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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과 공상

냉면에 대하여

달부장 2009. 9. 2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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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께서 작은 식당을 하셨는데, 여름이 되면 냉면이나 콩국수 같은 것들을 여름 특별 메뉴로 올리곤 하셨다.덕분에 나는 여름의 시작을 우리 집에서 그 해 냉면을 처음 시작 날과 동일하게 생각했다. 붉은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냉면”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집 앞에 내걸리고, 냉면 배달해 주시는 아저씨가 마분지에 쌓인 냉면뭉치를 가져오시면 닭 한 마리,마늘, 양파, 대파, 계피 등이 들어간 커다란 육수 냄비가 끓어올랐다. 계란 지단이 부쳐져서 가늘게 썰리고, 삶은 계란을 까서커다란 그릇에 옮겨 놓으면, 이제 막 국민학교에서 돌아온 어린 꼬마도 그런 주방의 변화를 보면서 “이제 여름이구나” 생각하게됐던 것이다.


지금은 냉면을 좋아하지만 어렸을 적에는 냉면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는데, 우리 집에서 냉면을 시작하는 그 날만은 꼭 냉면을먹었다. 물냉면보다 비빔냉면을 좋아해서 꼭 그것만 먹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손으로 비벼주신 매운 냉면을 먹고 입 주변이 벌겋게돼서 찬물을 벌컥 벌컥 들이키곤 했다. 어렸을 때 맛있게 먹었던 기억 때문인지 고깃집에 가거나, 점심시간에 뭘 먹을까 고민할때, 꼭 냉면을 떠올린다. 뜨거운 국물보다 속 시원하게 차가운 육수를 들이키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냉면을 시켜 먹게 되는데,내 입맛에 맞는 냉면집 찾기가 참 힘들었다. 혹 처음 먹어보는 가게에서 냉면을 먹게 되면 비빔냉면을 시켜 먹다가 육수를 부어먹곤 했는데, 물냉면이 먹고 싶어도 워낙 입맛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그나마 실패할 확률이 적은 비빔냉면을 시키는 잔머리를굴리게 된 것이다. 요즘에는 겨우 입 맛에 맞는 냉면집도 찾고 인스턴트로 나오는 냉면들도 양념을 좀 하면 먹을만하지만, 어머니가해 주시는 냉면 맛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직도 어머니 혼자서 식당을 하고 계시지만, 손 가는 것에 비해 손님이 별로 없어 가끔 식구들이 먹고 싶어 할 때만 냉면을 하곤하신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냉면을 참 좋아하셔서, 살아계셨더라면 아직도 여름 메뉴로 냉면을 올려놓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해보지만, 하루 종일 끓이고 식혀 육수 만드는 힘든 과정을 알고 있으니, 커가면서 아버지 식성을 닮아가는 아들이래도 이제는어머니께 냉면 해 달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여름 다 가기 전에 집에 내려가서 어머니가 해주신 냉면 한 그릇 먹고싶은데, 언제 좋아하시는 선물 사 들고 연락도 없이 내려가 봐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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