호에 먼저 전화를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누구를 먼저 걸어 볼까. 김 선태라고 적혀 있는 번호에 먼저 걸어 볼까 박 상기라고 적혀 있는 번호를 먼저 걸어 볼까.

나는 펜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생각하다가 김 선태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011-897-9876 이라.’

번호를 누르자 조금 이어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신호가 끝나고 세 번째 신호가 울리려는 순간 저쪽에서 수화기를 든 것 같았다.

“여보세요. 아 김 선태 씨 핸드폰 입니까. 아 저는 안 기수라고 합니다만……. 아... 아 ! 선태 구나……. 무슨 일은 새해도 되고 해서 인사나 할까 하고 연락한거지. 잘 지내지…….”

짧게 통화를 끝내고 나서 나는 피식하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전화를 걸기 전엔 상당히 망설였는데 일단 전화를 하고 나니 저쪽에서 내 목소리와 이름을 듣고 먼저 안녕하세요! 선배님 하고 인사를 한 것이었다. 얼굴은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확실히 생각나지 않았지만 선배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후배인 것은 확실한 것 같고 나중에 동창 녀석들을 만나면 김 선태라는 후배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고등학교 후배인지 대학교 후배인지는 알게 될테니 그 뒤는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후배라는 것만 알면 됐지…….그러고 보니 내가 직접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것보다는 친구들에게 먼저 물어보는 게 나을 듯싶기도 했다. 이런 생각이 좀더 빨리 들었으면 좋았을걸 친구들에게 이미 새해 인사차 전화를 다 한뒤에 생각이 났으니 , 다시 전화를 걸어 물어보기도 참 애매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에구...”

나는 샤프펜슬로 가볍게 머리를 때리고는 김 선태의 전화 번호 옆에 (후배 - ?) 라고 적어 넣었다.

‘이제 박 상기라는 사람의 전화번호만 남아 있나’

박 상기라는 이름 옆의 전화번호는 어딘가의 집 전화 번호 같았다. 나는 전화번호를 누르고 수화기를 왼쪽 어깨를 잡은 채 다이어리를 넘겨 다음에 걸 전화번호가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네 번째 신호가 가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아 사람이 없나 하고 생각하는 도중에 저쪽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박 상기씨 댁입니까?”

나는 상대편의 여보세요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다이어리속의 이름을 불렀다.

“예……. 맞습니다만 누구신지요?”

상대 쪽은 여자였다. 목소리로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30대 후반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목소리였다.

“예 저는 안 기수라고 합니다만 박 상기씨 계신지요?”

“안 기수 씨라고요. 실례지만 저희 남편이랑은 어떤 관계신지요?”

에!  -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머뭇거렸다. 내 생각으로는 남편이랑 어떤 관계인지 물어보는 게 흔치 않은 일이어서 그에 대한 대답은 생각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 그게...”

꽤 망설이다가 나온 말이란게 고작 “아 그게......” 였다. 이거 솔직히 말해야 하나? 그냥 후배라고 둘러 댈까? 나는 잠시 더 머뭇거리다가 그만 후배라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대학교 후배 입니다.”

“아 예……. 대학교 후배 안 기수 씨라고요 . 지금 남편이 안 계신데 어쩌죠?”

저 쪽에서는 펜으로 내 이름이라도 적어두는지 대답 중간 중간 말소리가 떨렸다.

“아 그래요?”

남편이 없으면 없다고 빨리 말할 것이지 관계까지 물어보는 걸보니 이 부인 심한 의부증이라도 가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전화번호를 알려주시면 나중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상하게 지금까지의 목소리와는 달리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상대편에서 들려 왔다. 왜 일까 하는 궁금증은 생겼지만 나는 바로 내 핸드폰 전화번호를 불러줬다.

“017-456-7890 입니다. 적으셨습니까. 들어오시면 안 기수에게 전화 왔었다고 전해 주십시오!”

“예... 그러지요”

전화를 끊고 나서 왠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후배라고 하고 전화번호를 남긴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후배라고 하고 남겼는데 알고 보니 동생 친구 였다거나 하면 웃기는 일 아닌가. 하지만 뭐 그때에는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겠지. 나는 이내 체념하고는 이제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전화번호를 누르려고 했다. 그 때였다. 의자에 걸쳐 놓은 재킷 안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지?”

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받으며 말했다..

“예 안 기수입니다”

“......”

“안 기수입니다 . 누구십니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몇 번을 불러 봤지만 상대편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고 잠시 후에 끊기고 말았다.

“뭐야!”

이런 전화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잘못 건 전화라면 잘못 걸었다고 말할 것이지 아무런 말도 없이 끊어 버리다니…….이럴 줄 알았으면 발신자 표시 서비스라도 신청해 두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안주머니에 넣고 다이어리로 눈을 돌렸다.

' 꼭 필요할 때 만이라……. 어딘지 모를 때가 가장 필요할 때겠지…….‘

나는 전화번호를 누르고는 뭐라고 해야 할까 하고 신호가 가는 동안 생각했다.

“예 안 기수씨 무슨 일이십니까..”

“예?”

신호가 끝나자마자 상대편에서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어떻게 안거지, 뭐 저 쪽은 발신자 확인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아……. 예 거기가 뭐 하는 곳입니까?”

“예?”

내 물음에 상대방도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내 예상 밖이었다.

“안 기수씨 이런 식이라면 곤란합니다.”

“뭐라고요?”

뭐가 곤란하다는 것인가? 난 단지 왜 이 전화번호가 내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인데, 상대방의 말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희 쪽으로는 다시 전화 하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저희가 먼저 전화 드린다고 분명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 그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전화 하면 안 된다고. 통화를 하면 할수록 상대방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전화로 이러지 마시고 저희 쪽으로 오시죠. 전화로 이야기하기 힘든 일이라는 것은 안 기수씨도 잘 아실 테고……. 그러니 저희 쪽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예? 전 단지……. ”

내가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으나 상대 쪽에서 내 말을 자르고 튀어 나왔다.

“장소를 옮겼습니다. 대림 빌딩 3층 504호 입니다. 오늘 오후 3시에 와주시길 바랍니다. 그때 이야기 하죠”

알 수 없는 전화번호의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뭔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져서 수화기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뭐야! 이거”

나는 다시 한번 그 쪽으로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 두고는 대림 빌딩 3층 504호라는 그쪽 주소를 연필로 적어 다이어리에 적어 넣었다. 그 쪽에서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오후 3시라 퇴근 시간 전이지만 오후의 지루함을 날릴 재미있는 일이 될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잠시 거래처에 다녀온다고 하고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오후 2시 즈음 나는 회사에서 출발해서 2시 40분 즈음해서 8층짜리 빌딩에 다다랐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빌딩이어서 사람들이 바삐 지나다니는 밖의 풍경과는 대조적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올라가 몇 개의 간판들을 확인하다 504호라고 적혀 있는 사무실 문 앞에 다다랐다. 

“똑똑똑”

가볍게 노크를 한 뒤에 안으로 들어서자 처음 보는 중년의 남자가 약간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창가에 있는 책상에서 일어났다.

“조금 빨리 오셨군요. 저쪽에 앉으시죠!”

‘뭐야 이남자 내 얼굴도 알고 있는 건가’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내 얼굴을 알고 있다니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파에 앉았다. 남자는 책상에서 걸어 나와 내가 앉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담배를 하나 꺼내 물더니 쓰고 있는 안경 너머로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했다.

“분명 일은 끝났을 텐데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검은색 비즈니스 슈트에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3자를 그리며 벗겨진 머리와 굳게 다문 입 홀쭉하게 들어간 볼이 남자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거기에 크지만 날카로운 눈이 매섭게 빛나고 있어 한가락 하게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사실은...”

나는 남자의 인상에 조금 주눅이 들어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제 다이어리에서 이곳 전화번호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당신도 이곳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고 있고요”

“예?”

상대편의 남자는 내 말에 매우 놀란 것 같았다. 아니 믿겨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 표정은 비웃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장난치시는 겁니까. 그러신다고 해봤자 저희나 당신에게나 아무런 이익도 없을 텐데요. 저희 쪽에서는 충분한 보수를 드렸고 계약은 끝났습니다.”

보수?.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내가 돈을 받고 뭔가를 한 모양인데 ... 아니다 내겐 그런 기억이 없었다. 나는 약간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장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상대편의 남자는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훗 하고 짧은 웃음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금 왜 여기 오신지도 모르고 저도 모르신다는 말씀이시군요.”

나는 상대의 물음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상대방도 알아챘는지 눈빛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의 입가의 비웃는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더욱 잘됐군요. 여기 오신 일도 저도 잊어버리시는 편이 가장 좋은 겁니다. 저희가 바라고 있는 일이기도 하구요. 뭐 처음부터 당신과의 계약에도 들어 있는 조항이니까요.”

“계약이라고요? 아까부터 보수니 계약이니 하는데 도대체 무슨 계약입니까.”

“괜한 말을 했군요? 방금 한말 잊어주십시요."

"저 제가 온 이유는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저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왜 당신 사무실의 전화번호가 제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 온 겁니다. 그런데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시는군요. “

어느새 나는 흥분해 있었다. 저 남자가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것에 대해 약이 올랐던 건지 , 그의 비웃는 듯한 입가의 미소가 내 비위를 건드린건지 알수 없었다. 내 목소리가 흥분해서 커지자 남자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 졌다.

“알고 있습니다. 안기수씨를 저희가 어떻게 아는지 알고 싶어서 오신 거 아닙니까. 그에 대한 제 대답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시는 게 가장 좋은 일이란 말입니다. 그럼 이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나는 결국 억지로 끌어내다시피 하는 남자 때문에 사무실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밖으로 나와 나는 어이가 없어 한참을 그렇게 사무실 밖에 서 있다가 다이어리를 펼치고는 (꼭 필요할 때만 연락할 것.) 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을 사인펜으로 시커멓게 지워버렸다. 의문도 남지 않도록 완벽하게.

그리고는 퇴근 시간 전에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렀다. 퇴근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남겨 놓고 회사에 도착해서도 나는 한참 동안 뭔가에 홀린 것 같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때였다.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내 뒤에 다가와 뭔가를 꺼내 내 눈앞에 내밀며 말했다.

“강력계 이 수완 형사 입니다. 안 기수 씨 맞으시죠?”

남자가 내 눈앞에 들이민 것은 신분증이었다. 도대체 신분증을 확인하라는 건지 너무 눈앞에 가까이 가져다 대서 확실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으로 그것이 경찰 신분증이란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예 맞습니다만”

“잠시 따라가 주셔야겠습니다.”

“예?, 무슨 일인데 그러시죠?”

내 물음에 자신을 이 수완이라고 말한 남자는 내 귀에 입을 가까이 대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남자의 갑작스런 행동에 멈칫하다가 그의 의도를 눈치 채고는 그대로 있었다.

“사무실에서보다 경찰서에서 말씀드리는 게 나을 거 같군요. 안기수씨를 위해서라도,”

“예?”

나를 위해서 경찰서에서 이야기 하자니. 내가 뭐 큰 범죄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퇴근 시간을 앞두고 경찰서에 끌려간다는 게 맘에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나는 두 남자를 따라 경찰서로 따라갔다. 내가 그 두 사람을 따라가자 회사 동료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대체 오늘은 완전히 뭔가 홀린 날 이구만’

두 남자는 나를 자동차에 태우고 경찰서까지 가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경찰서에 도착해서 취조실이라는데 나를 데려다 놓더니 밖으로 나갔다. 영화에서나 보던 취조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책상하나에 외등만 하나 켜져 있고 벽에는 밖에서만 보이는 유리가 끼워져 있는 방은 아니었다. 책상위에는 타자기 대신 노트북 컴퓨터가 한대 놓여 있고 밝은 형광등에 쇠창살이 쳐져 있긴 하지만 창문도 있어서 매우 밝은 방이었다. 또 벽쪽의 조그만 탁자위에는 커피메이커가 놓여져 있었다. 잠시 방안을 둘러 보니 머리위에는 감시 카메라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대신에 감시 카메라 인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데 문이 열리며 이 수완 형사가 안으로 서류철을 들고 들어 왔다. 그는 책상위에 사뿐히 서류철을 내려 놓고 커피 메이커에서 커피를 한잔 따라 내 앞에 밀며 자리에 앉았다.

“안 기수씨 여기 왜 오셨는지 알고 계시죠?”

내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서류철을 뒤적이던 그가 잠시후 입을 열었다.

“예?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박 상기씨 아시죠?”

날카로운 그의 목소리가 지금까지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예?”

박 상기란 이름이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박 상기...누구지 아 그래 아까 내가 전화 걸었던 그 남자군.. 그런데 왜... 

“아. 알고는 있지만 ... 그게 사실은”

나는 내가 어떻게 박 상기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지 말하려고 했지만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 수완이란 형사가 내말을 가로 막았다.

“ 그분 살해당했습니다. 벌써 5개월이나 지난 사건입니다. 목격자도 있었고 몽타주로 만들어 뿌렸지만 결국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본 얼굴 만으로 살인자를 잡기에는 매우 힘들었죠! 하지만 그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이 이렇게 해결 될지는 몰랐군요.”

“그게 무슨 소리죠?”

나는 도대체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까 전화 하셨죠? 박 상기 씨 댁에. 왜 그러셨습니까?”

“예?”

내가 전화를 한 것과 박상기라는 사람이 죽은 것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나를 부른 것이란 말인가?

“박 상기 씨는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의 자수성가한 사업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에게 대학 후배라고 전화가 왔으니 부인이 매우 수상해 하셨죠. 거기다 사건 전날 남편이 듣고 나간 목소리와 어딘가 비슷하다고 생각하셨답니다.”

뭐야 그것 때문인가 내가 대학교 후배라고 했기 때문에. 그제야 내가 경찰서 까지 오게 된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내가 대학교 후배라고 한 이유를 말했다.

“그게 아니라 제가 대학 후배라고 한건…….”

내가 이유를 말하려고 했지만 이 수완이란 형사는 내말을 들어주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부인께서는 상대방이 불러준 확인해 보셨는데 알려준 전화번호에 걸어서 나온 목소리를 다시 듣고 확신 하셨답니다. 그리고 경찰에 전화하셨죠.”

나는 경찰의 말을 듣고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이 사람들 나를 살인자로 몰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전화 번호 정리하다가 건 전화 한 통화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아닙니다. 박 상기란 사람과 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단지... 저는...”

“그렇다면 작년 7월 23일 어디에 계셨습니까?”

“예!”

아니 어떻게 작년 7월 23일에 어디에 있는지 기억한다는 말인가 . 형사의 물음에 나는 흥분해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어떻게 작년 7월에 23일에 일어난 일을 기억합니까?”

흥분한 내 목소리가 취소실안을 울렸다. 하지만 이 수완이란 남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나를 올려 보며 말했다.

“사람을 죽이고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대단한 냉혈한이군! 당신이란 사람.”

“뭐라구?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난 남자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 그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그가 순간 내민 종이를 보고는 놀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내민 것은 몽타주 였다. 내 모습과 너무 똑같은 그 모습에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당신이 봐도 놀랍지. 벌써 저 카메라로 그 때 목격자가 확인했어. 거기다 자네 회사에다 알아봤더니 작년 7월 20일부터 5일간 휴가였더군. 23일을 기억하지 못하니 작년 휴가 때 무슨 일을 했는지 물어볼까?”

몽타주를 보고 놀란 나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얗게 바랜 머릿속으로 작년 휴가를 떠올리면서...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작년 휴가 때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작년 휴가 ... 작년 휴가때 무슨 일을 했지?’

머릿속을 쥐어짰지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내 생각을 막으려는 듯 두통이 나를 괴롭혔다.

“기억나지 않나? 작년 휴가 때 무슨 일을 했는지 ……. 내가 말해 줄까. 박 상기 씨를 전화로 밖으로 불러내 공원으로 데리고 가서 칼로 찔렀어. 가슴에 한번 배에 두 번 . 그렇게 세 번 찌르고는 도망쳤어. 근처에 있던 목격자가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말이지.”

“아니야 . 나는 그런적 없어!”

형사의 말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쳤다. 뭔가 내가 작년 휴가때 뭘했는지 말해야 하는데 작년 휴가 때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지 내가 작년 휴가때 무슨 일을 했는지 증언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잘 생각해 보라구. 안 기수 씨...”

이 수완이란 남자는 손아귀에 내 모든 것을 잡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비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뭐지. 왜... 기억이 나지 않지...?”

그 때 핸드폰이 울렸다. 이런 때 무슨 전화야! 나는 절망과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금 전화를 받을수가....아니....”

그 남자 였다. 사무실에서 나를 만난 남자. 그의 목소리였다.

“당신 결국 잡혔더군...”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당신은 알고 있지.....그런거지?”

절규 같은 내 목소리가 고요한 취조실안에 퍼졌다.

“물론 ... 이렇게 됐으니 말해줄 수밖에 없군. 그냥 조용히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뭐?”

“당신이 죽였어. 박 상기란 남자. 우리에게 돈을 받고. 기억나지 않겠지.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들킬 것 같으니까. 사람을 죽여 그 돈으로 메우려고 한거지. 이제 기억나나?”

“뭐라구? 아니야 난 죽이지 않았어.”

“나도 신기해 아까 당신이 들어왔을 때 아무 것도 기억 못한다고 하는 당신 말은 사실 같았거든. 어떻게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하지만 당신이 죽였어. 그래서 우리가 돈을 줬고. 술에 취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당신의 다이어리에 그 전화번호를 적은 게 나였어. 알겠나. 안됐군. 조용히 끝날 수 있었는데....그럼 ....”

“이봐 이봐…….”

나는 끊긴 전화기를 잡고 몇 번이고 소리쳤지만 헛일이었다.

‘내가 정말 죽인건가...아니냐.. 난 아무 일도 기억나지 않는걸 ... 내가 횡령을 했다고...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아냐... 그럴 리가 없어...말해야 해 . 아까 그 검은 양복을 입은 그놈이 죽이고 누명을 씌우는 걸 꺼야. 그놈이 범인 이라고 말해야 해’


안 기수란 남자가 절망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동안 취조실 밖에서는 아까 안기수를 찾아갔던 이 수완 이란 남자와 다른 한명의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자식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척 하고 있어.”

“그거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이 수완은 남자의 말에 들쳐보던 서류철을 덮으며 말했다.

“그건 무슨 소리야?”

“방금 조사한건데 저 남자 작년 8월 초에 교통사고로 1달 반 정도 입원했었어요. 다른 데는 이상 없는데 두부에 심한 충격이 있었답니다. 저 남자는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의사 소견에 일시적 기억상실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멀쩡하게 회사까지 다니는 놈이 기억상실이라고.”

남자의 말에 이 수완 형사는 웃기지 말라는 듯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남자의 가슴에 내 던지듯 내밀고는 말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계좌나 확인해봐 . 저놈이 죽인 것은 확실한데 동기가 없으니까. 돈 쪽으로 확인해 봐야지.”

“이 형사님. 허튼 소리가 아닙니다. 저 사람이 박 상기란 남자를 죽인 때의 기억만 없어졌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까!”

남자의 말에 이 수완이 한참동안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저 남자가 죽인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박 상기란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아. 그 사실을 기억 못하는 건 오히려 저 남자에겐 불행스러운 일이지...”

두 형사가 밖에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취조실 쪽에서는 안 기수란 남자의 절규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난 기억나지 않아... 아니야, ... 난 ....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단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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