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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과 공상

기계식 키보드의 경쾌함

달부장 2005. 8. 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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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식 키보드의 경쾌함

아버지의 성격을 물려 받아선지 나 역시 쓰지 않거나 쓸모가 없어져 버린 물건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런 물건 중에 특히 많은 비중을 차지 하는 물건들이 오래 된 컴퓨터 부품들이다. 비디오램 2메가 짜리의 ATI의 VGA카드로 부터 시작해서 ISA 슬롯으로 된 Serial Port 카드 (내가 최초로 구입했던 마우스는 A4 Tech 라는 회사의 제품이었는데 그 때 사용하던 대우의 16bit XT 컴퓨터 코로나에는 이 Serial 슬롯이 없었기 때문에 따로 구입했어야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옥소리 나 사운드 블라스터 같은 사운드 카드, 포트가 두 개 달린 게임카드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인데 그 중에서 중학교 때 구입했던 뉴텍의 486DX 컴퓨터에 따라온 기계식 키보드는 독특한 키감과 소리 때문에 계속 사용하고 싶었지만 PS/2가 아닌 AT 방식의 콘넥터 때문에 나의 다른 보관품들과 함께 먼지만 쌓이고 있었다.



기계식 키보드는 키 하나 하나가 독립된 스위치 형식으로 되어 있고 잔고장이 적으며 스프링에 의한 반동으로 좋은 키감을 가지고 있다. 또 딸깍 딸깍 하는 특유의 소리가 “아 내가 뭔가 두드리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확실하게 전달해 준다. (물론 조금 시끄러운 감이 없진 않지만) 일반 멤브레인 키보드와 구조나 생산비용에 차이가 있어 지금은 단종되어 가고 있긴 하지만 한 번 사용해 본 사람이라면 그 손 맛을 잊을 수 없는 것이 또 기계식 키보드의 특징이다.- 기계식 키보드의 키 감을 사용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하기 꽤 힘들다-

뉴텍의 기계식 키보드는 Aron에서 OEM방식을 통해 90년대 초에 생산된 것으로 벌써 15년 가까이 지났지만 빛이 바래고 때가 탄 것을 빼면 아직도 멀쩡하다. (물론 Windows 키나 Menu키는 같은 것은 없지만) 덕분에 그 키 감과 소리를 잊지 못하고 가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컴퓨터에 연결 되지도 않은 키보드를 두드려보고는 다시 한 곳에 쳐박아 두곤 했는데 그런 물건을 다시 꺼내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찌 어찌해서, 컴퓨터를 배우고 싶으시다는 어머니께 컴퓨터를 마련해 드리고 내가 예전에 쓰던 키보드를 연결해 드리게 됐는데 이게 자판의 프린트가 거의 지워져서 A,S,D,F,J,K,L 같은 키 들은 거의 알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나야 그게 지워져도 큰 상관이 없었지만 이제 막 배우시려는 분께는 난감한 문제일 것 같아 새 키보드를 구해 드리려다 문득 뉴텍의 기계식 키보드를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시작은 이렇게 했지만 어차피 AT->PS/2 컨넥터로 바꿔주는 젠더를 따로 구해야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 젠더를 구입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내가 젠더의 존재를 알게 된 뒤에도 쓰지 못한 것은 이 젠더를 구하는게 지방에서는 꽤 힘든일 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온라인 쇼핑몰 같은데서 주문하면 쉽게 살 수 있지만 그 때는 그게 쉽지 않았다)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고는 고장나서 회생 불능으로 보이는 PS/2 방식의 마우스 케이블을 뜯어내고 말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PS/2와 AT 컨넥터의 핀 배열도

젠더라는 게 있으면 기본적으로 핀 배열만 다를 뿐 큰 차이는 없을거라는 생각에서 찾아 본 것이었는데 역시나 그림에서 처럼 4개의 핀 Clock , Vcc , Data, Ground 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핀 배열은 마우스도 동일해서 마우스 케이블 안의 전선들도 역시 4가닥 이었고 친절하게도 마우스 기판위에 각 선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어서 일이 조금 쉬워졌다. (만약 그게 적혀 있지 않았다면 테스터로 각 전선이 어떤핀과 연결 되었는지 일일이 찾아내야 했었다.) 이제 문제는 키보드의 케이블을 바꾸는 일이었는데 마우스 때 처럼 내부 기판에 각 선의 정보가 적혀 있지도 않았고 이상이 없는 물건에 칼을 들이댄 다는 게 불안해서 AT 컨넥터의 끝부분에 직접 마우스 케이블을 연결하는 일을 저질렀다.

누군가 본다면 “그냥 젠더 하나 사지 뭐하는 짓이냐” 고 할 테지만 어쨌든 이렇게 요상하게 케이블을 연결하고는 컴퓨터에 연결을 해보았더니 키보드가 작동을 하지 않았다. 괜한 짓 했나 하면서 케이블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연결 해보았더니 그제서야 제대로 작동을 시작했다.

전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회용의 연결 방법 덕분에 지저분한 모양이 되었지만 그래도 작동을 제대로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져서 연결 부분을 에폭시 퍼티 ( 공업용의 퍼티와 달리 에폭시 퍼티는 건조 후의 수축이나 변형도 적고 무엇보다 손으로 주물러 열을 가하면 말랑 말랑해져 마음 먹은 모양으로 성형 할 수 있다. 또 수축 후에는 칼도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강도를 가진다) 같은 것으로 연결 부분을 성형해 젠더를 만들까도 했지만 에폭시 퍼티의 비용이면 젠더를 살 수 있을 것 같아 포기하고는 일단 모든 키가 잘 작동해 보는지 테스트 해보기로 했다.

실제로 이 글을 포스팅하는 동안 기계식 키보드를 연결해 사용했는데 전혀 이상이 없었다. 예전의 따닥하는 소리를 들으며 타이핑을 하고 있자니 우스운 모양으로 연결하긴 했지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의 느낌, 예전의 소리 그대로 살아난 기계식 키보드의 사용감은 지금 쓰고 있는 키보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다.

지금은 생산량도 많지 않고 판매되는 물건도 고가여서 사용자가 점점 줄어 들고 있지만 기분 좋은 타이핑을 도와주는 기계식 키보드,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잊혀지겠지만 혹 오래된 물건을 쌓아 두는 창고나 쓰레기 장에 기계식 키보드가 주인을 잃고 기다릴지 모르니 그런 물건을 발견하셨다면 먼지를 털고 다시 한 번 사용해 보시길 권한다. 탁 타각 하는 소리와 키를 누르는 느낌들이 컴퓨터를 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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