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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습작

A씨가 왜 옥상에 올라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달부장 2005. 1. 26.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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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가 왜 옥상에 올라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도 A는 새벽녘이 되서야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O부장을 데리고 술집을 세 군데나 전전하다 겨우 그에게 대리 운전을 붙여 집에 보낸 뒤 정작 자신은 택시를 잡지 못해 한 참을 길바닥에서 서성거리다 이제야 집 근처에 도착한 것이었다. 


"자기가 스트레스 받는다고 날 끌어대면 내 스트레스는 어떻게 하라고!"


A는 택시기사에게는 웅얼거림 쯤으로 들릴 넋두리를 꼬부라진 혀로 겨우 내놓고는 한기를 느꼈는지 몸을 살짝 떨었다. 와이셔츠에 배인 땀이 식으며 등줄기가 서늘했다. O부장의 통통한 몸을 끌고나오느라 했던 고생이 이제는 땀 냄새와 한기가 되어 자신을 괴롭히는구나하고 생각하던 A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마냥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머리 시원하게 벗겨진 O부장은 원래 A보다 술을 잘 마시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은 A보다 먼저 나가 떨어져서는 시체처럼 몸을 늘어뜨리고 A에게 몸을 의지한 것이었다. 술은 자기가 알아서 조절하는 거라고 술자리 마다 떠들어 대던 그 O부장이 말이다. A는 처음 있는 일이 재미있었는지 싱긋 웃다가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접대 할 때나 보이던 능글맞은 웃음을 실실 흘리며 옆구리에 A를 애인 마냥 끼고 술집을 헤매면서 O부장이 했던 말들이 기억났다. 인사과가 무슨 일을 하는 덴지 모르겠다는 둥 회사에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는 뒷방 늙은이 취급한다는 둥 횡설 대던 것이 아까는 정신이 없어 알아채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뭔가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A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술을 마셔댄 건가 생각하다가 O부장이 객기어린 목소리로 긴히 할 말 이라도 있는 듯 자신을 세 번이라 불러 젖히고 꼬꾸라지던 때를 떠올렸다.


"그 양반 회사에서 명퇴권고 라도 받아서 그런 건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자 술이 깨는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지만 그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O부장이 회사에서 떨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는 O부장을 끌고 나오느라 와이셔츠에까지 밴 땀에 반응하는 자신의 몸이 더 솔직했기 때문이었다.  잘리거나 말거나 그건 O부장의 사정일 뿐, 그가 자기 물건을 챙겨 쳐진 어깨로 사무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자신은 미안하고 지은 죄 없이 죄스러운 표정만 지으면 될 일이었다.


"그 양반 나이도 있는데 살이나 빼지"


시트에 파묻혀 멋대로 숙여지는 고개를 주체 못하던 A가 겨우 고개를 들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손님 뭐라고요?"


거나하게 취한 A씨 덕분에 차 안 유리에 김이 서리자 동년배로 보이는 경상도 억양의 택시 기사는 혹 뒷자리의 골칫덩이가 차 안에 토악질이라도 해 놓지 않을까 걱정이 됐는지 불안한 속마음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 놓은 채 백미러를 슬금거리며 이렇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택시기사의 물음에 A는 손을 휘저으며 혀 꼬부라진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김 서린 차창을 손으로 문지르다 집 부근 편의점 간판을 발견하고 운전석 시트를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서 세워주십쇼."


 잠시 후 차가 길 한쪽에 서자 A는 안주머니의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기사에게 내밀고 거스름돈 을 받아 재킷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뒤 옆 좌석의 서류봉투도 반으로 접어 안주머니에 넣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A씨를 내려놓은 택시가 개운하다는 듯 상쾌한 엔진 음과 함께 움직이자 A는 흔들리는 걸음으로 편의점에 들어갔다.


안경 낀 젊은 점원이 카운터에 엎드려 졸다 A가 들어서자 슬쩍 고개를 들었다. A는 나사 빠진 장난감 병정 같은 걸음으로 음료수 있는 쪽으로 다가가 차가운 캔 커피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좌우로 두리번거리다 점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소주는 어디에 있지?"


A의 물음에 점원은 안경을 한번 치켜세우더니 가게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왼쪽 보시면 있을 텐데요."


잠이 덜 깼는지 아니면 늦은 시간에 들어 닥친 취객이 맘에 들지 않은건지 목소리에 귀찮다는 느낌이 가득한 점원의 손가락을 따라 소주병을 찾아든 A는 한 손에는 캔 커피를 다른 한손에는 소주병을 들고 카운터로 걸어와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는 계산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피를 따서 들이킨 뒤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캔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점원이 검은색 비닐봉지에 넣어준 소주병을 받아든 채 편의점을 나왔다.


날이 꽤 풀렸는데도 지난주에 내린 눈이 한쪽 가에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길을 검은색 비닐봉지를 든 채 터벅거리며 A는 걸어갔다. 아마도 A가 들고 온 검은색 비닐봉지 안에 소주병이 모셔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분명 그의 아내는 알코올중독자가 틀림없다며 바가지를 긁을 테지만 밥 먹으며 한잔 마시는 A의 낙을 이해 못하는 아내가 A는 야속할 뿐이었다. 결국 어제는 냉장고 안에 넣어 놓았던 소주 한 병을 언제 치웠는지 모르게 없애버려서 아내와 다투기 까지 했다. 물론 사소한 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예전일 하나씩 끄집어내는 아내의 바가지에 싸움 때마다 입에 지퍼라도 단 듯 침묵하던 A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고 그 바람에 아침에는 휴대폰 배터리도 챙기지 못해 가뜩이나 명 짧아진 A의 휴대폰은 점심을 넘기지 못하고 꼬르륵 거리더니 꺼져버리고 말았다. 


엘리베이터를 타서 한 쪽 벽에 지친 몸을 기대선 A는 검은 봉지를 들고 있는 손이 차가웠는지 비닐봉지째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양 손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소주병의 무게 때문에 양복 재킷이 한 쪽으로 기울어 버린 탓에 다른 쪽 소매를 잡고 옷을 몇 번 끌어당겨야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자신의 아파트 문 앞에 선 A는 열쇠를 찾는 듯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찾지 못했는지 손을 빼고 재킷 안주머니 까지 뒤졌다. 하지만 손에 만져지는 것은 아까 택시에서 꽂아둔 서류 봉투뿐이었다.


'어디다 흘렸나?'


A는 열쇠를 찾지 못하자 할 수 없이 초인종을 한 번 눌렀다. 하지만 잠귀 어두운 마누라가 초인종 한 번에 일어날 거라고 A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누르고 안에서 소리가 나는지 문에 귀를 기울이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이 여편네가 귀에 솜이라도 틀어막고 자나!'


안 그래도 O부장에게 끌려 다니느라 쌓인 짜증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세 번을 연거푸 재촉하듯 눌렸다. 하지만 금속으로 된 문 너머에선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았다. 결국 화가 난 A는 문을 한 번 발로 걷어차고는 두드리기 시작했다. 서너 번이나 두드렸을까 A의 집문 대신에 맞은편 502호의 남자가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이 새벽에 뭐 하시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도 좀 생각해 주셔야죠."


502호 남자의 인상 쓴 얼굴에 A가 막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열쇠를 잃어버렸는데 집사람이 문을 안 열어주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술이 깨서 그런지 아니면 502호 남자의 인상에 정신이 들었는지 혀 꼬부라진 소리는 아니었다.

A의 말에 502호 남자는 고개를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눈을 옆으로 한 번 흘렸다가 말했다.


"아까 보니 그 댁 아주머니 친정에 급한 일이 생겨 가신다고 우리 집사람한테 그러는 것 같던데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예?"


아내가 집에 없다는 말에 A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502호 남자는 뒤이어 아무런 덧붙임 없이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가려다 뭔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열쇠 없으면 아래 경비실에 가보십쇼."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무슨 일이지?'


친정에 일이 생겨 아내가 급히 갔다는 말에 A는 혹 중풍으로 누워계신 장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하며 엘리베이터 타고 경비실로 내려왔다.


아까 들어올 때 아무도 없는 것 같더니 지금 보니 전에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이셨다는 경비원이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었다. A는 조심스럽게 경비실 창문을 손으로 두들겼다. 크지 않은 소리였는데 그 소리에 경비아저씨가 화들짝 놀라며 성급히 고개를 드는 바람에 오히려 A가 더 놀라고 말았다.


"아 502호 A과장님! 제가 깜빡 졸았나 봅니다. 허허허"


"예..."


학교 선생님을 해서 그런지 경비원은 꼭 이름을 불렀다. 어쩌면 자기가 지키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 모두를 예전 학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기 501호 열쇠 혹시 있습니까. 제가 잊어버린 것 같은데 집사람도 마침 집에 없어서……."


"501호요. 아 그러고 보니 친정어머니 상태가 안 좋아지셔서 병원에 가신다고 급히 가시더구먼요.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경비원은 그렇게 말하고 열쇠 함을 살펴보는 것 같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릎을 살짝 치며 말했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그 댁 열쇠가 없네요. 저번에 잊어버렸다고 새로 깎고 준다고 그러셔서 사모님 드리고 아직 못 받았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그 집 애들이 며칠 안 보이데요 애들이라도 있었으면 됐을 텐데"


"큰 애는 엠티인가 간다고 그랬고 작은 애는 애 엄마가 무슨 기숙사 학원이라는 데에 집어넣어 놔서 두 녀석 모두 집에 없습니다."


A는 이렇게 말하고는 부인이나 남편이나 뭐 잘 잊고 잘 잃는 것은 똑같다고 생각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날 추운데 안으로 들어오세요."


"아니 그 보다 저 전화 한 통화만 쓰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아무래도 아내에게 전화를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안쪽에 있던 전화기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런데 막상 전화하려니 아내의 핸드폰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전에 큰 놈이 쓰던 번호였는데……. 첫 자리 세 개와 뒷자리 네 개는 생각이 나는데 가운데 세자리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전화 수화기를 잡고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한 참을 생각하던 A는 겨우 가운데 세 자리 숫자를 생각해 내긴 했지만 이게 맞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다. 혹 잘못 걸진 않았는가 생각하면서 신호음 다음에 어떤 목소리가 나올까 하고 조마조마 하는데 익숙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어 나야! 장모님은?"


"지금 들어온 거예요! 전화도 꺼놓고 당신한테 얼마나 연락 했는지 알아요."


A는 전화 받는 아내가 장모님의 안부보다 바가지를 먼저 긁는 것을 보고 장모님이 크게 위험하신 건 아닌가 보다하고 생각했다.


"휴대폰 배터리가 다 나가서 꺼졌어. 그 보다 장모님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왜 이렇게 잔소리부터 늘어놔."


"우리 엄마를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이 이제야 전화를 해요? 오후에 쓰러지셨다고 연락 와서 와 봤더니 정신은 차리셨더라고요. 병원에선 체력이 약해지셔서 그런 것 같다고 혹 모르니 다른 검사도 받아보자고 해서 며칠 더 입원해 계시기로 했어요."


"어 알았어. 오늘 회사 갔다가 퇴근하는 길에 들릴게 그럼 끊는다."


전화가 길어지면 잔소리가 따라 붙을까봐 A가 얼른 전화를 끊으려했다.


"안 그래도 되니까 집에 일찍 들어오기나 해요."


아내의 마지막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전화를 끊으려던 A가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참 당신 우리 집 열쇠는 어떻게 한 거야. 나 열쇠 잃어버려서 경비실에 있는 열쇠로 열려고 했더니 당신이 가져가서 안 가져 왔다며."


"아…….그거 거실 서랍 안에 놓고 깜빡했네. 어디다 열쇠를 잃어버리고 경비실에서 까지 간 거예요. 그러지 말고 어디 24시간 사우나 같은데 가서 자고 출근해요. 나 내일 오전에는 집에 갈 거니까."


"누가 잃어버리고 누구한테 큰소리야. 어쨌든 알았어."


A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졸린 눈으로 신문을 바라보고 있는 경비원에게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저 어떻게 하시기로 했어요?"


"24시간 사우나 같은데 가서 자라는데요. 이 시간에 거기서 자면 회사 지각할 것 같으니 아무래도 어디 가서 좀 있다가 출근해야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A가 이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나가려다가 뭔가 허전한 생각이 들어 멈칫하더니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아이고 이게 어디 갔지?"


안주머니에 꽂아두었던 서류봉투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집 앞에서 열쇠를 찾을 때는 있었으니 엘리베이터 안이나 집 문 앞에 떨어져 있을 것 같았다. A가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경비실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경비원은 또 고개를 숙인 채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혹 없으면 어쩌나 하고 초조해 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한 쪽 귀퉁이에 떨어진 서류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A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서류봉투를 가지고 내리려는데 뒤 쪽에서 신문 배달하는 남자가 뛰어오더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A가 내리려다 남자에게 가로막혀 멈칫하는데 남자는 맨 꼭대기 층 버튼과 문 닫음 버튼을 번갈아 누르고 A에게 말했다.


"몇 층까지 가세요?"


A는 내린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엘리베이터 문은 닫힌 뒤였다. 


"막 올라타시는 거 보고 따라왔는데 올라가시는 거 아니었나요?"


'내리려던 참이었다. 이놈아…….'


이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술기운이 남아 있지만 않았다면 남자를 살짝 밀치고라도 내렸겠지만 몸이 피곤해서 인지 그렇게 까지 하지 않은 게 조금 후회가 됐다. A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신문배달 남자도 머쓱해졌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작게 콧노래만 흥얼거렸다. 엘리베이터가 15층 맨 꼭대기에 다다르고 문이 열리자 남자가 내렸고 A는 1층 버튼을 누르려다가 갑자기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15층에서 내려섰다. 몇 년 동안 이 아파트에 살면서 옥상에는 한 번도 올라가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아니면 옥상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서였는지 이유는 확실치 않았지만 어쨌든 A는 15층에서 신문 배달 남자와 함께 내렸다. 그리고 신문 배달 남자가 신문 더미를 들고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서 있다가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군데군데 녹이 슨 철문의 차가운 손잡이를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모험자 마냥 심장을 두근거리며 여는 자신의 모습에 A는 피식 미소를 흘렸다. 옥상의 바람은 생각보다 거셌다. A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 봉투가 바람에 푸득하고 날갯짓 소리를 내자 다른 손에 잡고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날이 떠오르는 옥상위의 풍경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음울한 현의 울림 같았다. 어느 층의 누구네 집에서 버렸는지 이제는 제 색을 잃어버린 싸구려 베니어합판 책상이 이슬에 찌들어 옆구리에 서리가 허옇게 내려앉은 채로 허물 벋는 뱀처럼 껍질을 벋고 있었고 저번 달 이사 갔던 노부부의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신 나간 집구석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역시 색이 바란 이불 하나가 A의 눈앞을 어지럽히며 그의 하늘을 반이나 가리고 있었다.

A는 난간 쪽으로 걸어가 햇볕 잘 받는 곳에 놓인 화분을 들어 바닥에 물기가 있는지 확인하고는 손에 든 봉투를 내려놓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화분으로 눌러 놓았다.

A가 화분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화분에 몸이 깔린 서류 봉투는 하늘이 제 고향이라고 되는 듯 날갯짓을 시작했다.

멀리 동쪽하늘에 해가 반쯤 걸리자 A는 재킷 오른쪽 주머니에 볼썽사납게 꽂혀 있던 소주병을 꺼내 마개를 따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 겨울바람에 언 몸이 소주 한 모금으로 금세 풀리지는 않았지만 A는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싸한 액체의 느낌이 좋아 연이어 두세 번 더 소주를 들이키고는 바닥에 탁 하는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마지막 모금에 남은 쓴 맛을 잊어보려고 바지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들었다. 주머니 속에서 세상만큼 힘들었는지 엉망으로 구겨진 담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A는 손으로 한 번 훑어 내고는 다른 쪽 주머니에서 일회용 라이터를 꺼냈다. 

붉은색 투명 플라스틱에 00사롱이라고 적힌 라이터는 사롱마담의 헤픈 웃음만큼이나 옥상의 무채색과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바닥에 짤랑거릴 만큼 남은 가스 때문인지 A의 속을 꽤 태웠다. 안 켜지는 라이터를 흔들어도 보고 톡톡 두들겨도 보았지만 속만 태울 뿐 불을 켜지지 않았다. 결국 A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고 라이터를 던져버리려고 손까지 쳐들었다가 다른 방법으로 켜보려는지 멈칫하더니 라이터를 재킷 안으로 가져갔다. 재킷으로 사방의 바람을 막고 고개를 옆구리 쪽으로 깊게 숙인 뒤에야 겨우 담배에 불이 붙였다. 하지만 정작 그가 잊어보려던 입 안의 쓴맛은 속 썩이는 라이터 덕분에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A는 담배를 연신 빨아대다 이제 반 남은 소주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쳐들자 술기운에 머리가 핑하고 돌더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자 이내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하고 뒤로 무너졌다. 하지만 몸을 잃을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는지 A는 얼른 다리를 빼 몸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자살이라도 하려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A는 하늘에다 대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신문배달부의 덕분에 맨 위층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옥상에 까지 올라온 건 분명 A 자신이었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다. 술을 잔뜩 마시고 옥상에 올라와 안주 없이 소주를 마시는 자신의 모습은 다른 사람이 본다면 분명 자살이라도 하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대답 없을 물음에 A는 혼자 피식하고 웃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서 아까 화분을 얹어 놓았던 서류봉투를 말아 안주머니에 넣고 손가락에 담배를 쥔 채 다른 손에는 소주병을 들고 낡은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뜯긴 의자 방석을 손으로 대충 먼지만 털고 앉아 안주머니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놓고 안에서 때 지난 보고서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턱하니 내려놓고는 볼펜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연상 때문이었다. 자살과 유서, 유서란 단어는 곧이어 젊은 시절 끄적이던 습작들을 떠올리게 했고 결국엔 첫사랑에 가슴 저리며 적던, 지금은 가물가물한 유치한 시들과 연애편지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는 한 번도 아내에게 편지를 써 본적이 없었다. 젊은 한 때 첫사랑에게는 수십 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십년을 같이 살아준 아내에게 편지 한 통 써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괜한 미안함이 들었다. 


‘나 하나 밖에 모르고 산 사람인데.’


바가지 긁을 때야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 같지만 아들 둘을 다 키워 놓고 나니 내 곁에 있을 사람은 아내 밖에 없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드는 A였다. 결국 A는 볼펜을 집고 종이를 한 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보고서 뒤편에 사랑하는 아내에게 라는 말로 글을 시작했다. 어째서 쓰기 시작했는지 모를 글은 페이지를 넘겨 다음 장으로 넘어갔고 이내 부모님께로 시작하는 글로 넘어가더니 마지막은 아이들에게로 시작하는 글로 끝을 맺었다. 그것은 글을 쓴 다기 보다 마치 지금까지 A의 심중에 갇혀 있던 말들이 제 때를 찾았다는 듯 종이위로 도망쳐 나오는 것 같았다. A는 그렇게 세편 십여 장이 되는 글들을 편지처럼 곱게 접어놓고는 숙제를 마친 어린애마냥 일어나 난간으로 걸어가 이제는 제 몸을 다 벗은 해를 손으로 가리며 겨우 바라보다가 싱긋 웃으며 난간위로 올라갔다. 손 한 뼘 정도의 콘크리트로 된 옥상 난간에 올라서 위태로운 한걸음을 떼며 A는 어린애처럼 미소 지었다.


어릴 적 30분 정도 걸어야 하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길에 A는 종종 길옆 하수도 위로 올라온 한 뼘 넓이의 구분 턱을 평균대를 타듯 걸어가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지만 그 때 A는 그 혼자만의 놀이에 꽤 집중했었다. 그때 기억에 A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난간 위를 걸어가다 문득 제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덜컥 겁을 집어 먹었다. 지평선 쪽에 시선을 둘 때는 모르겠더니 시선이 한 번 바닥에 향하고 나자 이전에 바라보던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물론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난간 위에서 바닥을 내려다보자니 이대로 떨어져버리면 큰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의 시선을 일그러뜨린 것이었다. 이런 스릴을 즐길 만큼 젊은 나이가 아닌데 하고 술기운을 탓하며 후회했다. 남자는 죽을 때 까지 애라더니 자기가 딱 그 짝 같았다.


그 때였다. 소주병으로 눌러 놓았던 그의 서류들이 한 순간 세게 몰아친 바람에 중력을 이기고는 풀려 날아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그의 손이 난간 넘어 날아가는 종잇조각을 움켜쥐려고 움직인 것도, 그 때문에 그의 몸이 균형을 잃어버린 것도 바로 그 순간 이었다.

A는 균형을 잡으려고 손을 휘저어 보았지만 말 그대로 헛된 몸부림 이었다. 오히려 술에 취해 감각이 둔해진 그가 손을 휘저은 바람에 삶과 죽음을 재던 저울이 덜컥하고 죽음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그가 적어 놓은 글들과 함께 A는 날갯짓을 하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종이들은 그 묘하게 암울한 소리를 실은 바람과 함께 A의 인생의 날개를 퍼덕이며 멀리 날아가 버렸다.


둔탁한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경비원은 바닥에 누워 피를 흘리고 있는 A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앰뷸런스가 도착하고 조금 지나 경찰이 도착해서 주변을 정리할 즈음에야 출근시간에 일어난 사고를 구경하느라 몰려 있던 사람들 틈을 헤치고 A씨의 부인이 도착했다.


“아니 이 사람이 어쩌다…….”


A의 부인은 이내 혼절했고 한참이 지나 깨어난 뒤에는 A씨가 자살한 것 같다고 말하는 형사에게 자신의 남편은 자살 같은 것을 할 사람이 죽어도 아니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사실 형사 역시 조금은 이상했다. 아내의 말이나 경비원 그리고 맞은편에 사는 이웃 남자 이야기를 들어봐도 자살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실족한 건가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니 왜 이 A라는 남자가 새벽에 옥상에 올라갔는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신문 배달원의 말로는 엘리베이터에 탄 A의 표정이 기분 나쁜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는데 그 걸 보면 또 뭔가 알 수 없는 심적 변화에 의한 자살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디 유서가 있으면 딱 자살인데!’


하지만 그 시간에 유서로 보기에 딱 좋을 A씨의 보고서들은 바람에 실려 큰 길로 날아가 몇 장은 행인의 발에 밟혀 찢기고 다른 몇 장은 물웅덩이에 떨어져 사실 없어졌다고 하는 편이 옳은 형편이 되어 있었다. 자살이냐 실족이냐 하는 갈래에서 형사는 일단 자살로 보고서를 쓰기로 하고는 자신의 수첩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결국 A가 어째서 그 추운 겨울 새벽 옥상에 올라갔고 어째서 떨어지게 된 것인지에 대한 진실은 아무도 모르게 되고 말았다. 어쩌면 그 아침 그의 어깨 위에 사신이 그 긴 낫을 들고 난간 위를 올라가던 때의 A의 장난스런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는지도 모르고 또는 운명의 여신이 신문배달부의 모습으로 나타나 옥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O부장이 술에 취해 끝내 하지 못한 명예퇴직 권고를 불쌍하게 생각한 신이 그를 미리 데려간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 A가 자살을 위해 옥상에 올라가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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