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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브라우저의 역사

달부장 2005. 6. 14.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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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에 나오는 사마천의 주장 중에는 사람들이 소박한 요순(堯舜)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사기열전의 주 무대인 전국시대는 이른바 난세였고 세상은 매우 어지러웠다. 요순 시절은 주나라 이전의 태평성대를 갈구한 시절로, 당시에는 왕들도 직접 일을 하고 소박한 집에서 사람들과 아울러 지냈다. 중국의 역사는 아득한 전설 속의 문화적 영웅인 요순에서 시작된다. 순(舜)은 고질인 황하의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곤(鯤)이라는 인물을 등용했으나 곤이 치수에 실패하자 순은 그의 아들 우(禹)에게 그 일을 맡겼다. 우는 아버지의 실패를 거울삼아 황하의 전체 시스템을 고려하여 물길을 트고 제방을 쌓아나갔다. 기록에 의하면 진흙길을 누비느라 정강이털이 다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우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제위에 올랐다. 그런데 정작 우는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던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넘겼다. 이로써 왕위가 세습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가 생겼다. 부와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마천은 요순시대가 살기 좋은 시절이었다는 다른 이상론자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사마천에 따르면 요순 시대가 태평성대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기심과 욕심을 발휘할 만한 아무런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기의 황하 개척이 성공하고 나자 먹고사는 데 꼭 필요한 물자가 부족하지 않을 만큼 풍족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서로 권력과 힘을 장악하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요순이 제위를 언제라도 선뜻 내놓으려 했던 것은 그들의 도덕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제왕의 권력이라는 것이 하잘 것 없었기 때문이다. 우(禹) 임금은 거친 옷에 얼기설기 새는 집에서 종일 정강이의 털이 닳아빠지도록 일했다는데, 그 시절 왕의 지위는 권력이 아니라 성가신 잡무에 가까웠다. 세월이 지나자 작은 고을의 원님 정도만 되어도 그 권력과 이권은 요순 임금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세월이 더 지나자 전국시대로 들어서 사람들은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기 시작했다. 전쟁은 일상의 일이 되어버렸다. 제후들의 동원에 백성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이권 관계로 서로 죽이고 간혹 야심가가 태어나서 제후들을 선동하면 몇 십 년 동안 세상은 더 어지러워지곤 했다. 이 시기에 새로운 사상가들이 난무하여 사람들은 더욱 어지럽혔다. 오죽하면 노자가 이른바 현인이라는 것들을 모두 없애면 사람들이 덜 혼란스러워지면서 쓸 데 없는 사상에 덜 세뇌되어 세상이 조용해지리라는 극언을 했었겠는가. 노자는 사상가들조차 대부분 쓰레기로 치부했다.
사마천은 그의 직업이었던 역사를 통해 관조하기를 사람들의 부와 명성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른바 탐욕이라는 것에 의해 사람들이 끌려다닌다는 당연한 사실을 발견하고는 한편으로 개탄했다. 전쟁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용사들의 이면에는 공에 따른 후한 보상이 뒤따르기 때문이며, 사상가나 제후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웃음을 파는 여자들도 이러한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반인들뿐 아니라 공자마저도 “부귀해질 수만 있으면 마차 끈이라도 잡겠다”라는 말을 했을까. 이 말은 공자의 유머 감각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아무튼 사람들의 물질에 대한 욕심과 그 보상은 자연적인 것이라는 게 사마천의 생각이었다.
사마천 역시 부자를 동경하곤 했는데 사기열전의 마지막 장은 공교롭게도 <화식 열전>이다. 사기열전에서 화식이란 부자를 의미한다. <화식> 편에 이르러 사기열전은 그 전까지의 모든 내용을 엎어버리듯 사람들의 본성을 이야기한다. 충신, 열사, 사상가, 그리고 자객이나 제후들의 이야기는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린다. 부(富)라고 하는 것은 묘한 힘을 갖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열전을 통해 사람들의 열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

“나는 이렇게 확신한다. 신농씨 이전의 까마득한 옛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나 <시경>이나 <서경>과 같은 문서에 기재된 순 임금이나 우 임금의 시대 이후로는 인간이란 달콤한 소리를 듣고 싶어 하고 아름다운 미인을 보고 싶어 하며 육류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것이다. 또 누구나 제 몸이 안락하게 지내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권세나 재능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이러한 풍습이 백성들에게 퍼지게 된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새삼스럽게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노자 선생의 묘론을 역설해 봤댔자 그것은 부질없는 노력일 것이다
<중략>
천하의 사람들이 이익을 위해서는 웃는 얼굴로 달려오고, 천하의 사람들이 이익을 위해서라면 분잡하게 달려간다.
<중략>
그러기에 백성의 자연적인 경향을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제일 잘하는 방법이고, 그 다음이 이익을 미끼로 백성을 이끄는 방법이며, 그 다음이 도덕으로 백성을 지도하는 방법이고, 그 다음이 형벌을 주어 무섭게 해서 백성을 이끄는 것이다.
<중략>
대개 일반인들은 자기보다 열 배의 부를 가지고 있으면 그에게 비하되고, 백 배가 되면 그를 두려워하게 되고, 천 배가 되면 그에게 사역되고, 만 배가 되면 그의 노예가 되는 것이니, 이것도 만물의 도리이다.”

대세와 순응
취미나 개인적인 기호로만 생각하지 않고 컴퓨터 업계를 하나의 먹고사는 전쟁터(?)로 바라본다면 그 전쟁터에 나온 사람들은 무언가 보상을 바라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상이라는 것은 역시 뻔한 것이다. 그 보상은 금전과 영향력인데 필자를 포함한 일부의 사람들은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영향력을 따라가면서 이른바 ‘대세’가 형성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관점으로 점수를 매긴다면 지금까지 몇 회에 걸쳐 다뤄온 마이크로소프(이하 MS)라는 회사가 단연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벤처캐피탈리스트인 존 도어가 IT 업계와 그 투자에 대해 “역사상 가장 합법적이고 거대한 부의 창출”이라고 단언한 현장에서 가장 성공적인 회사였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2200년과 그 이전에도 이 정도였으니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에는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얻어냈지만 오늘날에는 경쟁의 메커니즘으로 부와 권력을 획득한다는 것 정도일 뿐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기열전 전반에 걸쳐 드리워지는 진(秦)의 그림자처럼 마이크로프로세서 제국의 이야기 뒷면에는 언제나 MS의 그림자가 보인다.
『icon boys』라는 책을 쓴 데이비드 캐플런에 따르면 좋건 싫건 간에 실리콘밸리에서는 MS가 산소와 같다는 것이다. MS를 빼고는 이야기가 안 된다는 것이다. 전국시대의 어느 누구도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할 만큼 초강대국이었던 진이 관대하고 공명정대한 나라가 아니었던 것처럼 MS 역시 불공정하고 시장을 지배하려는 요구가 강했다. 너무나 많아서 불공정 조사를 받기도 했으나 경쟁자들은 조사를 받기 전이나 받는 도중에 사라졌다. 진의 역사는 어두운 면이 많았다. 우선 진의 시작은 목공이라는 왕으로 출발하는데 이때부터 진의 역사는 침략과 전쟁, 계략과 인재 스카웃(?)으로 점철되어 있다. 진의 세력이 점차 커나가자 다른 나라들은 힘을 합쳐 진에 대항하거나 복종하기로 했다(여기에서 ‘합종’과 ‘연횡’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결국 진은 이들을 무력으로 병합하거나 하나씩 와해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사람들은 그토록 진을 싫어하면서도 거대한 강국이었던 진의 말을 잘 들었다. 한편으로는 싫으면서도 사람들 본성 속에 대세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생존본능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좋건 싫건 사람들의 본성인 것이다. 사람들은 진에 대항해서 끝까지 싸우기보다는 자기 생전에 부와 영향력을 쥐고 싶어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사마천이 꿰뚫어본 것은 이처럼 어두우면서도 당연한 본성이었다. 사마천은 물질주의자는 아니었으나 물질과 물리적인 힘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본성을 무시하고는 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이건 현대 사회이건 무언가 일을 하려면 그때그때 세태에 잘 맞추어 일을 만들어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사람들의 본성을 따르면서….

NCSA, 그리고 Mosaic
199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자 PC의 시대는 또 한번 막을 내리는 듯했다. 사람들은 386 컴퓨터에서 도스나 윈도우 3.1을 사용하고 있었고 업체들이 멀티미디어나 GUI를 광고하고 있기는 했으나 딱히 컴퓨터를 가지고 무언가 할 만한 일이 없었다. PC 시장은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386의 붐도 486의 붐도 식어가기 시작했다. PC 업계들도 고전하기 시작했다. 인텔과 AMD가 속도 경쟁을 하며 빠른 CPU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윈도 3.1이나 코드명 ‘카이로’ 프로젝트의 윈도우 95가 나오더라도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지 모른다는 성급한 예측이 나왔다. 비관적인 사람들은 PC 시장은 이제 정말 종언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하게 되었고 전반적인 시장의 경기 역시 말이 아니었다. 불황이 계속되자 고가의 서버를 팔던 유닉스 업계에서는 시장이 축소되면서 자체 운영체제 개발을 포기하는 업체들이 늘어났다. 윈도우 NT가 나와서 그럭저럭 팔리기는 했으나 서버 시장이 크게 신장되리라는 기대도 없었고 시장에서는 새로운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텔만이 그럭저럭 x86 아키텍처의 칩들을 팔면서 선전하던 시기였다.
시장, 그것도 지금까지 알려진 최대의 시장이 1990년대 초반 갑자기 사람들 눈앞에 아무런 준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 사건은 1989년에 일어났다. 1970년대 초반부터 가동되던 ARAPNET이 막을 내리고 네트워크들은 다시 재편성되어 새로운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두 번째 사건으로는 팀 버너스 리에 의해 거의 독단적으로 웹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배느바 부시(Vannevar Bush)가 말하던 메멕스(memex)의 모습에 가까운 그 무엇인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팀 버너스 리는 그의 HHTP 프로토콜과 웹 서버, 그리고 간단한 웹 애플리케이션을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공개했다. 그 당시까지 팀 버너스 리는 별로 유명한 엔지니어도 아니었으나 이 발표로 일약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그림이 나오고 하이퍼텍스트를 선택하면 다른 웹 페이지를 볼 수 있는 웹을 무척 좋아했다(짧은 시간 내에 구현되기는 했지만 하이퍼텍스트라는 아이디어는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팀 버너스 리는 넥스트 스텝(NeXT Step) 운영체제에서 최초의 웹 브라우저를 구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쓸만한 웹 브라우저가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의 하드웨어도 변변한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웹 브라우저는 매우 불안정했고 불편했다. 당시에 일리노이대학에 다니던 마크 안드리슨은 대학의 슈퍼컴퓨터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1992년 말 안드리슨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편하게 서핑할 수 있는 웹 브라우저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안드리슨은 나름대로 웹 서핑과 웹 브라우저의 상업성을 감지할 수 있었다.
같은 동료였던 에릭 비나와 안드리슨은 웹 브라우저의 아이디어를 3개월 동안 코드로 만들었다. 초기에 약 9000줄의 코드로 구현된 이 브라우저는 사람들이 그래픽을 자유롭게 웹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안드리슨의 아이디어를 반영한 참신한 제품이었다. 둘은 이 브라우저를 ‘모자이크(Mosaic)’라고 불렀다. 1992년 12월 모자이크가 완성된 것이다.
모자이크를 사용하면서 사람들은 컴퓨터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만큼 모자이크는 사용하기 쉬웠다. 모자이크는 초기에는 네트워크에서 무상으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자이크에 열광했다. 1993년 9월 경 안드리슨이 몇 명 추가된 팀원들과 만든 새로운 개정판은 더 사용하기 쉬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1993년에 모자이크 사용자의 수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에 발맞춰 1993년 인터넷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아무튼 진정한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틈바구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모자이크는 당시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그 무엇인가를 채워주었다. 1993년 상업 사이트는 30개 정도에 불과했으나 1993년 말에는 1만 개로 불어났다. 컴퓨터의 마스터나 대가가 아니더라도 마우스만 클릭할 수 있으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었다.
VRML 개발자였던 Mark Pesce는 『사이버스페이스의 간략한 역사(ZDNet)』에서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터넷에는 두 단계가 있다: 모자이크 이전과 모자이크 이후가 그것이다. 팀 버너스 리가 만든 프로토콜(http, html, url)이 제공한 접속(connectivity)과 마크 안드리슨이 만든 웹 브라우저가 제공한 인터페이스(Interface)가 합쳐지자 웹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겨우 24개월 만에 웹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존재에서 일상용어가 되었다”

당시에 모자이크 정도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던 수준의 사람과 또 그것과 비슷한 아이디어는 많았다. 그러나 일단 모자이크는 빠른 시간 내에 시장을 장악하면서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인터넷의 기본적인 인프라는 이미 70년대부터 구현되어 있었으며 이메일이나 ftp 같은 프로그램도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최고의 히트 포인트인 웹은 나중에야 구현되었다. 안드리슨은 이들 사이의 숨겨진 고리를 연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자이크가 확산되어가자 NCSA의 관리팀은 모자이크를 더 발전시키려면 보다 더 체계적으로 개발을 통제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에릭 안드리슨을 포함한 개발진들에게 모자이크 개발에서 손을 떼라고 지시했다. 모자이크 개발팀은 회의 끝에 이들의 지시를 무시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관리팀 역시 개발팀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안드리슨은 이러한 처사에 분노했고 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실리콘밸리에 있는 EIT라는 작은 회사에 프로그래머로 취직했다. 물론 EIT와 브라우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모질라와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비슷한 시기에 제임스 클라크도 아이템을 찾고 있었다. 제임스 클라크는 컴퓨터 그래픽 워크스테이션 회사인 실리콘 그래픽스(SGI)의 창업자였으나 회사의 공개 당시 너무 적은 지분을 갖게 되었고 나머지는 벤처캐피탈의 몫으로 넘어갔다. 클라크는 이후 벤처캐피탈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 둔 이후에도 배당 싸움에 지쳐 있던 클라크는 어느날 회사의 시장 분석가에게 무언가 새로운 아이템을 들고 온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그 시장 분석가는 모자이크의 폭발적 현상에 대해 알고 있었고 모자이크의 제작자인 안드리슨을 지목했다. 모자이크를 이용하여 안드리슨의 홈페이지를 찾은 클라크는 안드리슨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1994년 초에 둘은 서로 만나게 되었다.
안드리슨이 클라크를 만나는 동안에도 모자이크는 폭발적으로 보급되었다. 이제는 워크스테이션뿐만 PC와 맥을 이용하여 웹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컨텐츠를 만들어내고 다시 이 컨텐츠 때문에 사용자가 늘어나는 포지티브 피드백이 일어났다. 그 이전의 킬러 애플리케이션과 모자이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미 확립된 네트워크 인프라 위에 새로운 HTTP 프로토콜이 만들어지고 그 프로토콜을 이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인 모자이크가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다른 킬러 애플리케이션들은 이런 인프라를 갖지 못했다.
안드리슨은 일종의 선견지명이 있었다. 당시에 정보고속도로라는 것을 만들겠다고 빌 클린턴이 공약하고 새로운 정보통신 채널을 기획하려 할 즈음 안드리슨은 인터넷이 이미 정보고속도로라고 단언했다. 새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안드리슨에 따르면 정보고속도로는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에 마이크로소프트는 독자적인 마이크로소프트 네트워크를 들고 있었고, 다른 회사들도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던 때였다.
8주간의 회의와 토론을 거친 후 클라크와 안드리슨은 NCSA에서 퇴사한 후 일자리를 찾던 동료들을 다시 모아 모자이크가 아닌 새로운 브라우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일설에 따르면 넷스케이프의 첫 이름은 모질라(mozilla)였는데, 모질라는 고질라와 모자이크를 합친 단어로 모자이크 킬러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만큼 일리노이대학의 NCSA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대신 코드는 저작권 문제로 처음부터 새로 작성해야 했다.
작업은 매우 빠르게 진행됐다. 기존 모자이크를 만들던 팀과 다른 사람들도 추가됐다. 롭 매쿨(Rob Mccool : NCSA 웹 서버를 만들었다. 이 서버는 나중에 완전히 개작된 아파치 웹 서버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과 루 몬털리(Lou Monterly : Lynx 브라우저를 만들었다)이 신규 멤버로 합류했다. 이들은 연봉과 스톡옵션에 합의한 후 작업을 곧바로 진행했다.
회사의 이름은 초기에는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이었으나 일리노이대학의 항의가 있자 넷스케이프로 이름을 바꾸었다. 브라우저 이름 역시 모질라로 정하려다가 마찬가지로 취소했다. 새로 만든 회사의 이름인 Netscape는 Internet과 Virtual landscape를 합쳐서 만든 이름이었다. 점잖고 그럴싸해 보이는 이름이었다. 회사 운영을 위해 전문 경영인이었던 짐 박스데일이 CEO로 합류했다. 짐 박스데일은 무명 회사의 CEO를 맡는 대가로 주식의 12%를 요구했다. 짐 박스데일은 공격적인 경영을 펼치기로 했다. 회사의 창립에는 전설적인 벤처 캐피탈리스트인 KP의 존 도어가 관여하게 되었다(KP는 그 이전에 지넨테크와 AOL의 IPO에도 관여한 바가 있다). KP는 넷스케이프의 초기 투자를 실시했는데 초기 넷스케이프의 가치를 잠재적으로 2000만 달러 정도로 평가했다.
일리노이대학은 NCSA에서 만들어낸 것은 NCSA 소유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에 코드는 완전히 새로 작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CSA는 로열티를 요구했다. NCSA는 스파이글래스사를 만들어 웹 브라우저 시장에 뛰어든 상태였고, 곧바로 넷스케이프 역시 법적인 조치를 취하여 서로 고발한 상태가 되었다. 1994년 연말이 되어서야 넷스케이프가 자사의 주식 일부를 일리노이대학에 증여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너무나 급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는 통에 일은 갈파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1994년 4월 4명으로 출발한 기업이 그 해 말에는 100명으로, 3년 뒤에는 2600명으로 증가했다. 1994년 10월 넷스케이프가 무료로 배포되었다. 웹을 통해서도 배포되었다. 모자이크를 추월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사용자 수는 곧바로 200만 명을 넘어갔으며 95년이 되자 1000만 명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회사는 아직 시장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웹 브라우저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95년이 되자 대세는 결정적이 되었고, 넷스케이프가 수익은 없더라도 웹 브라우저 시장을 장악했다. 경영진들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찾아야 했다. 부분적으로는 넷스케이프의 라이선스를 유료로 전환하고 서버와 인트라넷 시장에 진입하여 수익을 내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수익구조를 맞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넷스케이프가 돈을 만지게 된 것은 주식공개를 통해서였다. 회사의 안정된 운영 자금을 만들기 위해 창립 16개월 만에 주식공개를 단행했다. 그 이전까지는 이러한 관례가 없었다. 넷스케이프는 1995년 8월에 주식을 공개했는데 그전에는 공모 가격을 놓고 고민했다. 가격이 너무 낮으면 무시를 당할 것이고 너무 높으면 사람들이 망설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문의전화가 너무 많이 걸려오는 통에 최초에 생각했던 가격의 2배 정도인 31달러에 책정했다. 주식공개의 첫날 첫 번째 닷컴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넷스케이프의 주식은 엄청난 매수 주문 속에 71달러로 시작하여 58달러로 마감되었다. 회사는 갑자기 돈방석에 앉게 된 것이다. 주식 값은 계속 폭등하여 100달러를 넘어섰다. 초기의 투자자인 KP는 이전 평가액의 약 100배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이러한 현상 자체가 마케팅이었다. 사람들은 넷스케이프의 주식이 더 오를 것이라고 보고는 계속 더 높은 가격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회사는 꿈을 팔기 시작했다. 일부 투자가들은 거품이라고 경고했으나 그 소리는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비슷한 일들이 이베이나 아마존, 그리고 레드햇을 포함한 회사들에서 계속 되풀이되었다.
주식공개로 모두 부자가 된 후 1년여 동안 넷스케이프는 수익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긴 해도 별 문제 없이 인터넷을 지배했다. MS가 브라우저 시장에 뛰어들기 전까지 넷스케이프의 주식은 174달러에 이르렀고 시장점유율은 80%대에 이르게 되었다.

윈도우 95와 익스플로러
윈도우에 포함되어 있는 웹 브라우저인 익스플로러의 도움말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라이선스 조항이 나온다. 필자의 익스플로러의 화면에 나오는 문구에도 다음의 문구가 적혀 있다.

Based on NCSA Mosaic. NCSA Mosaic(TM); was developed at the National Center for Supercomputing Applications at the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익스플로러는 애초에 모자이크의 코드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안드리슨의 소스코드는 다시 만들어져 넷스케이프에서 사용되고 개작되긴 했지만 익스플로러에서도 사용된 것이다. 상당히 기구한 개발 운명을 가진 소스코드라고 할 수 있다. MS는 워낙 급하게 브라우저 시장에 뛰어든 것이기에 새로운 기술 유전자를 만들어낼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그만큼 빠르게 돌아가기도 했지만 MS의 특기는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익스플로러와 넷스케이프의 브라우저 싸움에서 문제가 된 것은 기술적인 문제나 코드의 라이선스 문제가 아니라 MS의 영업 방식이었고 나중에 독점금지법에 관한 소송의 빌미가 되었다. MS가 경쟁자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법정 자료로 공개되어 있기도 하다.
MS는 그전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웹이 거대한 시장으로 변하자 브라우저 시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넷스케이프의 독주를 허용한다면 9000줄의 코드로 시작한 이 작은 애플리케이션이 하나의 운영체제처럼 변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자바나 다른 표준들이 자리를 모두 차지하게 되면 MS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MS와 넷스케이프의 협력관계 형성은 처음에 넷스케이프에서 MS의 협력을 거부하는 악연으로 출발했다. MS는 윈도우 95의 출시를 준비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도와달라는 부탁에서부터 넷스케이프와 충돌했고, 나중에는 소스코드를 제공해 달라는 요청까지 했으나 넷스케이프는 이러한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회사는 윈도우 95의 출시를 위한 준비와 협력 작업을 위해 몇 차례의 미팅을 가지기도 했다. 나중에 넷스케이프 측에서 알게된 것은 MS가 정작 애플리케이션 공급자로서 넷스케이프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MS는 자체적인 웹 브라우저를 만들려 하고 있었고 몇 번의 미팅이 있은 다음에는 협력이 아니라 넷스케이프 주식의 상당수를 매입하려 한 적도 있었다.
1994년 당시만 해도 문제의 중요성에 비해 MS의 개발 인력 수는 현저하게 적었다. 갑자기 폭발적으로 커지는 인터넷 시장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다시피 한 MS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넷스케이프의 네비게이터에 대한 준비의 일환으로 MS는 NCSA와 스파이글라스의 모자이크를 기본으로 한 웹 브라우저의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넷스케이프에 대항하기로 했다. 1995년이 되자 인터넷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빌 게이츠는 갑자기 네트워크와 인터넷의 중요성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어느덧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중요한 목표가 되고 말았다. 회사의 최우선 전략을 인터넷으로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윈도우 95의 발표가 있은 지 몇 주 후 MS 익스플로러가 발표되었다. 같은 해 넷스케이프가 주식을 공모하고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결의는 더욱 굳어졌다.
1995년은 MS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넷스케이프는 계속 앞서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 말이 되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빌게이츠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개선이 MS의 핵심 사업이며 이를 무상으로 배포하겠다고 선언했다. 넷스케이프로서는 직격탄을 맞은 셈이었으나 MS로서는 인터넷이 자신들의 시장을 위협하는 일을 결코 허용치 않겠다는 중요한 목표이기도 했다. 넷스케이프로서는 중요한 수익 모델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운영체제가 될 것이 분명한 윈도우 95에 번들링된 익스플로러와의 경쟁이 시작될 것이 분명해졌다. 수백 명의 직원들이 웹 브라우저 개발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개발에 도움이 될 만한 프로그래머들을 스카웃하기 시작했다.
1995년 말 빌 게이츠의 선언이 있고 나서 넷스케이프의 주가는 폭락했다. 시장점유율은 여전히 높았으나 넷스케이프 사용자보다 많은 윈도우 95의 사용자들이 이미 있었고, 이들 중 많은 수기 장차 번들링되는 무상의 익스플로러를 사용할 것은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넷스케이프는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충격에 대비하고자 했다. 홈페이지의 광고라든가 서버 사업 같은 것들을 진행하며 수익을 내기 시작했고 인트라넷 사업도 잘 진행되긴 했지만, 넷스케이프의 브라우저 라이선스 계약은 곧 수익성을 잃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1996년 두 회사 모두 버전 3.0의 브라우저를 만들었지만 이전처럼 넷스케이프의 브라우저가 월등한 성능을 보이지 않을 만큼의 격차가 줄어들었다. 더욱이 3.0 버전의 익스플로러는 무상으로 번들링되기 시작한 것이다.
MS는 이러한 작업으로 만족하지 않고 넷스케이프를 고사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일환으로 당시 컴팩이 기본 웹 브라우저를 당시로서는 성능이 더 나아보이는 넷스케이프로 변경하는 작업에 대해 위협했다고 한다. 컴팩은 운영체제를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손을 들고 말았다. HP나 AOL에도 압력을 행사했다. 애플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에 처했다. AOL이 MS의 편으로 돌아서자 다른 통신회사들도 AOL의 뒤를 따랐다. 일부 회사들에게는 익스플로러 채택에 대한 보조금을 제공하기도 했다고 한다.

넷스케이프의 퇴락
중요한 라이선스 시장이 모두 막혀버린 넷스케이프는 꼼짝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익스플로러는 시장점유율이 1996년 20.5%에서 97년이 되자 40%에 육박하고 넷스케이프는 그만큼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재정 역시 중요한 수입원이 끊기자 엉망이 되고 말았다. 1998년이 되자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는 익스플로러에게 시장점유율을 추월 당했다. 결국 그해에 넷스케이프는 프로그래밍 소스를 공개하면서 손을 놓아야 했다. 회사 내에서 에릭 한 같은 사람들이 오픈소스 쪽으로 기울면서 소스 공개를 주도했는데 이 과정은 『리눅스 혁명과 레드햇(Under the Radar)』이라는 밥영의 책에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코드명은 다시 모질라(Mozilla)로 되돌아갔다. 공개된 코드는 Mozilla Foundation(www.mozilla.org)에서 관리되고 있다. 넷스케이프는 코드가 퇴물이 되어 완전히 가치를 상실하기 전에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긴급한 결정을 내렸다.
넷스케이프는 나름대로 생존 전략이 있었는데, 회사를 AOL에게 매각하기로 한 것이다. 이 역시 묘한 이유와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회사의 규모를 키우는 데 총력을 집중하고 있던 미국 최대의 포털 업체인 AOL은 넷스케이프의 포털인 netcenter.com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미 넷스케이프의 주가는 공모가보다 훨씬 떨어졌기 때문에 미국 포털의 5위권 내에 드는 이들의 넷센터는 AOL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AOL은 98억 달러에 넷스케이프 주식의 9%를 인수하기로 했다. 덕분에 주가가 크게 올랐다. 네스케이프를 인수하기 전의 AOL의 주가 총액이 900억 달러 정도였으나 인수 후 1500억 달러까지 상승하면서 AOL 역시 큰 득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개발자들은 커다란 불행 없이 회사를 정리할 수 있었으나 인터넷 세계를 여행하는 웹 브라우저 싸움에서는 이기지 못한 것이다.
넷스케이프는 운이 좋은 편이었으나 브라우저 시장은 운영체제에서와 같이 한 회사의 지배로 넘어갔다. 세계 최고의 업체가 탄생한 지 1년도 안 된 브라우저 업체를 상대로 벌인 MS의 가혹한 탄압은 훗날 다른 업체가 중요한 아이템을 선점했을 때 어떤 위험에 처할 수 있는지를 미리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중요한 경쟁자를 몇 번만 처리하고 나면 시장의 지배는 확실시될 수밖에 없다. 나중에 MS는 법무부에 기소되었는데 중요한 혐의점은 다른 기업을 희생시킬 목적으로(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이루어진 정책, 번들링, 배타적인 계약 체결의 강요 등이었다. 수천 명의 변호사가 동원되고 관련 서류의 양도 엄청난 분량이었으나 기소는 MS에 그다지 큰 손실을 주지 않은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MS는 IBM이나 AT&T처럼 독점금지법에 의해 분할되는 일을 당하지도 않았다. 시장점유율은 거의 운영체제의 점유율과 비슷한 수준으로 되었다.
사람들은 그 이후부터 암묵적으로 MS의 익스플로러를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웹에 대한 거의 모든 무의식과 문화는 MS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익스플로러의 창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분간 이보다 큰 싸움은 없을 것이다.

출처: 마이크로 소프트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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