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모형
- 리뷰
- 야마하
- Unboxing
- Miura
- 람보르기니
- 제작기
- 자동차
- honda
- 미우라
- 하세가와
- 오토바이
- 프라모델
- lamborghini
- yamaha
- 잡식성의프라탑
- 혼다
- bandai
- 취미
- 1/24
- NSR250
- 타미야
- tamiya
- 완성
- 건프라
- Hasegawa
- 건담
- 반다이
- scalemodel
- 1/12
- Today
- Total
절망클럽
벽장 안의 검객 본문
벽장 안의 검객
풀벌레 소리로 소란스러운 녹음 가득한 산 길에 창이나 칼 따위를 제멋대로 짊어진 일련의 무리가 나타났다. 뭔가를 찾는 듯 했지만 설렁설렁 주위를 둘러보거나 바닥의 나뭇가지와 돌멩이를 툭툭 걷어차며 움직이는 모습은 기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이 산허리로 사라지자 길 옆 비탈에 쌓여 있던 낙엽더미 속에서 한 남자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가 말라붙어 얼굴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입고 있는 갑주를 보아 일개 졸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무리가 사라진 방향을 살펴보고는 조심스레 산 아래로 움직였다. 허벅지에 박혀있던 화살은 꺾어내 반 토막이 나 있었지만, 옆구리의 화살은 온전한 상태였고 어깨에도 창에 찔린 상처가 있어서 남자의 움직임은 둔하고 엉성했다.
가파른 산 기슭을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내려가던 남자는 주변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는 귀를 쫑긋 세웠다. 피를 꽤 흘린 탓에 갈증이 심했고, 한 여름 무더위에 갑주와 검까지 차고 있는 바람에 몸이 온통 땀에 절어 있었다. 그 땀 때문에 말라 붙어 있던 피가 끈적여 물에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주위를 둘러보다 머지 않은 곳에서 산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실개천을 발견한 남자는 그 쪽으로 몸을 옮겼다. 먼저 목을 축인 뒤, 개천 옆 풀 숲에 몸을 숨기고 찢어낸 옷 조각에 물을 묻혀 피와 땀을 닦아내고는 뒤로 몸을 눕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는가?’
피를 닦아내자 서른 네댓 정도로 보이는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각진 턱 선과 날카로운 눈초리 그리고 턱과 입 주변에 자란 수염은 흡사 귀신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남자는 황제에 반하여 난을 일으킨 양하성 태수 주정안의 장수로 성은 감, 이름은 희문이었다. 수세에 몰려 곤경에 빠진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며칠 전 야습을 나섰다가 매복에 당해 부하를 모두 잃고 산 속으로 도망쳐 숨어있는 참이었다.
희문은 얼굴을 마저 닦고 천 조각에 다시 물을 묻혀 목에 두른 뒤,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화살을 살펴보았다. 더 쉬이 움직이기 위해선 이것을 끊어내야 했지만 허벅지에 박혔던 화살과 달리 살짝 건드려도 통증이 극심해서 그것이 쉽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화살을 건드린 순간, 앞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희문은 숨소리를 죽이고, 몸을 낮추어 숨긴 채 기척이 난 방향을 살펴보았다.
나뭇짐 같은 것을 등에 짊어진 청년 하나가 냇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등에 졌던 것을 내려놓고 냇가에서 팔뚝을 씻던 청년의 행동이 일순 정지했다. 풀 잎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청년이 핏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기려는 것과 동시에, 희문이 튀어나와 검을 청년의 목에 들이댔다.
“움직이지 마라.”
희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청년의 움직임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겁에 질린 청년의 목소리에 희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실상 희문 자신도 어찌해야 할 지 몰랐다. 이 청년을 죽이고 자리를 떠나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살려 보내야 할지 양 갈래 길에서 고심했다. 청년의 목에 검을 댄 채 두 사람이 정지해 있는 사이, 풀 숲에서 메뚜기 한 마리가 날아 칼 등 위에 내려 앉았다. 희문은 잠시 머뭇거리다 칼 등에 내려 앉은 송장 메뚜기를 떨어내 듯 검을 거두었다.
“나를 보았단 소리를 입 밖에 내었다간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검을 거두고 괜한 협박으로 겁을 준 뒤 몸을 돌렸다. 그 때, 옆구리의 화살이 수풀 사이 낮게 올라온 밤나무 가지에 걸렸다. 순간, 희문은 옆구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말의 숨이 거칠었다. 희문은 허벅지의 화살을 꺾어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흥분 때문인지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보다 자신도 모르게 너무 깊이 들어와 있었다. 야습을 감행한 것은 자신의 독단적인 결정이었기 때문에 혹여 실수라도 있을 때에는 목을 내놓아야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이 예상하고 매복해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서둘러 병사들을 물렸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군율로 처벌받아 목이 떨어지는 것이나, 이대로 뚫고 가다 죽는 것이나 죽는 것은 매 한가지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사이 창이 어깨에 박혔다. 몸을 돌려 창을 잡고 실랑이 하다 중심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지며 통증에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어느 새 화창한 가을 풀 밭에 누워 있었다. 저 멀리 들꽃을 꺾어 든 연하의 모습이 보이고, 그 옆에 도장 동문인 유세강의 모습도 보였다. 희문이 이제 그녀가 이제 세강의 아내가 되었음을 떠올리는 순간, 눈 앞에 스승의 모습이 나타났다. 엄한 표정의 스승의 얼굴이 그가 마지막으로 벤 적병의 굳은 얼굴과 겹쳤다.
“어째섭니까?”
스승 앞에 무릎 꿇은 희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 딸 자식은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제게 은월류 비검을 전수하신 겁니까?”
스승의 대답이 갑작스런 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어둠 속에서 나타난 무리에 둘러싸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 멀리 본진에 불이 치솟는 것이 보인 것도 그 때였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희문이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언제 다가왔는지 옆에 서 있던 유세강이 그 너그러운, 희문이 그토록 싫어했던 얼굴로 말했다.
“아니야. 이제 시작이다.”
도장을 떠날 때 했던 세강의 말이 스산한 어둠 속에서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희문이 다시 눈을 뜬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꿈에 시달린 때문인지, 몸의 상처 때문인지 손가락 들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 자신이 낯선 방 안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아 챈 희문이 흠칫 놀라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다 통증을 느끼고 신음을 흘렸다.
“여기는 대체……”
희문이 자신의 검을 찾으며 생각을 더듬는 사이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더 누워계시는 게 좋을 텐데……”
아까 냇가에서 보았던 청년이 말 끝을 흐리며 희문 옆에 와 앉았다.
“어째서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거냐?”
“온 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을 어떻게 그냥 놔두고 오겠어요.”
희문은 청년의 말에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청년의 말이 거짓 같진 않지만 그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신세를 졌지만, 날 못 본 척해야 할 거야.”
희문이 이렇게 말하고 이를 악문 채 몸을 일으켜 한 쪽에 놓인 갑주며 검을 끌어당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청년이 그의 손을 막으며 말했다.
“이대로 나가면 우리 집 울타리도 넘기 전에 쓰러질 거에요. 몸은 좀 추스르고 가세요.”
청년의 만류에 희문이 이내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산 속을 헤매던 때의 긴장이 조금 가신 탓인지 몸이 방바닥에 늘어 붙는 것 같았다.
“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의문에 물음에 청년이 가지고 들어온 멀건 죽을 희문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런걸 어찌 알아요? 그냥 전쟁에 나섰던 사람 같아 보인다는 것하고, 다친 사람이라는 것 밖엔 몰라요.”
청년의 겁 먹은 표정을 보며 희문이 몸을 일으킨 뒤, 죽 그릇에 담긴 숟가락을 집어 입에 가져갔다. 씁쓸하고 거칠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통증을 참으며 죽을 비우는 사이 청년이 말했다.
“다리하고 옆구리의 화살을 제가 뽑았는데, 일어나시질 않아서 이대로 죽나 싶었어요.”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희문의 물음에 청년이 손가락으로 셈해보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마을에 땔감 팔러 가려던 날이니 사흘 째에요.”
“그래… 그렇구나.”
희문이 죽 그릇을 비우고 팔꿈치로 움직여 벽에 상체를 기댔다. 저 청년의 단순한 호의인지 아니면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상황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산골 청년이 다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집으로 데리고 온 것으로 볼 수 있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근처에서 커다란 전투가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그 상대가 노인도 아닌 청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희문이 자신의 검이 세워져 있는 곳을 살폈다. 손이 닿기엔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희문의 속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청년이 일어나 갑주와 검을 희문의 옆으로 옮겨 놓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청년이 나가자 희문이 검을 당겨 손에 쥐고는 뽑아 보았다. 전쟁터의 흔적이 그래도 남아 있는 검을 손봐두고 싶었지만 이내 다시 집어 넣고는 원래 있던 자리에 세워놓았다. 지금 자신이 있는 집의 위치는 잘 모르지만 전에 보았던 패잔병 토벌대가 돌아와 이 주변을 다시 수색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몸이 나으면 서둘러 이 집을 떠나겠다고 마을 먹었지만, 실상 그가 갈 곳이 남아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돌아가도 처벌 받을 것이 분명했지만 도망칠 때 보았던 본진의 불길로 보아선 그 때의 전투에서 아군이 크게 피해를 입어 그나마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 지 고민이 되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간만의 포만감과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희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청년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깨우고 있었다.
“숨어야 돼요. 산 쪽에서 횃불이 다가오는 것을 봤어요.”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는 벽장을 열어 검과 갑주를 집어 넣고 희문도 안에 들어가도록 한 뒤에 이불을 개어 희문과 검이 보이지 않도록 가려 놓고는 벽장 문을 닫았다. 눅눅하고 고린 냄새가 나는 벽장 안에 몸을 웅크린 채 숨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벽장 문 너머로 작게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이 주변에서 혹시 수상한 자를 보지 못했나?”
볼 수는 없었으나 토벌대가 돌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사람은 못 보았는데요.”
청년의 목소리가 지나가고 나서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 안에 들어온 기척이 느껴졌다. 희문이 벽장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쥐 한 마리가 가슴께로 내려왔다. 천천히 손을 뻗어 쥐를 움켜 잡은 순간 벽 쪽에 붙어있던 검을 건드렸는지 쓰러지며 작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밖에 있는 자가 듣지 않았을까 걱정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벽장 문이 벌컥 열렸다.
“네 놈 혼자 사나?”
“네! 그런데 왜 그러세요?”
청년의 물음에 대답 대신 창이 이불 사이로 찔러 들어왔다. 다행히 창이 이불에 걸려 희문에게 닿지는 않았으나 혹 이불을 걷어 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이 때, 희문이 손에 힘을 주어 쥐를 움켜잡아 이불 위로 올려놓자 찍찍 소리를 내며 벽장 밖으로 도망쳤다. 갑작스레 나타난 쥐에 벽장을 살피던 놈이 놀랐는지 작게 헉 하고 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벽장 문이 닫혔다. 그리고는 나가는 기척과 함께 밖이 조용해졌다. 어두움과 정적 속에서 희문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크게 두근거렸다.
잠시 후, 청년이 벽장 문을 열었다.
“그 놈들 갔으니 이제 나오세요.”
이불을 치우며 청년이 말하자, 벽장 안에서 숨 죽이고 있던 희문이 땀 범벅이 돼서 밖으로 나와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귀찮은 짓을 하는 구나. 그냥 여기 있다고 해도 됐을 텐데.”
“저 놈들 소문이 안 좋은 놈들이에요. 멀쩡한 사람도 패잔병으로 몰아 끌고 간다는 소문도 있어요. 아까 혼자 사냐고 물었을 때도 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야 했는데 제가 깜빡 해서…… 아마 여기 숨겨준 걸 알았으면 분명히 저도 같이 끌고 가려고 했을 걸요.”
희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청년의 호의를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성격이 서글퍼지면서도,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저 청년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 이름도 묻지 않았구나?”
“이조윤이에요.”
“조윤이라.”
희문은 낮게 이름을 되뇌고는 말했다.
“나는 감희문이다. 상황이 좋지 않아 다른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내 너의 호의를 언젠가 꼭 보답하마.”
“뭘요. 어서 쉬세요. 저도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심심했는데 말 상대가 생겨서 좋은데요. 참! 놈들 얘기를 들으니 이번에 내려가서 다른 산으로 갈 모양이에요.”
“그래?”
희문은 이렇게 답하고는 다행이라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으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고작이었다.
희문이 조윤의 집에 숨어 지낸 지 열흘이 지났다. 그 사이 허벅지와 어깨의 통증은 많이 가셨지만, 옆구리의 통증은 그대로였다. 그래도 거동하는 것은 수월해져 일어서거나 걷는 것도 가능한 상태가 되었지만 밖에 나서기엔 부족해 방에 있는 일이 많았다. 또한 조윤이 집을 비운 사이 혹시라도 토벌대가 다시 이 쪽 산으로 돌아와 들이닥칠지도 몰라서 낮에는 벽장 안에 들어가 있곤 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조윤이 돌아오면 그에게 마을에서 들은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희문이 도망친 뒤, 양하성 군사들이 대패하고 성주도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섞여 있었다. 마을에서 소문으로 들은 것을 전하는 것이라 확실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희문이 걱정했던 대로 끈 떨어진 연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었다. 고향에 남겨둔 가족이 없으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에 크게 미련은 남지 않았으나 그래도 돌아갈 곳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처벌을 감수하고 본대에 합류하거나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 지 걱정해야 했다.
희문이 자신의 처지를 고민하는 사이 조윤이 먹을 것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삶은 감자가 한 가득 들어있는 바가지를 바닥에 내려놓은 조윤은 언제나처럼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일들을 들어놓기 시작했다. 혼자 산중에 지내다 희문과 함께 지내게 되니 말이 많아졌다고 조윤 스스로도 말하곤 했다. 그가 이야기한 내용 중에는 자신에 대한 것도 있었는데, 들어보니 벼슬을 하던 그의 아버지가 당쟁에 휘말려 죽고 난 뒤, 할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산 속에 숨어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조윤이라는 이름이 시골 청년의 이름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희문은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조윤의 할아버지는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당쟁에 휘말려 죽은 아들 때문이었을까 손자를 그저 세상사에 관심 없는 평범한 촌부로 키우고 싶었던지 마을에 내려가는 것도 막고, 약초 캐고 농사 짓는 일만을 가르친 것 같았다. 그런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산에서 땔감이나 약초를 캐어 마을에 내려가 팔거나, 마을에서 일을 거들어 품삯을 받아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오늘은 마을에서 일을 도와주고 감자를 삯으로 받은 모양이었다. 희문에게 감자를 건네며 오늘 낮에 들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던 조윤이 잠시 말을 끊었다. 뭔가 다른 이야기가 있어 뜸을 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얼마 지나 감자 하나를 집어 들더니 말했다.
“근데 오늘은 촌장 집 딸이 일을 도우러 나왔더라구요.”
뜬금없는 말에 희문이 슬쩍 조윤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낮의 일이라도 떠올리는지 멍한 눈 빛의 조윤을 보고는 희문이 어찌된 일인지 눈치를 채고는, 픽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지금껏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지?”
“멀리서 몇 번 보긴 했는데, 산 아래로 일 도우러 다닌 지 얼마 안돼서요.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주로 약초만 캐고, 팔러 가시기도 할아버지께서 직접 가셔서……”
“아, 그랬군!”
희문이 맞장구를 쳐주자 조윤이 신난 듯, 오늘 본 촌장 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기를 보고 웃었다느니, 허리가 잘록하다느니 하는 조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희문이 감자를 내려 놓고 뒤로 물러 앉으며 물었다.
“그래, 말은 걸어봤나?”
“그게 촌장 어른도 같이 있어서요.”
“그럼 그냥 본 것뿐인데 그렇게 신이 나서 떠드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니고……”
조윤이 입을 다물자 희문이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첫 눈에 반하기라도 한 모양이군.”
“아니에요!”
금새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희문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잊어버려라.”
“네?”
잊으라는 희문의 말에 조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너 하는 꼴을 보니 혼자 끙끙댈 것이 안쓰러워 하는 소리다.”
조윤은 희문이 하는 소리에 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희문이 조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촌장 딸이 산 속에 혼자 사는 가난하고 외로운 청년에게 동정심을 보인 것 때문에 그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로 그럴 것이 처음 조윤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것이지만 멀쩡한 허우대에 비해 더벅머리에 볕에 타 시커먼 얼굴이 여자들에겐 별로 매력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윤은 잊어버리라는 희문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슬쩍 고개를 들어 희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저 검 쓰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조윤의 말에 순간, 희문의 눈이 번쩍였다. 그것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기도 했고, 검을 배우겠다는 조윤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자신도 모르게 희문의 목청이 높아졌다.
“세상도 어지럽고…... 자기 몸은 지킬 수 있어야…… .”
“그런 이유라면 검은 배우지 않아도 된다.”
조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문이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와 분위기에 기가 눌렸는지 조윤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아주 당치 않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산골 청년에게 검은 괜한 위험만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희문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능하지 못했다.
‘내 검과 갑주 때문일까?’
아마 희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윤이 검을 배우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화가 끊어진 조용한 방 안에선 감자 먹는 소리만 가끔 들렸다.
그날 밤, 자고 있던 희문이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자리에 누워 있어야 할 조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한 희문은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조윤이 자신의 검을 들고 달빛 아래 비쳐보며 휘둘러 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어째서 저 아이가 검을 배우고 싶어하는 것일까, 촌장 딸을 보고 와서는 검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 때문인가도 싶었다. 이미 거절한 일임에도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조윤은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희문은 자신의 갑주와 검을 꺼내 정리한 뒤 벽장에 집어넣고, 방에 누워 옆구리의 상처를 살폈다. 많이 아물었지만 통증은 많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그 정도라면 열흘 정도 후에는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떠날 때에는 갑주는 조윤에게 주고 자신은 검만 들고 갈 생각이었다. 물론 갑주를 팔기 쉽지는 않겠지만 팔게 된 다면 그래도 꽤 값어치를 받을 수 있을 물건이라 자신을 도와준 답례로 주려는 것이었다. 검 한 자루만 들고 일단 고향 쪽에 몰래 숨어 들어가 상황을 살필 생각이었지만, 먼저 도장에 들러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장에는 누가 남아있을까. 스승님은 도망가셨고 세강도 도장을 잇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어쩌면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왠지 가보고 싶었다. 자신이 전수 받은 도장의 비검 때문이었지만 이내 스승이 비검을 전수하던 때의 일이 생각나 희문은 눈을 감았다. 아마도 세강과 자신 사이에 끼인 연하를 위해 스승이 그런 결정을 내렸으리라 여겼지만 그 때 들었던 이유는 언제 떠올려도 가슴을 파고드는 비수 같았다. 희문은 낮은 신음소리 같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 날 저녁도 조윤은 촌장 딸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희문은 아무런 대답 없이 듣고 있다가 조윤이 열을 올리는 사이 툭 내뱉듯 말했다.
“그럼 내일은 가서 몰래 만나자고 해봐.”
희문의 말에 조윤이 큰일날 소리를 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큰일나요. 촌장이 몰래 만난 걸 알기라도 하면……”
“그 처녀가 당연히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군.”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조윤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 해보고 만일 그 처녀가 약속한 곳에 나오면 내가 좋은 수를 하나 일러주마. 대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이제 그 처녀는 잊어버려라.”
“안돼요!”
“안되긴, 그럼 맨날 그렇게 그 처녀 이야기만 애먼 나에게 늘어놓다가 끝낼 셈이냐?”
“그래도……”
조윤이 망설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희문이 웃으며 말했다.
“내일도 촌장 집 일을 도와주러 가지? 잊지 말고 내가 시킨 대로 해봐.”
“…….”
조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그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여느 때보다 늦은 것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희문은 짐작할 수 있었다. 풀이 죽은 얼굴로 집에 돌아온 조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얼굴을 보아하니 어떻게 됐는지 뻔하구나.”
희문의 말에 조윤이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을 붉히며 놀란 표정이 되어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만나자고 하지도 않았어요.”
“오호, 그래!”
거짓말 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희문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한 동안의 침묵 뒤에 조윤이 이제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그 패잔병 토벌대 놈들이 산적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안 그래도 요사이 안 보인다 했더니. 원래도 병사라기 보단 이 부근에서 어슬렁거리던 건달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놈 들이 뒷산에 터를 잡았는데 우리 마을로도 내려올까 봐 촌장님이 걱정을 하더라고요.”
“음, 그렇구나.”
희문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토벌대가 사라졌으니 이제 좀 편하게 지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기…… 혹시라도 놈들이 내려오면 저 혼자 사니까……”
“가지고 있는 것 순순히 내주고 시키는 대로 하면 죽이지는 않을 거다.”
희문의 말에 조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그런 놈들한테 빌면서 살란 말씀이세요?”
“빌면서 사는 게 싸우다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냐? 괜스레 혼자 나서 봤자 너만 손해다.”
“싫어요! 벌써 그 놈들이 윗마을에서 난리를 쳤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버러지 같은 놈들한테 빌면서 살고 싶진 않아요.”
조윤이 쉽게 물러서지 않자 희문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러니 검을 가르쳐 달라는 말이지? 그런데 너 같은 녀석이 검을 배우면 그냥 지나칠 일들도 커져.”
“제가 목숨도 구해드렸는데 그 대신이라 생각하고 들어주세요.”
“뭐!”
순진한 줄로만 알았던 조윤이 생명의 은인을 들먹거리자 말문이 막힌 희문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목숨 구해준 값을 내놓으라는 거구나. 그런데 그래도 싫다고 하면 어쩔 셈이냐?”
“관청에 가서 도망친 병사가 집에 숨어있다고 할거에요!”
조윤이 이렇게 소리치고는 자신도 놀랐는지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 모습에 희문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웃었다.
“좋아. 가르쳐 주마. 그러나 난 네 스승이 아니고 넌 내 제자가 아니다. 또 네가 배운 검은 은월류와는 상관이 없다. 알겠느냐?”
“그럼 언제부터 배우나요?”
조윤이 기뻐 얼굴에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희문은 방금 전 협박하던 때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는 순진한 미소를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지금부터다. 그러니 오늘은 저 쪽 문 앞에서 서서 자라.”
“네?”
“자세는 다리를 벌린 기마 자세로, 눈은 내 미간을 노려보면서. 불을 끄더라도 내 미간을 보아야 한다.”
“네……”
왠지 미덥지 않은 표정의 조윤이 방 문 앞에 가 서자 희문은 그 앞에 누워 불을 껐다. 그리곤 아무런 말 없이 밤이 깊어갔다. 새벽녘에 조윤의 신음 소리가 희문을 괴롭혔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희문은 일어나 조윤이 주저 앉아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낮에 일하느라 피곤한 조윤이 새벽까지 버틴 것 만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어릴 적을 떠올렸다. 희문 역시 어릴 때 도장에서 저 훈련을 하며 몇 번이나 주저 앉았는지 몰랐다. 새벽 안개를 바라보던 희문은 마당 한 켠의 작대기를 들고 휘둘러 보았다.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아직 검을 휘두를 정도는 아님을 깨닫고는 다시 방 안에 들어갔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조윤이 자세를 잡고 서 있었다.
“됐다. 날이 밝았으니 그만 하고 앉아라.”
“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희문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은 목검을 만들 나무를 구해 오거라.”
“네. 그런데 정말 검을 가르쳐 주시는 거에요?”
“왜? 이제라도 싫으면 안 배워도 된다.”
“아니에요.”
조윤은 다리를 주무르며 밖으로 나갔고 희문은 눈을 감고 누워 잠을 청했다. 그 역시 조윤을 보며 밤을 새웠기 때문에 자 두어야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이 다 나으면 떠날 생각만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까지 어느 수준까지 조윤을 가르칠 수 있을지 몰랐다.
“끝까지 가르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생명의 은인이란 말과 협박에 가르치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저녁이 되자 조윤은 다시 자리를 잡았고 희문은 조윤이 가져온 나무로 목검을 만들었다.
“내 미간을 계속 노려봐라.”
“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윤이 대답하자 희문이 다 깎은 목검 하나를 조윤에게 던져주어 잡고 있게 했다.
“그런데 이게 검 배우는데 도움이 되나요?”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귀찮은 듯 내뱉고는 다시 다른 목검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른 목검이 또 완성되자 희문은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그는 자지 않고 조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조윤의 눈을 노려보던 희문은 자세가 흐트러질 때 마다 자신의 목검으로 조윤의 목검을 올려 쳤다. 목검이 바닥에 떨어지면 희문의 목검이 조윤의 허벅지에 날아갔다. 그렇게 몇 번, 목검이 떨어진 뒤에는 더 이상 목검을 올려 치지 않았다. 그러다 밤이 깊어 조윤이 밀려오는 졸음에 꾸벅 존 순간, 어느새 뒤로 다가온 희문이 목에 목검을 들이댔다.
“목이 떨어졌다.”
순간 조윤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잠이 달아나 눈을 크게 떴다. 목검이었지만 마치 진짜 칼을 들이댄 듯한 위압감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두 남자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 뒤로도 조윤의 수련은 주로 밤을 이용해 계속되었다. 매우 피곤할 터였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았다. 희문은 조윤의 습득 속도에 놀라고 있었다. 워낙에 체력이 좋아서 인지는 몰라도 검을 쓰는데 필요한 몸을 금방 만들어 가고 있었다. 다만 어둠 속에서 희문의 움직임을 쫓는 것 만은 쉽게 익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 이제 몸은 어느 정도 된 것 같으니 다음을 해보자.”
스무 날이 지났을 무렵 희문은 은월류의 검세들을 가르치고 연습하도록 했다. 그러나 검세를 한 두 번 보여줄 뿐 직접 자세를 잡아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자세를 잡아주고 싶었으나 아직도 희문의 움직임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세를 보여주는 것이 고작이고, 잘못 된 부분을 반복하며 바로 잡아주기는 힘들었다. 다른 상처는 다 아물었으나 옆구리의 통증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밤에 계속하던 수련도 멈추었다. 어설펐지만 열에 서너 번 정도는 희문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계속할 수 있는 수련법을 가르치고는 더 계속하지 않았다.
희문의 마음 속에서는 조윤에게 검을 더 가르쳐야 하는지 하는 고민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자세가 끝나면 대련으로 수련을 계속해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조윤이 자신의 어설픈 검만 믿고 쉽게 검을 뽑으려 할 것 같았고, 반대로 여기서 그만 두게 되면 배우지 않은 것만 못한 상태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결국 희문은 조윤에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때가 아니면 절대 검을 뽑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리고는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데 신경을 써나갔다.
희문이 조윤의 집에 머문 지도 석 달이 넘어 가을이 되었을 즈음 해서는 대련을 하기도 했다. 석 달도 되지 않은 조윤의 실력으로 희문을 이길 수는 없었지만 가끔 날카로운 공격을 하기도 해서 희문이 당황하는 때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검을 배우면서 하지 않던 촌장의 딸 이야기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검을 배우며 자신감이 생겼는지 전처럼 말도 제대로 붙여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희문이 보았을 때는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대련을 마친 어느 오후, 희문이 조윤을 앉혀 놓고 말했다.
“이제 너 혼자 수련하는 일만 남았다. 계속 대련을 해서 실력을 쌓아야겠지만 나도 이젠 떠나야 하니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네? 어디로 가시려고요.”
“일단 고향에 들러 볼 생각이다.”
“네…..”
조윤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느껴졌다.
“내 갑주는 두고 갈 테니 나중에 팔아서 쓰도록 해라. 이제 나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
“언제 가실 거에요?”
“사나흘 뒤에 출발할 생각이다. 아침에 내가 보이지 않거든 떠날 줄 알거라.”
“……”
희문은 이렇게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갔고 조윤은 마당에 멍하니 서있다가 수련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희문이 검을 만지고 있는 사이 마을에 내려갔던 조윤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큰일났어요! 숙영이가 산적에게 끌려갔대요.”
“무슨 소리냐? 숙영이가 누군데?”
“촌장 딸이요.”
“그렇군. 그런데 그게 어쨌단 거냐?”
희문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가서 구해야죠!”
조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문이 그의 뺨을 때렸다.
“네 알량한 실력으로 말이냐?”
갑작스런 희문의 따귀에 할 말을 잊었는지 조윤이 입을 다문 사이 희문이 말했다.
“그 숙영이랑 아이가 네 정혼자라도 되느냐?”
“아뇨…… 하지만!”
“넌 구하러 가고 싶겠지만, 그 많은 놈들을 너 혼자 상대할 수 있단 말이냐?”
“……”
“네게 몇 번이나 일렀다. 네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면 검을 쓰지 말라고.”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갈 거에요. 그 산적 놈들 행패가 얼마나 심한데요. 관에서는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더 심해질 거라고요.”
“뭣이! 이놈이.”
희문이 소리를 질렀지만 조윤은 눈동자도 흩트리지 않았다. 여자 때문이란 말은 쑥 들어가고, 산적의 행패 때문이란 말이 나오자 희문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어설픈 검 실력과 젊은 혈기 탓에 목숨을 버리려 하는 모습에 희문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다. 내가 말려도 네 놈이 갈 것 같으니 내가 몇 가지 더 알려주마.”
“네?”
“네가 살 길을 몇 가지 더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희문은 이렇게 말하고는 목검을 들고 조윤과 마주서서 말했다.
“네게 처음에 검을 가르칠 때 어둠 속에서 내 미간을 보도록 한 것을 기억하느냐?”
“네.”
“어둠에 익숙한 자는 능히 열 명도 상대할 수 있다. 자신의 기척까지 숨길 수 있다면 스물도 상대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어둠이 되면 능히 백도 상대할 수 있다. 그게 은월류다.”
“네!”
“내가 가르친 검은 원래 그런 목적의 것이다. 하지만 너는 수련이 부족해 어둠 속에서 적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야. 그러니 초승달이 뜬 밤에 검은 칠을 하고 놈들의 본거지에 가거라. 그러면 아마 적은 너를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직 초승달이 뜨려면 이틀 정도나 남았는데……”
“그리고 자 지금부터 내 검을 막고 공격해 보아라.”
희문이 조윤의 말을 못 들은 척 검을 잡고 섰다. 그리고는 조윤이 자세를 잡는 것과 동시에 조윤의 바로 코 앞을 스치듯 휘둘러 등을 보였다. 그 틈을 노리고 조윤이 등을 베어 들어오는 찰라, 희문의 몸이 반 바퀴 돌면서 옆으로 움직였고 목검은 조윤의 목에 맞고는 떨어졌다.
“내가 검을 놓지 않았다면 네 목은 떨어졌을 것이다. 이것을 달 그림자 옮기기라고 한다.”
놀란 조윤의 얼굴을 보며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검을 휘둘러 등과 어깨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윤의 옆구리서 목검이 멈추었다.
“달 그림자 옮기기는 크게 반원을 그리며 움직여 목을 노리는 기술이지만 상대에 따라 옆구리나 팔을 노릴 수도 있다. 해보거라.”
희문의 말에 조윤이 따라 하자,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말했다.
“자, 이번에는 공격해 보거라.”
조윤이 이번에는 자세를 가다듬고 마주 서 공격을 시작했다. 상단과 하단으로 이어지는 공격에 뒤로 물러서던 희문이 순간 목검을 날리자 조윤의 이마에 붉은 선이 생겼다. 목검이 닿지 않을 거리라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희문이 검을 잡은 손을 보여주었다.
“엄지, 검지, 중지로만 검을 잡고 쓰는 것이다. 원래는 눈에 비친 반딧불 빛을 보고 벤다고 해서 반딧불 베기라고 하지만 눈 뿐 아니라 상대의 목, 팔목, 이마도 노려 사용할 수 있다. 상대와의 거리를 무너뜨리고 공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벌레를 베듯 가볍고 빠르게 베어야 한다. 해보거라.”
희문은 조윤에게 두 가지 기술을 전해 주고는 말했다.
“지금부터 이 두 가지를 연습하거라. 그리고 이틀 뒤 밤에 가는 거다. 알겠느냐?”
“하지만 그렇게 늦으면……”
“난 네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다 해주었다. 그러니 그 이후는 네 맘대로 하거라. 목숨 귀한 줄 모르는 놈에게 나도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
“알겠습니다.”
조윤이 풀 죽은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희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검도 없이 갈 테냐? 내 갑주를 가지고 마을에 가서 쓸 만한 검도 구해오거라. 장식이 많이 되어 있는 검은 쓸 만한 것이 못 되니 거들떠 보지도 말고, 직접 만져보고 골라오거라.”
“예.”
조윤이 대답하고는 갑주를 들고 산 아래로 사라지자 희문은 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검을 휘둘러 보았다. 다 아물긴 했지만 가끔 통증이 있는 옆구리를 만져보고는 음 하고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한참 지나 마을에 갔던 조윤이 검을 구해오자 희문이 검을 살펴보고는 말했다.
“꽤 쓸만해 보이는 구나. 어디서 구했느냐?”
“마을 노인 하나가 전쟁터에서 검 몇 자루를 주워서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다 장식 붙은 것들뿐인데 요거 하나만 아니더라고요.”
“그래 잘했다. 그럼 이 검으로 아까 가르쳐 준 것을 연습하거라.”
“네.”
“그리고 난 내일 떠날 테니 그리 알아라.”
“네?”
갑작스런 말에 조윤이 놀란 듯 쳐다보았다.
“네 놈 죽는 꼴 보기 싫어서 하루라도 먼저 가려는 것이다. 부디 그 촌장 딸 구해서 잘 살아보거라.”
“그래도 이렇게 떠나시면…….”
“내가 네 놈 죽으러 가는 길 도와주기라도 할 줄 알았느냐? 네 놈 성화에 검까지 가르쳐줬으니 같이 죽어달라는 말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혹 그 처녀가 안 따라오려고 하거든 설득 같은 것 하지 말고 얼른 도망치고.”
“왜 안 따라오겠어요.”
“멍청한 놈! 너 같은 놈과 엮이느니 산적이랑 사는 게 속 편하지 않겠느냐! 하하하.”
희문이 짐짓 소리 내 웃었다. 하지만 조윤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사람을 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명심해라. 베고 난 뒤도 문제지만 지금은 그저 너 사는 것만 생각하거라.”
희문은 이 말을 남기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조윤이 잠든 사이 희문이 검을 들고 방을 나왔다. 산을 내려가 이대로 떠날 생각이었다. 검을 가르치며 정이 들긴 했지만 혼자 죽으러 가겠다는 놈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도 이제 어찌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조윤의 일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내 할 도리는 다했다.”
마당에 서서 방 문을 바라보며 희문은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길을 나섰다. 조윤을 도우려던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윤이 마을에 내려간 사이 검을 써 보았을 때 옆구리에 통증이 있는 것을 느끼고는 마음을 접어버렸다. 괜한 일,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위험을 감수하며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산 길을 따라 마을을 내려가던 희문이 멈춰 섰다. 자신에게 비검을 전수하며 스승이 했던 말이 그의 발걸음을 잡고 있었다.
그 날, 희문은 유세강과 연하가 만나는 장면을 보고 도장에 돌아와 있었다. 질투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때는 검을 잡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도장 벽의 목검을 물끄러미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 때, 도장 문이 열리며 스승이 들어왔다.
“뭘 하고 있는 거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희문이 이렇게 말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자 스승이 문으로 되돌아가며 말했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으니 따라오거라. 목검도 두 개 가져오고.”
스승의 갑작스런 부름에 희문이 무슨 영문인지 생각하다가 따라 나섰다. 스승이 향한 곳은 도장 뒷 편의 산마루였다. 산 위에 도착하자 스승이 천천히 다가와 희문의 손에 들린 목검을 한 자루 받아 들고는 말했다.
“연하를 세강에게 시집 보낼 생각이다.”
“…….”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 지 알고 있다. 검도 네가 위고, 집안도 네가 낫지. 연하가 너와 세강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던 것도 알고 있다.”
“세강에게 도장을 이어가게 하실 겁니까?”
“그래야겠지. 하지만 꼭 강요할 생각은 없다.”
“…….”
희문은 입을 다물었다. 스승은 잠시 산 아래를 내려다 보더니 말했다.
“연하가 널 택했더라도 난 너에게 도장과 딸을 맡기지는 않았을 거다.”
“어째섭니까?”
스승의 말에 희문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넌 도장에 묶여 있을 놈이 아니다. 네 야망이 이 촌구석에 묶여있을 리가 없지. 난 내 딸이 평온히 살았으면 좋겠다.”
“어째서 그렇게 단언하십니까? 저도 도장을 이어 받아 조용히 살 수 있습니다.”
“그래. 연하 때문에 처음 몇 년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국 너는 가만히 머물러 도장 수련 생이나 가르치고 있진 않을 거야.”
“아닙니다. 저도…….”
희문이 마지막으로 부정해 보았으나 더 말을 잇지는 못했다.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들켜 버린 것 같아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난 네가 더 좋다. 남자로서는 네가 더 마음에 들어. 그래서 너를 이 곳에 가둬둘 수가 없다. 대신 네게 마지막으로 은월류 비검을 전수해 주마.”
“비검은 모두 전수 받지 않았습니까?”
세강과 희문 모두 두 개의 비검은 전수 받았다. 달 그림자 옮기기와 반딧불 베기라는 두 비검을 몇 년이나 수련해 오고 있었다. 희문의 물음에 스승은 목검을 세우고 말했다.
“한 가지가 더 있다. 은월류 수제자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비검이…… 네게 그것을 전수해 주마.”
스승의 말을 희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비검 중의 비검을 전수하겠다는 말 인가. 세강에게 전수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희문의 가슴이 이런 의문들로 뛰기 시작할 때 스승이 말했다.
“넌 어디서든 살아남을 것이다. 세강은 너무 곧기만 해서 쉽게 부러질지도 몰라. 내가 무관이 되지 못하고 도장이나 열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지. 하지만 그래선 은월류는 이름만 남은 껍데기가 될 것이 뻔하다. 도장은 사라지더라도 은월류가 사라지는 것은 안 된다. 그러니 목적을 위해선 어떠한 수단도 마다치 않는 너 같은 이가 이 비검을 물려 받는 것이 나을 것이다. 도장을 이어나갈 네 사형을 모함해 낙향하게 하고 연하를 차지하기 위해 세강에게 함정을 팠던 것도 알고 있다. 이기적이고 음흉하지. 내 평가가 너무 박하다고 생각지는 말아라. 사위로 받아들이긴 힘들지만 무사로서는 너를 택한 것이니.”
스승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세를 잡더니 말했다.
“다만 나중에 내가 죽고 네 마음이 내키거든 세강에게도 네가 가르쳐 주거라. 자! 보거라.”
“내가 어떻게든 살아 남아 공을 세우고 은월류의 이름을 알릴 거라 생각하셨겠지!”
옛 일을 생각하며 멈춰 섰던 희문이 한 걸음 걷더니 다시 멈추어 섰다.
“내가 살아 남기 위해선 다른 사람은 개의치 않는 놈이라는 것이겠지.”
희문은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에게 검을 가르쳤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일인지도 모르지.”
무슨 생각이었을까? 지금껏 가슴에 숨겨 두었던 스승에 대한 반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돌아갈 곳 없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자포자기 같은 심정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희문은 발 길을 돌려 산으로 향했다. 산적 놈들의 위치는 조윤에게 들어 대략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도망쳐서 산적에게 죽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하늘에 계신 스승님께선 내가 이렇게 되리라곤 짐작도 못하셨겠지. 하하하!”
산 길을 타고 올라 산적 소굴에 도착해서 희문은 수풀에 몸을 숨기고 산적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한 가운데 모닥불을 피운 채, 십 수명의 산적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끌려온 여자들은 한 쪽에 묶여 있었다. 세 명의 젊은 처녀들로 겁에 질려 소리도 내지 않고 울고 있었다.
그 때, 한 놈이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이끌려 온 것은 마을 처녀로 보이는 여자였다. 옷 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아 대충 어떤 일을 당했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런데 희문을 놀라게 한 것은 수풀에서 등장한 산적의 정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세강이었다. 고향에 내려갔다고 했던 세강이 흐트러진 머리로 생전 볼 수 없었던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거기 서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
희문은 순간 이 해괴한 재회에 몸을 떨었다. 행색을 보아서는 세강 역시 태수의 편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왜 그와 만나지 못했을까? 그보다 어째서 그가 저 산적 아니 패잔병 토벌대와 어울려 산적질을 하고 있을까? 갖가지 의문들이 희문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 때, 세상이 산적들 사이에 주저 앉더니 말했다.
“이제 네 놈들 차례다.”
그 말에 산적 예닐곱 놈이 왁자지껄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 쪽에 묶여 있던 처녀들을 하나씩 끌고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희문은 세강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수풀로 들어간 산적과 처녀들의 뒤를 따랐다. 여자들의 비명소리를 쫓아간 희문은 여기저기 흩어져 처녀를 겁간하려던 산적들 뒤로 다가가 놈들을 해치웠다. 무기도 들지 않은 상태에다 두세 놈씩 떨어져 있어서 큰 어려움도 없이 처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선 겁 먹은 얼굴로 희문을 보던 처녀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속삭였다.
“누가 촌장 딸이냐? 숙영이라던가?”
그러자 그 중 한 처녀가 입을 열었다.
“저에요.”
얼굴에 흙칠을 한 처녀를 보고 희문이 웃음을 지었다. 겁탈을 피하려고 일부러 얼굴에 흙칠을 한 것 같았다.
“똑똑해 보이는 구나. 너 조윤이라는 녀석을 아느냐?”
처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희문이 말했다.
“그 녀석이 보내서 왔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은 아느냐?”
“네.”
“그래. 그럼 어서 다른 처녀들과 함께 내려가거라.”
마을 처녀들이 사라지고 나자 산 적 두 놈이 수풀 속에 들어왔다가 희문에게 목을 베어 쓰러졌다. 뭉쳐서 한꺼번에 공격하지 않는다면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녀석들 이었다. 두 놈을 처리하고 남아 있는 것이 세강과 산적 두어 명이란 것을 떠올린 희문이 모닥불 쪽으로 걸어 나갔다.
“세강!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거냐?”
갑작스런 등장에 놀랐는지 산적 세 놈이 놀라 일어나며 희문을 향했다.
“어째 주변이 조용한 게 불청객이 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게 너 인줄은 몰랐군.”
“나도 네가 전쟁에 나선지는 몰랐다.”
“흐흐…… 앉아라 간 만에 만났는데 술 한잔 해야지.”
“술이라. 네가 술을 즐기는 줄은 몰랐군.”
“하하하……. 세월이 흘렀으니.”
희문이 세강 쪽으로 다가서자 산적 세 놈이 물러서다 희문의 옷자락에 피가 묻은 것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두목, 이 놈이 다른 녀석들을 다 죽인 것 같은데요!”
산적의 떨리는 목소리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세강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거야. 우리가 잡아온 처녀들도 다 놓아줬겠지.”
“에! 그런데 가만히 있는 겁니까?”
산적 놈들이 무기를 세우며 소리치자 세강이 놈들을 흘깃 쳐다보고는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서 말이지. 할 이야기고 있고. 하지만 네 놈들이 죽여야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세강이 이렇게 말하고 모닥불에 나무를 던져 넣자, 세 놈이 희문을 에워쌌다. 희문이 뒤로 물러나며 세 놈을 살피는 사이, 뒤 쪽에서 검은 형체가 하나 튀어나와 맨 왼쪽에 창을 들고 있던 놈의 옆구리를 찌르고는 물러섰다.
“네가 어찌 여기에 왔느냐?”
“자다 깨서 보니 안 계시길래……”
희문은 이틀을 더 기다리라고 했건만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산에 올라온 조윤을 꾸짖었다. 하지만 조윤은 희문이 이 곳에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뒤를 따라온 것이었다. 희문의 여름철 소나기 같은 변덕과 그 간 품어왔던 스승에 대한 응어리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조윤의 등장에 세강이 웃으며 말했다.
“뭐지? 일행도 있었는가?”
희문은 갑작스레 등장한 조윤으로 인해 산적들이 당황하는 틈을 노려 순식간에 한 놈의 가슴을 비스듬히 베고는 그대로 옆의 놈의 배를 가로로 갈랐다. 두 놈이 쓰러지자 세강이 쓰러진 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꽤 부려먹기 좋은 놈들이었는데 아쉽군.”
희문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조윤에게 말했다.
“넌 내려가거라.”
“아니지. 젊은 친구 자네도 이리로 오게.”
세강이 이렇게 말하고는 조윤에게 손짓을 했다. 희문은 모닥불 쪽으로 다가가려는 조윤의 팔을 잡아 멈추고는 세강의 맞은 편에 앉았다.
“연하는 잘 지내는가?”
“음 그렇겠지. 왜 옛날에 흠모하던 이가 궁금한가?”
남의 일처럼 말하는 세강의 표정에 희문의 얼굴이 굳었다.
“변했군.”
“네가 알던 유세강은 아니지.”
“어째서 도장을 지키지 않고 전쟁터까지 나오게 되었나?”
“진짜 후계자가 있는데 허수아비가 도장을 지킬 수 있나.”
“그게 무슨 소리냐? 연하와 혼인한 것은 네가 아니냐?”
희문이 소리치자 순간 세강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네게 전수해 주신 비검 말이다.”
비검이란 말에 희문이 세강을 노려보았다.
“비검이라니 무슨 말이냐?”
“연하에게 들었다. 스승께서는 처음에는 모른다고 하시더군.”
“그런 것이 있었나?”
짐짓 모르는 척 희문이 대답하자 세강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네게 전수 하셨다는 것 알고 있다. 돌아가시기 전에 네 이야기를 하시더군.”
“끝까지 비밀로 하실 것 같더니……”
“그래, 연하를 빼앗기고 날 허수아비 후계자로 만들어 놓으니 속이 풀리더냐?”
“난 바라지 않았던 일이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그 비검을 네게 알려줄 수 있다.”
희문이 이렇게 말하자 세강이 큰 소리로 웃더니 말했다.
“우리 둘 다 전쟁에서 패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리라곤 스승님도 짐작하지 못하셨겠지.”
“흠, 그 강직한 유세강이 산적이 되어 여자나 겁탈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더 모르셨을걸.”
“크크크, 네가 산적에게서 처녀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사내가 될 것도 모르셨을 테지. 너야 네 한 몸 건사하는 것 외에는 관심 없는 놈이었으니.”
세강의 말에 희문의 얼굴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넌 어찌할 생각이냐?”
“그래? 난 너와 승부를 내 볼 생각인데.”
세강의 말을 듣고 희문이 한 숨을 내쉬었다. 변한 유세강과 마주쳤을 때부터 이런 순간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유세강과 겨룰 생각은 없었다.
“단지 비검 때문에 이렇게 변한 거냐?”
“연하와의 결혼을 허락하신 순간, 나는 스승님께서 완전히 나를 후계자로 인정하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가 도장을 떠나고 나서 스승님께서 네게 비검을 전수하신 걸 알고 참을 수가 없었지. 연하가 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스승님께서 네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네 놈이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연하를 빼앗기고 그 비검을 대신 전수 받고 쫓겨난 내 마음을 네가 알 수 있겠느냐? 참을 수가 없었다고? 진정 참을 수 없었던 건 나였다.”
“후후, 자 그러니 여기서 결판을 내는 거다!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강이 일어나 검을 뽑았다. 희문도 더 이상은 참지 않고 검을 뽑고는 뒤로 물러섰다. 모닥불 빛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흔들렸고 조윤은 멀찍이 물러서 아무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치 않는 대결이긴 하지만 산적에게 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보다는 낫구나.”
“패잔병의 꾀임에 빠져 산적이 된 멍청이들에게 천하의 조희문이 죽을 리가 있나? 하하하”
“토벌대 놈들을 꼬여 산적을 만들다니 유세강이야 말로 대단하구나!”
“크크크, 그래 그 비검을 쓸 셈이냐?”
“네가 원한다면!”
“좋아.”
“혹 내가 죽거든 저 아이는 내려 보내라. 우리와는 상관없는 아이다.”
“알았다.”
대화가 끝나고 마주 선 두 사람의 검이 순간 번쩍이더니 유세강의 베기를 흘려 보낸 희문이 뒤로 물러서 이어진 달 그림자 옮기기를 피하고 반딧불 베기로 세강의 손목을 노렸다. 그러나 세강의 검이 안 쪽으로 파고 들어 그것을 막고 역으로 희문의 옆구리를 파고 들어왔다. 그것을 피하지 못한 희문이 옆구리를 찔려 쓰러지자, 옆에서 보고 있던 조윤이 끼어들어 이어진 세강의 공격을 막았다.
“뭐 하는 짓이냐!”
희문이 얼른 일어서 조윤을 밀쳐내고는 세강 앞에 섰다.
“네가 비검을 쓰려던 것을 저 아이가 막았나?”
“아니. 죽을지 모르고 끼어든 거지.”
“네가 가르쳤구나. 저 자세는 은월류가 아닌가…….”
순간 조윤을 바라보는 세강의 눈이 빛났다. 그 눈빛의 뜻을 알아차린 희문이 검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자 이제 진짜 비검을 보여주마.”
세강도 희문의 말에 자세를 바로 잡았다. 희문이 먼저 검을 크게 휘둘러 세강에게 어깨를 내보였다. 달 그림자 옮기기의 바로 그 자세였다. 세강이 그것을 눈치채고 하단에서 검을 올려 치려는 순간, 희문이 몸이 한 바퀴 돌았다. 그러나 검은 따라 돌지 않았다. 대신 희문의 품에 있던 검이 비스듬히 위로 솟구쳐 세강의 갈비뼈 밑에서 어깨를 뚫고 박혔다.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던 희문이 천천히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이건가?”
세강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비검이라곤 하지만 결국 달 그림자 옮기기와 반딧불 베기를 합쳐 변형한 것이다. 상대의 턱에서 머리를 관통시켜야 하는 기술이지만 크게 쓸모 있는 기술은 아니지.”
“그런가?”
“그래. 달 꿰뚫기 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지.”
“너도, 나도 그 노인네에게 속았구나. 큭”
세강이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검을 뽑으려다 뒤로 쓰러졌다. 희문은 천천히 다가가 아직도 부릅뜨고 있는 눈을 감겨주고는 조윤에게 다가갔다.
“자. 이제 가거라. 그 처녀는 아까 내려 보냈다.”
“예.”
“마지막 내가 쓴 검을 봤느냐?”
“예!”
“그래. 결국엔 네가 은월류를 이어 받게 되는 모양이구나.”
희문이 이렇게 말하고는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았다. 조윤이 놀라며 다가와 그를 일으켜 세우려 하자 희문이 만류하며 말했다.
“아까 옆구리를 찔린 것이 좋지 않았다. 예전에 활을 맞았던 그 곳이야.”
그 말에 조윤이 옷섶을 헤쳐 그의 옆구리를 살폈다. 생각보다 깊은 상처에 피뿐 아니라 고름 같은 것도 비치고 있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조금 더 쉬시면 괜찮아지실 거에요.”
“아니다. 네 덕분에 이나마도 버틴 거야. 마지막에 그게 제대로 들어갈지도 확실치 않았다.”
희문이 이러게 말하고 눈을 감자 조윤이 흔들어 깨웠다.
“왜 이러세요. 정신 차리세요!”
“스승님께선 맞추신 게 하나도 없구나. 미안하지만 네게 청이 하나 있다. 은월류 도장을 찾아가 정연하라는 사람을 찾아서 나와 저 친구의 검을 전해주거라. 그리고 네가 배운 비검도 전수해주고.”
“제가요?”
“그래, 다만 전수하고는 바로 도망치거라. 어디 사는 누구라는 것도 알리지 말고, 그래야 검 따위는 버리고 숙영이란 처녀와 결혼도 할 수 있을 테니.”
“예…….”
희문은 조윤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어느 새 동이 터오는 지 주위가 밝아오고 있었다. 흐릿한 눈을 비비고 싶었지만 손을 들 수가 없었다.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좋았을 것을, 적어도 스승님의 말 한가지는 맞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했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희문이 손을 뻗어 조윤의 뺨을 만지며 말했다.
“이제 어째서 검을 가르치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겠느냐? 검을 배우면 나처럼 제 목숨 아까운 것을 잊어버리고 말아. 하하하”
마지막 힘을 짜낸 희문의 허튼 웃음 뒤로 아침 노을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끝
'단편습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N에게 고함 (0) | 2006.05.31 |
---|---|
왜 그는 어린병사를 쏘는가 (1) | 2005.09.23 |
악마 같은 친구 (0) | 2005.08.02 |
야수의 눈으로 돌아오다.(Vampiric Touch) (0) | 2005.04.25 |
Ghost (퇴고전) (0) | 2005.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