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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심장에는 칼날이 꽃핀다. 본문

단편습작

강철심장에는 칼날이 꽃핀다.

달부장 2004. 9. 28.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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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해(融解)
 병원 복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저번에 왔을 때는 진찰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맞은편의 소아과 진찰실 앞 나지막한 플라스틱 미끄럼틀에도 어린애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괜스레 불안하게 남자의 마음을 눌러온다.  점심시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일 거라고 남자는 스스로 답을 찾아내고는 구두 굽을 들었다가 소리 나게 바닥을 두 번 두들겼다. 예상보단 울림이 좋은 소리가 병원 복도에 꽤 큰소리를 내며 퍼지자 다시 한 번 더 소리를 낸다. 마치 군대 시절 점호 시간에 자신의 앞을 지나치며 이 병장이 전투화로 내던 소리 같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잔뜩 긴장한 상태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가슴을 울리는 것마저도 비슷했다. 그렇게 구두로 장난을 치다 손목시계를 보고는 얼추 이제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아니나 다를까 전에 본 간호사가 고개를 살짝 내민다.
“이민석씨?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부름에 눈으로 대답하고서 민석은 일어섰다. 낯설다. 혼자서 병원에 와 본 것은 이번 말고도 몇 번인가 더 있었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낯설다.

 간호사가 안내해준 방으로 들어가자 의사가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다 민석이 들어온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책상 앞에 놓인 검은색 진찰용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말했다.
“보호자 분하고 같이 안 오셨어요?”
 30대 중반인 것 같은 의사는 민석이 들어온 문 쪽을 힐끔 쳐다보다가 뒤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민석은 방금 전까지 의사가 만지작거리던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느라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 진료기록 같은 것을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모니터에는 프리셀(운영체제에 번들로 제공되는 카드 게임의 일종)창이 떠올라와 있었다.
“저 혼잡니다. 제가 보호자죠.”
긴장한 목소리로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다고 해서 의사 입에서 흘러나올 병명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닌데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민석이 모니터를 바라본 것이 부끄럽기라도 했는지 의사는 마우스를 움직여 프리셀 창을 사라지게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응고(凝固)
 그 날 저녁 민석은 죽은 듯이 방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머리를 계속 굴리고 있지만 답은 나오질 않는다. 의사의 절망적인 대답 때문에 그의 사고 회로에 이상이 생긴 것 인지도 몰랐다. 의사는 입원을 권했었지만 그것은 좋은 생각 같지는 않았다. 의사가 확률까지 들먹이며 이야기 하진 않았지만 얼마가 될지 모를 희박한 그 가능성을 믿고 병원 침대에 누워 불꽃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초라하고 처량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형 선고를 내리기 전에 프리셀을 하고 있는 그런 무신경한 의사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기는 싫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계속 생각이 멈췄다. 오토리버스(Auto-reverse) 기능이 작동되는 카세트 플레이어처럼 생각은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럴 때 가족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 - 사실 민석은 다른 사람에게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돌아가셨다는 표현을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돌아가셨다는 표현은 천수를 다 누리신 분들께나 어울리는 표현이지 자신의 부모님들처럼 누군가의 타의에 의해 살해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평온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이 살아계셨다면 오히려 자신 뿐 아니라 그 분들께도 고통만 주게 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자신의 병이 나아지지는 않아도 지금처럼 이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됐을지 몰랐다.
 그 때 핸드폰이 소리 없이 반짝이며 문자메시지가 온 것을 알렸다. 민석은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자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떻게 하지?'
 문자 메시지는 혜연으로 부터 온 것 이었다. 부모님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고 시간이 괜찮은지 물어보려는 내용이었다. 민석은 무의식적으로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찾다가 자신이 담배를 끊은 지 3개월이나 됐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그가 끊은 담배를 다시 찾은 것은 자신이 그녀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한 말하자면 그녀와의 관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지금도 사랑하고-그렇게 믿고 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테지만-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자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자신과 그녀와의 관계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말을 해야 하나’
또 다른 고민이 그를 찾아왔지만 그는 벌써 가슴 속에 떠오른 답안지에 이미 검은색을 칠하고 있었다. 그의 병을 알린다면 아마도 그녀는 냉정해지지 못할 거라고 민석은 생각했다. 헤어져야 한다면, 그것이 자신에게도 그녀에게도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면 냉정해져야 했다. 일말의 여지도 남겨 두지 말고 끊어야 했다. 사실 굉장히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답 일수도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거나 아니면 이대로 살아가거나 결국 자신이 세웠던 일생의 계획표와는 상관없이 죽을 것은 확실했다. 그 확실한 사실에 다만 그녀, 혜연이 더해진 것뿐이었다.
 완전한 끝맺음 앞에서 민석은 자신이 평소와는 다르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있을지 모를 기적에 모든 것을 걸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마치 상대방의 패가 자신보다 높은 것을 알면서 이미 알고 있는 자신의 히든카드가 영화에서처럼 변하기를 바라는 일처럼……. 민석은 순간 자신의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 뺨을 찰싹하고 소리가 나게 때린 뒤에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칩들을 모아 이 어처구니없는 승부에 이긴 상대에게 어떻게 하면 복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모조리 밀어 주기 시작했다.
 
냉각(冷却)

 커피숍 안은 여느 때와 같다. 누가 좋아하는지 알 수 없지만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쿠반(Cuban) 뮤직이 나지막하면서도 격렬하게 흐르고 그 앞에 놓인 커피향도 그대로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마음처럼 금방 비라도 내릴 것 같이 구름 낀 하늘뿐이었다. 민석은 아침에 산 디스플러스(This Plus) 담배의 포장 비닐을 벗기고 한 개비 꺼내려다 그만 두고는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한번 바라봤다.
‘올 시간이 됐는데......’
 어제 밤의 통화에서 뭔가 수상한 기운이라도 느낀 걸까. 평소에는 늦지 않던 그녀가 오늘은 꽤 늦장을 부리고 있었다. 민석이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여 종업원이 다가와 리필할지 물어볼 즈음해서 혜연이 나타났다.

“좀 늦었지. 늦게까지 일했나봐? 얼굴이 별로 안 좋은데!”
혜연은 커피를 시키고서는 핸드백 안에서 콤팩트를 꺼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는 빨리 만나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아빠가 이번 주에 시간이 어떻게 되실지 모르시겠데. 다음 주 주말 정도 면 괜찮을 것 같은데 민석 씨는 어때?”
아까부터 말이 없던 민석은 혜연의 말에 결국 담배를 꺼냈다.
“담배 끊었다고 하더니…….”
혜연이 민석의 손가락에 끼어 있었던 담배를 낚아 채 허리를 동강낸 채 재떨이에 집어넣었다. 
“두통도 심해졌다면서.”
“헤어지자!”
민석의 첫마디에 혜연이 피식 웃었다.
“담배 못 피우게 했다고 삐진 거야?”
하지만 민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혜연이 눈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왜 그래? 우리 부모님 만나기가 부담스러워?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사람의 침묵은 상대를 초조하게 한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통고 받은 사람의 목을 올가미로 조르는 것 같다. 하지만 민석은 탁자 위에 놓인 부러진 담배꽁초만 쳐다 볼 뿐 말이 없다. 민석이 헤어지자는 말 이후로 입을 다물어 버리자 혜연은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녀는 꿈같은 것은 믿지 않지만-지금껏 한 번도 그녀의 꿈이 들어맞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 어젯밤 꿈이 너무 흉흉해서 아침부터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이별을 통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평소와는 다른 그의 어깨와 또 그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느낌은 점점 큰 소리로 혜연에게 사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혜연이 대답을 재촉하자 민석이 혜연과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귀찮아졌어. 너와의 관계가, 결혼도 그렇고 ……. 널 사랑한 게 아닌가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혜연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바람에 커피를 가져오던 종업원이 놀라 멈추어 서서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얼른 커피를 내려놓고 돌아갔다. 혜연은 주변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민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귀찮아졌다고? 사랑하는지 어떤지도 모르면서 프러포즈는 왜 한 거야. 그 뒤틀린 고약한 성격을 이런 때 내보여야겠어. 아니지? 아니야. 지금 장난치는 거지. 이런 장난 좋아하잖아 그렇지?”
 민석은 혜연의 말을 들으며 그녀도 어젯밤의 자신처럼 바닥에 놓인 히든카드가 변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민석이 그 히든카드를 지금이라도 바꿔줄 수 있었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자신에게 물러서며 카지노 칩으로 올려진 그녀의 감정들을 흩뿌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
 민석의 말이 신호가 된 듯 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손을 들어 민석의 뺨을 때리려다 그만 두고는 말했다.
“이렇게는 안 돼! 일주일! 그래 다음 주 주말까지 기다릴 거야. 전화해 기다릴게!”
민석은 그녀가 나가고 나서 조금 기다렸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있는 커피 잔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나도 너처럼 기다리겠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단조(鍛造)
 혜연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서 민석은 바로 회사로 돌아와 사직서를 냈다. 마침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막 끝나 뒷마무리만 하면 되는 때였기 때문에 스스로 적당한 이유만 댄다면 사직서가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만한 때였다. 하지만 그제까지만 해도 아무런 언급도 없던 사람이 내민 사직서에 회사에선 꽤 당황해 했다. 민석은 왜 회사를 그만 두려고 하냐는 상사의 물음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좀 쉬고 싶어서라고 나지막하게 이야기 한 뒤 자신의 소지품을 챙겼다. 갑작스런 일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서운하다며 송별회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를 잡았지만 민석은 그것 역시 웃음으로 흘려버리고는 회사를 나왔다. 그리곤 차 트렁크에 자신의 소지품을 쓰레기봉투 던지듯 집어넣은 뒤 핸드폰을 들었다. 
“어 웬일이냐?”
“그냥!”
고등학교 동창인 현준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귀찮은데 왜 전화 했냐는 투였다. 하지만 현준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민석은 그런 그의 말투마저도 반가웠다.
“술이나 한잔 하자!”
“네가 철들었구나! 형님한테 술도 살 줄 알고! 만날 여자 만나러 다니느라 친구들은 본척만척하더니……. 그래 마침 술 생각나던 참인데 잘 됐다.”
현준이 보고 싶어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에게 미끼를 던진 셈이었다. 
약속 장소를 정하고 민석은 운전석에 앉아 깊게 숨을 들이켰다. 차창 밖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지나가는 행인들, 건물 밖에 걸려 있는 대형 광고, 하늘 ,구름, 해……. 억울하다는 생각에 민석이 이를 악물었다. 포기를 몰랐던 그의 인생의 첫 포기가 자신의 생(生)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 했다. 핸들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은 채 민석은 잠시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귓가로 지나는 소음들에 집중하며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현준이 좋아하는 곱창 볶음집 안은 담배 연기와 사람들의 목소리로 안 그래도 좁은 내부가 훨씬 더 갑갑해 보였다. 한쪽 벽에는 때가 지난 술 광고 전단의 여자 모델 몇 명이 탁한 담배 연기 속에서도 그 미소를 잊지 않고 있었고 다른 벽에는 언제, 누구의 것 인지 알 수 없는 낙서들이 벌레처럼 꾸물거리고 있었다. 민석은 사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현준이 이런 오래된 술집들을 좋아했다. 언젠가 그는 민석에게 편안함이 좋다고, 첫맛이 달짝지근한 소주처럼 기분 좋은 건 없다고 말한 적 있었다. 민석이 술집의 왁자지껄함에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한 쪽 구석 탁자에 앉아 있던 현준이 손을 들어 민석을 불렀다.
“차 밀릴 시간인데 안 늦었구나.”
민석이 맞은편 자리에 앉자 현준이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주며 말했다. 
“어......”
뭐 그렇지 하는 투로 대답하고서 민석은 잔을 들어 현준과 부딪치고는 단 숨에 들이켰다. 캬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현준은 민석의 그런 모습을 재밌다 는 듯이 바라보다가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라와 있는 곱창 볶음을 나무 주걱으로 살짝 뒤집었다. 매콤한 냄새가 한 점 집어 먹고 싶게 하지만 아직은 덜 익어 먹지 못하고 민석은 옆에 있는 오이를 들어 깨물었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정말 술만 마시러 온 사람들처럼 아무 말 없이 술잔만을 기울였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조정하려고 현준이 불 좀 줄일까? 하고 물은 것 외에는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자리에 다른 사람이 끼어 있었다면 이 아무 말 없이 술만 들이키는 두 사람에게 괜한 농이라도 한마디 씩 던져 보라고 할 테지만 두 사람은 대화가 없는 게 오히려 편한 듯 그렇게 술잔을 건넸다. 두 병째의 소주가 비워지고 민석이 한 병의 소주를 시키고 난 순간 현준이 탁자위에 가스레인지의 불을 살피면서 말했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뭔 일을 하려고 하는 진 모르지만……. 그게 뭐든 하지마라!”
“뭐라고?”
현준의 갑작스런 말에 민석이 조금 놀란 듯 아직도 가스레인지의 점화 스위치를 잡은 채 불을 살피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 말라고 인마!”
“미친놈! 술 마시자고 불렀더니 뭔 소리냐?”
민석이 실없는 소리 한다는 식으로 웃으며 묻자 현준이 고개를 들어 민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성욱이한테 전화 왔었다. 네가 전화해서 이상한 거 묻더라고, 그러더니 네가 오늘 나한테 전화한 거야! 눈치 없는 성욱이 같은 놈이 뭔가 감 잡고 나한테 전화 할 정도면 뭔가 있는 거 아니냐? 거기다 물어본 게 사제총 만드는 사람에 대한 거였다면서? 너 이 자식 감이 안 좋아!”
 성욱은 지방 신문사에 기자로 있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언젠가 그에게 사제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떠올리고 전화 한 것이었다. 민석은 어쩌면 성욱이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했지만 현준에게 전화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냐! 인마. 그냥 궁금해서 전화한 거야.”
“말하기 싫으면 하지마라. 하지만 그만 둬. 네가 하려는 게 뭐든지!”
“아니라니까!”
민석이 이렇게 부정하고 소주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새로 가져온 소주병을 따서 아까부터 비어 있는 현준의 소주잔에 한 잔 따라주고는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그러다 알코올 기운이 가득한 한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나 죽는단다.”
“씹할 새끼! 그럼 너만 죽고 난 안 죽는 다더냐?”
“그게 아니고 얼마 안 남았다고.”
“뭐?”
농담으로 받아들이던 현준의 얼굴이 굳었다. 현준은 멍하니 민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방금 전 민석이 따라준 소주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물었다.
“다른 병원은 가봤냐? 그거 오진일 수도 있어! 그래 내 초등학고 동창이 대학병원에 있는데 거기 가 보자!”
현준이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버튼을 누르자 민석이 그의 손을 말리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이 미친 새끼. 그런 놈이 지금 여기 와서 술을 처먹고 있으면 어떻게 해! 일어나!”
차분한 민석과는 달리 현준의 목소리는 크고 떨렸다. 그 바람에 주변의 취객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모였지만 그냥 술기운에 시비라도 붙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지 이내 다시 흩어졌다. 현준이 일어나서 민석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민석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현준도  결국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 놈이 왜 사제총 만드는 건 물어봤냐?”
“나 병원에서 죽기는 싫다. 그냥 어디 경치 좋은데 가서 살다가 정 못 참겠으면......”
“개 새끼! 그렇게 뒈지려면 왜 나한테 이야기 하냐? 그냥 암말 없이 가서 살다 뒈지지!”
현준이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잔을 채우고 바로 비웠다. 민석도 소주병을 들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잠시 두 사람의 대화가 다시 끊겼다. 가스레인지 위에 곱창 볶음은 한쪽이 타고 있었지만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민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제일로 가지고 싶은 게 뭐냐?”
“이건 또 뭔 소리야?”
“아니다! 네가 내 유산 상속 받아라.”
“이 미친 개 새끼! 누가 네 돈 받고 싶데! 뒈지기 전에 다 쓰고 뒈져, 다 쓰기 힘들면 누구처럼 천 원짜리로 다 바꿔서 어디 건물 옥상에서 뿌리던지!”
하지만 이미 민석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이 남겨준 재산과 자신의 돈까지 합치면 그리 적은 돈은 아니었다. 이왕 자신이 쓸 수 없다면 현준에게 주는 게 가장 좋은 일 같았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오늘 회사에 사표 냈다. 이번 주 내로 정리하고 어디 조용한 데로 내려 갈 거야.”
“......”
현준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다만 술잔을 들이킬 뿐이었다. 
“너 예전에 나한테 보여줬던 탄알 가지고 있냐?”
“무슨 탄알?”
민석의 물음에 현준은 이렇게 되물었다가 금방 뭔가 떠올렸다. 예전 대학교 때 한번 민석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작은 권총 탄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 생각해 낸 것이었다. 자신도 알던 친구에게 뺏다시피 한 물건이었다. 그 때는 그 모양이 조그마해서 호기심에 얻었던 물건이었다. 
“그걸로 뭐하려고 그러냐?”
“......”
“없어! 인마. 그게 지금 까지 남아 있을 거 같아! 옛날에 버렸어. 그런 거 가지고 있다 걸리면 화약류 관리법 위반으로 끌려 들어가. 그리고 뒈지려면 팔뚝 긋던가, 목매달던가 아니면 수면제도 있잖아? 미친놈! 죽는 것도 저처럼 골치 아픈 것만 찾네!”
민석은 현준의 말에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수면제는 실패 할 확률이 많다고 들었고 동맥을 끊는 것은 스스로 못할 것 같았다. 목을 매다는 것은 고통도 고통이지만 추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고 유행하는 동반 자살 같은 것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 틈에 끼어서 TV뉴스에 나오느니 복잡하더라도 총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끝이 날 것 같았다.
“성욱이한테 얘기 들으니까 사제 총보다 구하기 힘든 게 탄알이래.”
“민석아! 그러지 말고 병원에 가자. 치료도 안 받고 그렇게 끝내는 건 이 자식아! 아냐. 그건 아니다. 그러지 마라!”
“소용없어!”
이번에는 민석의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이번에는 왁자지껄한 술집의 소음에 묻혀 버렸다. 현준은 탁자위로 올라온 민석의 젓가락을 쥔 주먹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누구보다 살고 싶은 건 민석일 거라고, 그런 그가 낸 결정이라면 자신이 어떻게 하겠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현준으로서는 묵인 할 수 없었다.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치려는 친구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후 현준은 생각을 바꾸고 말았다. 그와 자신은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사람과 언젠가 절벽으로 떨어질 줄은 알지만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과는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노라고 그는 생각했다. 
“내가 지옥가면 다 너 때문이야 이 새끼야! 알았어?”
“넌 그런 거 안 믿잖아!”
웃으며 말하는 민석에게 현준 역시 일그러진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마지막을 즐기는 두 남자를 낡은 술집의 기름때에 쪄든 누런 천장만 지켜볼 뿐이었다. 

조립(組立)
 현준을 만난 지 삼일 째 되던 날 민석에게 두 개의 소포가 도착했다. 하나는 현준에게서 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주문한 물건이었다. 민석은 먼저 현준에게서 온 소포를 뜯었다. 신문지로 빈 공간을 채운 종이 상자를 뒤집자 조그만 금속 물체 하나가 뭉친 신문지와 함께 떨어진다. 길이는 한 4센티미터 정도 되는 9미리 권총 탄이다. 누런 구릿빛의 금속탄두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 보던 민석은 그 것을 들어 공이자국이 있는지 확인하고는 탁자 위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다른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뜯기 시작했다. 10센티미터 정도 되는 긴 금속 관 하나와 관 보다는 조금 지름이 넓은 금속 뭉치가 나왔다. 관이 총열을 대신하고 다른 금속 뭉치 안에 공이와 방아쇠가 장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허술한 모양에 이게 정말 작동이 되긴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민석은 금속 뭉치 양 쪽에 달린 장전손잡이를 뒤로 당겨보았다. 딸깍 하는 소리가 나며 뒤쪽의 조그만 단추가 볼록 튀어 올라온다. 민석이 단추를 누르자 “탁” 하며 공이가 총열과 연결되는 앞쪽으로 불쑥 튀어 나온다. 민석은 총열 역할을 하는 금속관 끝에 있는 약실에 권총 탄을 집어넣고 나사모양으로 된 끝을 금속 뭉치에 넣고 돌려 결합 했다. 사제 총이라고 하지만 연발 사격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고 말 그대로 총알의 발사 메커니즘에 충실한 위험한 장난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석은 결합해 놓은 총을 탁자 한쪽에 내려놓고 포장상자를 버리려고 일어서다가 안에서 메모지 한 장을 발견하고 꺼내 들었다.

- 예전에 만들어 놨던 물건인데 모양은 허술해도 작동은 확실하게 될 거요. 내가 실험도 해 봤던 놈이니까. 나쁜 짓에는 쓰지 마시오.―

짧은 문장을 갈겨 쓴 종이를 민석은 피식하고 웃고는 갈기갈기 찢어 화장실 변기에 넣어 내려버렸다. 
‘나쁜 짓이라…….’
 확실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것은 나쁜 짓이었다. 하지만 이 물건을 보낸 사람이 민석이 자살용으로 쓰려는 것을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런 위험한 물건을 파는 사람의 충고로 나쁜 짓에 쓰지 말라는 말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 민석은 이런 생각을 하며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총을 만지작거리다가 책상 서랍 안에 집어넣어 잠그고는 차 열쇠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강철심장(鋼鐵心腸)
 운전석에서 바라보는 밖은 너무나 평온해 보인다. 날이 기분 나쁠 정도로 맑아서 욕지기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이 된다. 시내에서 멀어질수록 느껴지는 시간은 느려지는 듯해서 조금은 기분이 풀어졌다. 이 정도만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생각하면 병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민석은 중간에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커피를 한 잔 마신 뒤에 잠시 운전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오후 2시의 시간을 이렇게 느긋하게 즐겨 본 게 언제 적 일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니 그 보다는 이런 일상적인 일을 이렇게 기분 좋게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동안 오랜만의 평화를 즐기고 다시 출발하려고 자동차에 시동을 걸다가 문득 앞에 놓인 검은색 승용차가 눈에 들어왔다. 민석의 차와 마주보고 있는 그 차의 운전자는 뒷좌석에 놓인 커다란 가방을 끌어내려 트렁크에 실으려고 하고 있었다. 가방이 움직이는 모양이 꽤 무거운 것 같아 도와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남자의 검은색 슈트와 살짝 벗겨진 앞머리에서 풍기는 느낌이 민석의 도움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아 그만 뒀다. 조금 더운 날씨였는데도 재킷을 벗지 않고 낑낑 거리는 모습이 조금 신경질 적이고 답답한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꽉 다문 턱이 두드러지는 모습에서 민석은 왠지 모를 광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민석이 남자를 바라보는 동안 어느새 남자는 가방을 끌어내어 트렁크에 집어넣고는 주유소를 빠져 나가버렸고 민석도 오래지 않아 그의 뒤를 따르듯 주유소를 빠져 나왔다.

 온통 녹색뿐인 시골 마을을 지나 산 옆으로 난 2차선 도로의 갓길에 차를 세운 것은 민석이 집을 나온 지 2시간 뒤의 일이었다. 민석은 차에서 내려 도로를 건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지막이 쳐놓은 뱀그물을 넘어 빛이 들지 않아 말라 죽어버린 잡목들 옆을 지나 썩은 나무와 가랑잎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산을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디와 함께 분묘(墳墓)가 나타나자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숙였다가 팔을 쭉 펴며 몸을 세우고는 풍경을 감상했다. 작년 추석이후 찾아오지 못했던 부모님의 묘는 잔디가 길게 자라 있었고 한 쪽은 잡초가 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민석은 이럴 줄 알았으면 낫이라도 구해가지고 올 것을 그랬다고 생각하며 풀썩 자리에 앉아 손으로 잡초들을 솎아내다가 그대로 묘를 등에 기대고 누워 중얼거렸다.

“엄마. 나도 엄마 옆에 눕게 해달라고 미리 편지나 적어 놓을까? 아니다. 나 없으면 와서 벌초할 사람도 없을 텐데, 지금 보다 더 볼품없어 질 텐데……. 그건 그만 두는 게 좋겠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 때 엄마랑 아버지 두 분 모두 화장해서 모실걸 그랬나봐.”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죽은 그의 어머니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민석은 그렇게 누워 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마치 눈에 뭐가 들어가서 흘리는 눈물처럼 얼굴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흘러내리는 눈물을 민석은 마치 누가 보기라도 하는 듯 얼른 손등으로 닦아 내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부모님의 묘에 절을 하고는 산을 내려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때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관자놀이 근처에 오른 손을 가져간 채로 그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머릿속의 고통이 그를 씹어 삼키려는 것 같았다. 민석은 얼른 주머니를 뒤져 진통제를 찾아 씹어 삼키고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가 이내 드러누워 버렸다. 병원에 다녀온 뒤로 통증이 더욱 심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민석은 어쩌면 절망이 그를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는 것이 고통이 되는……. 평소에 두통 때문에 항시 가지고 다니던 진통제가 없었더라면 더 고생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 진통제 때문에 고통만 잊고 지내다 이렇게 심각해 졌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자 입술이 비쭉 올라간다. 민석은 그대로 누워 눈을 감고 통증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눈을 감았지만 오후의 따가운 볕은 그의 눈꺼풀을 뚫고 그의 머릿속까지 괴롭히고 있었다. 진통제를 먹었으니 통증이 금방 가실 거라고 생각하며 누웠지만 통증은 점점 심해져 결국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통증마저도 아득하게 그의 의식에서 멀어져 갔다.

 그렇게 얼마나 누워있었을까? 그가 통증이 가신 머리에 손을 얹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주변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민석은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6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약 세 시간 정도 그렇게 누워 있었던 셈이었다. 민석은 혹 다시 고통이 찾아올까 싶어 미리 진통제 한 알을 입에 넣고 일어서다가 이상한 느낌에 그대로 멈춰버리고 말았다. 신음소리, 작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신음소리였다. 그것도 남자의 신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둑해지는 산 중에 들려오는 남자의 신음소리에 민석은 순간 굳어 있다가 그 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멈추지 않고 간헐적으로 나뭇가지와 낙엽사이로 뱀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처음에 민석은 신음소리를 듣고 누군가 실족이라도 하여 다쳤나 하고 생각했다가 조금 지나자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건 고통에 의한 신음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야릇한 기분에 민석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몸을 낮추고는 기척을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민석의 부모님 산소로 올라오는 작은 오솔길 옆 소나무가 우거진 산 속으로 조금 들어가자 멀리 어슴푸레한 사람의 모습이 민석의 눈에 들어왔다. 흰색 와이셔츠……. 꽤 멀었지만 분명 했다. 민석은 왠지 모를 궁금증에 점점 더 그 사람 쪽으로 다가갔다. 남자의 등 뒤에서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내민 순간 민석은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에 주저앉을 뻔 했다.

 한 남자가 와이셔츠 바람에 아랫도리는 벌거벗은 채 여자를 깔고 허리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 남자의 두 손은 바닥에 누워 있는 여자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이미 숨이 붙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어슴푸레 여자가 두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죽은 것이 확실했다. 

‘시간(屍姦)인가? 아니면 저 남자가 죽인건가?’

 민석은 울컥 뭔가 속에서 올라오는 것 같아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바닥에서 그가 밟고 있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민석이 흠칫 놀라 몸을 낮춰 나무 뒤로 몸을 완전히 숨기면서 남자 쪽을 살짝 바라보았다.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행위에 열중하던 남자도 그 소리는 들었는지 민석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 바람에 그 남자의 옆얼굴이 민석에게 보였다. 민석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그 남자는 바로 자신이 주유소에서 도와주려던 바로 그 검은 슈트의 남자였다. 살짝 벗겨진 머리며 옆얼굴 라인이 그 남자가 분명했다.

‘그럼 그 여행가방안에 저 여자가 들어있었던 건가?’

민석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다시 엉덩이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남자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쪽에 민석이 트렁크에 싣는 것을 도와주려던 여행 가방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민석이 그렇게 몸을 낮추고 있는 동안 남자가 여자에게서 떨어지더니 일어서서 자위행위라도 하는지 민석에게 등을 돌린 채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여자의 모습이 민석에게 보였다. 

‘개새끼.’
 
민석은 여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죽어 있는 여자가 여고생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들쳐 올려진 교복치마와 헤쳐진 블라우스를 보니 확실했다. 

‘저건 개다. 아니! 인간이지. 개만도 못하지만 인간이야.’

 갑작스러운 사건에 민석의 가슴이 요동쳤다. 남자에게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그의 심장은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가 진정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강도에게 살해당한 부모님의 얼굴이 죽은 소녀의 모습과 겹쳐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살인과 시간(屍姦),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그의 일상이 갑자기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의 머리에서 자라는 종양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지금 그는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하는 분노는 벌써 저기서 아랫도리를 벌거벗은 채 서 있는 남자를 씹어 삼키고 있었고, 먹이 사슬의 바닥에 있는 피식자들을 떠올리고 있었고, 복수를 떠올리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흉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남자의 사정이 끝나자 민석의 가슴도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 대신 강철처럼 차가운 새로운 심장이 그의 가슴에서 생겨났다.

‘저런 놈은 죽어야 돼. 딸 같은 여자아이를…….’

 분노가 그의 심장을 달구기 시작했다. 진홍빛으로 달구어져 이제는 그의 심장을 뚫고 나올 정도로 차갑지만 뜨거운 분노가 그의 가슴과 머리를 메웠다. 

‘내 손으로 저 놈을.’

 민석은 그렇게 누워 남자가 구덩이에 여자 아이의 시체와 트렁크를 집어넣는 것을 보고는 엎드린 채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마치 뱀이 된 것처럼 독을 품고 산을 기어 내려 왔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분노의 끝을 갈아가며 산을 내려왔다. 길 가에 다다르자 자신의 차 앞쪽의 나지막한 언덕 너머로 남자의 검은 색 차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자신이 도착해서 산 위에 올라간 이후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차 안에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며 내가 나타나 차를 타고 사라지기를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민석은 자신의 몸에 묻은 흙이며 나뭇잎들을 툭툭 털어내고는 자신의 차에 올랐다. 그리고 헤드라이트를 켜 남자의 차번호를 메모지에 적은 뒤에 차를 돌려 산으로 올라오기 전의 삼거리 옆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검은색 차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발아(發芽)
 사실 민석은 남자가 차를 돌려 다시 삼거리로 내려 올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래서 남자의 차번호를 적어 두었는데 예상대로 1시간 반이 지난 뒤 민석처럼 차를 돌려 삼거리로 내려왔다. 남자의 차가 삼거리 신호등 앞에 대기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민석은 그의 뒤로 차를 붙였다. 혹 남자가 자신의 미행을 알아챌까 싶어 거리를 조정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다행히 남자는 미행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고 시내에 들어서자 미행은 더욱 쉬워졌다. 남자는 바로 집으로 가는 것 같았다. 남자의 차가 주택가 단독주택 앞에 서는 것을 확인하고 민석은 차에서 내렸다. 남자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멀리서 확인한 뒤 민석은 남자의 집 앞에 가서 명패를 확인했다. 김명훈. 

 천천히 담 너머의 집 창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차에 올랐다. 그의 이름, 그의 집, 그리고 그가 저지른 일 까지 어쩌면 세상에서 민석 자신이 저 김명훈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민석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노트에 뭔가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절벽 앞에 선 인간이 다른 이의 죽음에 마주서서 쓰는 고백이며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의 차가워진 강철심장이 싹을 띄우기 위한 빗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트에 마지막 문장을 적은 후 밑줄을 쫙 긋고 나서 민석은 생각했다. 김명훈이라는 남자를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가장 정상적인 방법이라는 생각. 하지만 그 가장 정상적인 방법이라는 점이 민석을 망설이게 했다. 그 정상적이라는 범위에 자신이 포함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정상적이지 않았고 그 김명훈이라는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도 않은 그 인간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웃기는 생각이라고 민석은 웃음을 흘렸다. 정상적이든 정상적이지 않던 그건 상관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김명훈이라는 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뿐이었다. 그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느끼도록 그 놈의 뼈를 살아 있는 채로 깎아내더라도 느끼게 해 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그는 자신이 그 자에게 심판을 내릴 자격도 없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두통이 그의 사고 회로를 쇼트 시켰는지도, 아니면 뇌종양 환자들에게 발생 할 수 있다는 정신이상일지도 모르지만 그 자에 대한복수가 새로운 인생의 목표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혼자 떠나려고 하던 여행에 억지로 친구를 끌어들이는 것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 친구가 살인을 저지른 인간이라는 점만 뺀다면…….

개화(開花)

  명훈이라는 남자의 집을 확인한지 삼일이 지난 날 저녁 민석은 세워둔 차 안에 앉아 백미러를 가끔씩 바라보며 남자가 집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 때문인지 손에 땀이 차자 민석은 티슈로 땀을 닦아내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려고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뒤쪽이 환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검은 색 승용차가 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차는 천천히 민성의 차 옆을 지나 반대편에 섰다. 민석은 검은 색 차에서 남자가 내리는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차에서 내렸다. 명훈이란 남자가 차에서 내려 오토키 버튼을 누르는 순간 민석이 그의 뒤로 다가가 말했다.
“김명훈 씨?”
민석이 남자의 얼굴을 부르는 순간 남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네 하고 대답했다. 민석은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남자의 얼굴에 내밀고 말했다.
“XX서에서 나왔습니다. 서수면 야산에서 시체가 하나 나왔는데 조사해 보니 김명훈 씨하고 통화한 기록이 나와서요. 들어가서 기다리려다가 난처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민석은 이렇게 말하고서는 명훈이라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놀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누실 수 있으시죠?”
민석의 말에 명훈의 표정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변했다. 
“죽은 사람이 누군데요?”
“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민석이 이렇게 말하고 차에 오르자 명훈도 뒷좌석에 올라탔다. 명훈이 차에 올라타자 민석은 백미러로 명훈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았고 긴장한 표정의 명훈이 민석을 향해 말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순간 민석이 차문을 잠그고 등산용 칼을 명훈의 목에 들이대며 말했다.
“사건 현장에 가셔야지”
갑작스런 일에 놀란 명훈이 흠칫하고 몸을 시트 뒤로 붙였다. 등산용 칼이 피부를 살짝 베었는지 그의 하얀색 와이셔츠 깃 위로 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뭐…뭐 하는 거요?”
겁에 질린 명훈의 목소리에 민석이 칼을 쥔 주먹으로 얼굴을 세게 후려 쳤다. 그 바람에 명훈이 억 소리와 함께 옆으로 눕자 한손으로는 칼을 들이대고 다른 한손으로 케이블 타이(전선 따위를 묶어 정리 할 때 사용하는 물건 한쪽 끝을 잡아당기면 소리와 함께 조여든다.)를 집어 들어 명훈의 손을 뒤로 해서 묶었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타이가 조여들자 민석은 명훈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앉힌 뒤에 말했다.
“내가 당신이 한 짓을 보게 된 게 당신의 불행이지”
 민석은 이렇게 말하고서는 그의 입에 골프공을 집어넣고는 테이프로 그의 입을 봉해버렸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고 주위에 사람이 지나가는 지를 확인한 뒤 트렁크 안에 명훈을 집어넣었다. 명훈을 트렁크에 집어넣고 나자 민석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운전석에 앉았다. 트렁크에서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지만 민석은 개의치 않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담배를 입에 문채 시동을 걸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석이 도착한 곳은 바로 그의 부모님의 산소 그리고 명훈이 여자아이를 묻은 산 이었다. 차를 갓길에 대고 잠시 주변을 살펴보던 민석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메고는 칼을 든 채 조심스럽게 트렁크를 열었다. 낮에도 차가 잘 다니지 않는 도로였지만 그래도 저 쪽 도로에서 라이트 불빛이 나타나지는 않을 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나와!”

민석이 칼을 들이댄 채 명훈에게 말했다. 하지만 명훈은 뭐라고 끙끙거리기 만 할뿐 움직이지를 않았다. 하지만 민석은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멱살을 잡고 고깃덩이를 끄집어내듯 명훈을 트렁크에서 내리게 한 뒤에 그의 등 뒤에 칼을 들이댔다.

“자! 갈까!”

민석의 말에 명훈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 밤에 2차선 도로를 건너 두 명의 남자가 나란히 줄을 지어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수상해 보였겠지만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밤의 산은 조용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새소리, 벌레소리,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들이 섞여 스산함을 더하고 있었다. 민석은 그런 소음들에 조금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산 중턱에서 산길을 벗어나 나무사이를 얼마정도 헤쳐 나가자 그 곳이 나타났다. 지금은 흙이며 나뭇잎에 덮여 있지만 시체가 잠들어 있는 그 곳. 민석은 뒤에서 명훈의 목을 잡고 꿇어앉힌 뒤에 한 쪽 종아리를 발로 잡고는 명훈의 두 발도 타이로 묶은 뒤 등을 세게 걷어찼다. 명훈의 상체가 앞으로 꼬꾸라지자 민석은 그의 배를 몇 번 더 걷어찼다.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지만 민석은 한참을 그렇게 때린 뒤에 명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그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죽이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도망치려고 할 때를 대비해서 미리 힘 좀 빼두는 거니까!”

그리고는 명훈의 입에 붙여 두었던 테이프를 떼어냈다. 그러자 명훈의 입에서 피 묻은 골프공이 떨어졌다.

“헉! 누군데 나한테 이러는 거야.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입에서 골프공을 뱉어내자마자 명훈이 고통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무슨 짓을 했을까? 모르겠다면 내가 생각나게 해줄까?”

민석은 말을 마치자마자 칼을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돈 때문인가? 돈 때문이라면 내가 집에 가서.......”

명훈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민석의 주먹이 그의 입을 연달아 후려쳤다. 그 바람에 입술이 터져 입 주변에 피가 잔뜩 묻었다. 

“네 목숨 값을 흥정하자는 건가? 그렇다면 네가 죽인 그 여자아이의 목숨은 얼마지?”

민석은 이렇게 말하고는 가방 안에서 야전삽을 꺼냈다. 그리고 여자아이가 묻혀 있는 곳을 파기 시작했다. 위에 얹힌 나뭇잎을 긁어내고 흙을 퍼낸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여자아이의 허연 다리가 드러났다. 민석은 주변의 흙을 더 긁어내고는 여자 아이의 다리를 잡아 끌어냈다. 흙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달빛에 드러나자 민석이 고개를 돌려 명훈이 쓰러져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명훈의 머리를 잡고는 질질 끌어 여자아이의 시체 옆에 눕힌 뒤에 말했다.

“자 이제 시작하자!”

그리고는 가방에서 캠코더를 꺼내 명훈과 죽은 여자아이의 얼굴을 같이 잡고는 말했다.

“이 여자아이는 누구지?”

“몰라! 모르는 애다!”

시체 옆에 누워 겁에 질린 얼굴로 명훈이 이렇게 소리치자 민석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민석은 잠시 캠코더를 리코딩 버튼에서 손을 떼고는 말했다.

“한 번 더 물어서 대답하지 않으면 그 때는 네 귀를 자르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물어서 대답하지 않으면 그 때는 다른 쪽 귀를, 그 다음에는 코를 , 그 다음에는 손가락 , 그리고 발가락, 그리고 눈. 아마 그 때 즈음이면 대답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러고도 대답하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혀를 자르겠다.”

“미친 새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다시 한 번 묻는다. 이 여자 아이는 누구지?”

민석이 다시 캠코더를 들이대고 물었지만 명훈은 이를 악물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민석은 잠시 기다렸다가 명훈의 귀에 칼을 가져다 댔다. 

“이러지마. 말하지! 말할게!”

“좋아! 누구지?”

“나도 정말 몰라. 그냥 채팅사이트에서 얘기 하다 만났을 뿐이야!”

“그럼 처음 만나서 죽였단 말이냐? 왜?”

 민석이 물었지만 명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민석이 명훈을 노려보는 것 같더니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시체 위에 남아 있는 흙을 손으로 치우고 주머니에서 지갑과 배터리가 다 된 핸드폰을 찾은 민석이 지갑을 열어 안에 있는 학생증에 손전등을 비추어 보고는 말했다.

“이 아이 이름은 최현영이고 나이는 17살이야. 그러니까 너는 17살짜리 여자애랑 재미 보려고 만나서는 그 애를 죽여서 여기다 몰래 파묻었단 말이야. 그냥 파묻은 것도 아니지 지가 죽인 시체에 대고 그 짓거리 까지 했으니까. 그런 것을 생각해 봤을 때는 난 네가 일부러 죽였다고 생각 되거든. 말하자면 넌 시체에서만 쾌감을 느끼는 타입이란 말이지. 만약에 사고였다면 몰래 파묻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그 짓거리 까지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야.”

민석은 쉬지 않고 이렇게 내뱉고 나서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전에 생각지 않았던 일들이 순식간에 입에서 흘러나온 것에 민석 자신도 조금은 놀랐다. 그것은 마치 급하게 뽑아낸 밀가루 반죽 같아서 매끄럽지 않았지만 적어도 상대를 격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죽였다. 이런 쓰레기 같은 년 하나 죽였다고 뭐 어때. 세상이 뒤집어 지기라도 하나 ”

민석의 말에 명훈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맞아! 맞는 얘기지. 지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를 꼬여내서 몸 파는 계집애 하나 죽었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지. 마찬가지로 자식뻘 되는 아이를 사는 더러운 중년 남자 하나가 죽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않겠어.”

“웃기지마 이 새끼야. 넌 날 못 죽여. 자기하고 아무런 상관없는 저런 계집애 때문에 네 놈 인생을 망가뜨리겠다고?”

명훈이 조소 섞인 얼굴로 이렇게 말하자 민석이 캠코더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말했다.

“뭐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네 놈 하나 정도 저승길 친구로 데려갈 수도 있지 않겠어. 하지만 왠지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냥 죽이는 걸로는 마땅치 않은 생각이 들고 있어. 사실은 널 저 아이와 함께 여기다 생매장하고 네 놈 몸 위로 구더기가 지나갈 즈음해서 경찰서에 테이프를 보낼 생각이었는데 네 놈한테는 그 걸로는 부족한 것 같아.”

“경찰에 신고라도 할 생각인가보지?”

명훈이 이렇게 묻자 민석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게 네 소망이겠지. 하지만 네 놈이 사형을 면하기라도 하면 TV로 네 놈 얼굴을 보면서 저런 놈은 죽어야 한다며 한탄하는 다른 아저씨들한테 미안하잖아.”

민석은 이렇게 말하고는 골프공을 명훈의 입에 다시 물리고는 테이프로 입을 봉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자신이 자살에 사용하려고 준비한 사제 총을 꺼내 명훈에게 겨누었다. 명훈이 민석의 손에 들린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를 위해 준비한 물건인데 나 보다 먼저 네 놈한테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져왔지 . 처음 계획대로 라면 네 머리에다 발사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어!”
민석이 말이 끝난 뒤 조금 지나 산 속에 총성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옥대(獄臺)
 명훈이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자신이 있는 곳이 산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의자에 묶인 채 눈은 가려져 있었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바람과 냄새 그리고 소리는 어딘가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 것 같았다. 명훈은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어 잠시 어리둥절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사제 총을 발사 한 뒤 명훈은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총알은 남자가 겨냥하고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곳에 날아가 박혔고 남자도 총이 제대로 발사 되지 않았던 것에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든 총을 바라보았다. 그 뒤 남자가 명훈을 끌고 산을 내려와 그의 입에 무슨 약 같은 것을 억지로 집어넣은 것까지는 기억해 냈다.
‘여기는 어디지? 무슨 건물 안은 아닌 것 같은데.’
 명훈이 이런 생각을 하며 묶인 끈을 풀어보려고 움직이는데 순간 강한 바람이 불면서 줄 같은 것이 그의 얼굴을 살짝 때렸다가 떨어지며 목을 살짝 잡아 당겼다. 목에 줄이라도 감아 놓은 건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자동차 소리에 명훈이 어떻게 해서든 입에 붙여 놓은 테이프를 떼어 내고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움직였지만 쉽지 않았다. 
‘그 놈이 어떤 짓을 해놓았는지 모르니 빨리 이 걸 풀어야 돼’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자신을 납치한 남자가 주변에 없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명훈은 몸을 움직여 의자와 함께 넘어지려고 했다. 몸의 중심을 움직여 균형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이내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그런데 몸이 바닥에 닿으려는 찰라 목에 감겨 있던 줄이 그의 목을 살짝 잡아 당겼다. 
'목이라도 매달려고 했나?‘
그러나 목을 매달기에는 너무 줄이 길다고 생각하는 순간 묶여 있는 의자가 천천히 뭔가 강한 힘에 의해 끌려가는 같더니 명훈을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자에 묶인 채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 끌려가다 순간 몸이 아래로 푹 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칼날꽃

경찰서 강력계에 소포가 도착한 것은 민석이 명훈을 납치한지 이틀이 지난 오전이었다. 하지만 경찰서에서는 그 수신자가 강력계라고 되어있는 소포가 오후 1시까지 개봉되지 않고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40초반의 남자가 강력계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살짝 벗겨진 앞머리를 긁적거리던 그는 반장 채윤길 라고 적힌 명패가 놓인 책상 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뒤따라 들어오는 다른 형사들에게 말했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빌딩 공사 현장 옥상에다 목을 매달았으니 ……. 범인이 어떤 새낀지 분명히 사이코야. 그것도 그냥 매단 게 아니라 핸드폰에다가 연결해서 크레인 줄이 잡아당기게 해놨잖아. 아! 이거 골치 아프게 생겼구먼.”

채반장이 이렇게 말하며 담배를 꺼내 무는데 마침 들어온 박형사가 채반장에게 말했다.

“목에 걸려 있던 푯말이나 장치 해놓았던 핸드폰에서 지문 같은 건 안 나왔습니다. 그리고 푯말에 적혀 있던 피해자 신상명세는 맞는 걸로 나왔습니다. 장치되었던 핸드폰 가입자 주소로 지금 이형사가 갔으니까 곧 연락이 올 겁니다.”

“그래. 이거 옥상난간에다 매달아 놓는 통에 방송국 기자들이 모여들었으니 ……. 그런데 이건 뭐야?”

채반장이 책상 위에 놓인 소포를 뜯으며 말했다. 그 안에서 비디오테이프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가 나오자 채반장은 뭔가 하고 비디오테이프를 들여다보다가 옆 책상의 김형사에게 던지며 말했다.

“01X-3244-???? 이 전화 번호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아는 사람 있어.”

김형사가 일어서서 테이프를 비디오에 넣고 플레이시키려는데 박형사가 책상을 치며 소리쳤다.
“그 번호 그 핸드폰 번홉니다.”

“무슨 핸드폰?”

“그 장치되어 있던 핸드폰 말입니다.”

“뭐!”

채반장이 놀란 얼굴로 박형사를 바라보고 있는데 TV에서는 명훈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저거 피살자 아냐? 뭐야! 이 소포 언제 온 거야. 야! 김형사 나가서 이 소포 언제 도착했는지 알아봐.”

채반장의 말에 김형사가 듣지 못한 듯 가만히 TV를 주시하다가 말했다.

“반장님. 피살자가 다른 사람을 죽인 모양입니다!”

“소포 언제 도착했는지 알아보라니까 무슨 소리야!”

멍하니 TV를 주시하고 있는 김형사의 모습에 채반장이 짜증이 났는지 이렇게 소리치며 김형사가 바라보고 있는 TV를 바라보았다. 죽은 여자 아이 얼굴 옆으로 명훈의 얼굴이 채반장을 노려보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죽였다. 이런 쓰레기 같은 년 하나 죽였다고 뭐 어때. 세상이 뒤집어 지기라도 하나!”

마침 김형사가 볼륨을 높였기 때문에 명훈의 그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이건 또 뭐야. 그럼 보복 살인이란 말이야. 그런데 저 김명훈씨는 왜 죽은 거야 이 번호가 저 핸드폰에 적힌 번호면 범인은 우리가 전화를 걸어서 김명훈 씨를 죽이게 하려고 했다는 거 아냐?”

채반장이 이렇게 말하고는 뭔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전화가 울렸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박형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채반장을 향해 말했다.

“반장님 이형사 전환데, 그 핸드폰 주인이 실종 신고 된 여고생이랍니다. 그런데 그 집에도 이 테이프가 도착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여고생 어머니가 오늘 아침에 딸 핸드폰으로 전 화를 한 뒤에 테이프를 보고는 지금 병원에 실려 간 상태라고 합니다.”

“그럼 저 옆에 누워 있는 여자애 집이란 말이야? 이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일단 저 여고생 시체가 어디 있는지 찾아야겠구먼.”
채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아까부터 불을 붙이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깊게 빤 뒤에 말했다.

“김명훈이가 저 여자애를 죽이고 다른 놈은 그 이유로 저 김명훈을 죽이려고 장전손잡이를 당겨놓았다. 그리고 죽인 건 저 여자애 어머니란 말이군. 복잡하구만. 범인이 미친놈인지 세상이 미친 건지.”

채반장이 내뿜은 담배연기와 함께 그의 중얼거림이 강력반 사무실로 퍼져나갔다. 채반장이 이렇게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는 동안 민석은 블라디보스토크행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가져다준 음료수를 마시며 그는 창밖의 구름을 응시했다. 사람을 하나 죽였지만 이상하게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넘겼기 때문일까. 민석은 머릿속으로 빌딩 숲 사이에서 목이 매달린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명훈의 모습을 상상했다. 썩 기분이 좋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마치 긴 보고서를 마쳤을 때의 느낌 같다는 생각에 민석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사람을 죽이고 난 기분이 보고서를 마친 기분이라니.”

민석의 목소리가 컸는지 옆에 앉아 있던 백인 여자가 민석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민석은 그녀를 바라보며 눈인사를 하고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러시아에서 어디가 가장 추울까요?”

민석의 물음에 백인 여자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양어깨를 들썩였다. 그 모습에 민석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엉터리 사제총은 망치로 부순 뒤에 하천에 던져 버렸다. 러시아에 가져 갈수 없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그 명훈이란 남자를 죽이기 위해 준비하며 살고 싶다고 느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 포기했던 삶에 미련을 느끼다니......’

 우스운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러시아의 추위에서는 어쩌면 머릿속의 병도 천천히 진행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러시아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을 위해 총은 구해 놓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가 끝나면 혜연에게 자신의 병을 말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녀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까!’

민석은 잠시 혜연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에필로그
민석이 블라디보스톡행 비행기에 올라타던 날 오전 그러니까 명훈이 목 매달리던 그 시간 혜연은 자신의 집 주변 커피숍에 어떤 남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검은 색 양복을 입은 짧은 머리의 그 남자는 커피숍 탁자위에 서류봉투를 올려놓고는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이민석씨에게 여자가 있는지 조사했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어떤 집 앞에서 계속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김명훈이라는 남자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뭐죠?”
남자가 말끝을 흐리자 혜연이 다그쳤다.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혜연에게 건네주었던 서류봉투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 사진은 민석이 어떤 남자를 차 트렁크에 집어넣는 것을 멀리서 찍은 사진이었다. 물론 너무 멀리서 찍은 사진이고 어두워서 민석의 얼굴이 잘 나오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진과의 연관을 봤을 때 민석이 확실했다. 혜연은 그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가 남자의 얼굴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건 뭐죠?”
“보시는 대로입니다.”
남자가 혜연의 눈을 살짝 피하며 말하자 혜연은 다시 사진으로 눈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서류봉투안의 필름을 확인한 뒤에 남자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모르는 일로 해주세요. 보수는 제가 더 드릴게요.”
“아닙니다. 저도 복잡한 일에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예전에 경찰서에 신세진 일도 꽤 있어서요. 보수는 원래 약속했던 금액만 받겠습니다. 정 사장님 따님이신데 그럴 순 없지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자가 일어서서 나가자 혜연은 사진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왜 그가 사진 안의 남자를 납치하고 있는지 혜연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면 덮어주고 싶을 뿐이었다. 물론 민석이 자신에게 돌아왔을 경우에 한 한 일이지만……. 혜연은 집으로 돌아와 필름을 태우고 TV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남자가 목 매달렸다는 끔찍한 뉴스를 들으며 자신의 핸드폰에 민석의 이름이 뜨기를 기다리며 중얼거렸다.

“당신! 꼭 전화해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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